〈공기살인〉 영화평:
영화로 보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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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반가운 영화가 나왔다. ‘안방의 세월호’라 불리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다룬 〈공기살인〉(감독 조용선)이다. 영화 〈터널〉의 원작 작가이기도 한 소재원 작가의 소설 《균》을 영화화했다고 한다. 영화는 개봉 첫 주 주말 한국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배우들의 명품 연기는 영화의 메시지를 더욱 잘 전달한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는 2011년 정부의 역학조사 발표로 처음 수면 위로 드러났다. SK이노베이션(당시 유공), 옥시, 애경 등 여러 기업이 출시한 가습기 살균제는 1994년부터 17년간 1000만 개가 판매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다. 그러나 그 독성은 인체에 치명적이었고, 정부 공식 통계상 사망자만 1700명이 넘는다. 그러나 이조차 최소한으로 집계된 수치다. 최대 1만 4000명~2만 명 이상이 사망했을 거라고 추정하는 조사 결과들(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 등)도 있다.
영화는 이 참사가 생명보다 이윤을 중시한 기업과 정부의 책임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항의가 계속돼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알고 있었죠,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거”
영화는 원인 불명의 급성 폐질환으로 아들이 갑자기 쓰러지고 아내도 잃은 태훈(김상경 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의사인 태훈은 폐질환의 원인을 찾으려 동분서주한 끝에, 비슷한 질환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더 있고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라는 것을 알아 낸다. 가족을 잃고 자신도 병을 얻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마주하면 눈물을 참기 힘들다.
그러나 제품을 만들고 판매한 기업은 책임 회피에 급급하다. 치명적인 독성을 알면서도 판매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기업 이윤에 큰 타격일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은 항의하는 피해자를 돈으로 회유하고, 대형 로펌과 지검장 출신 변호사의 도움을 받고, 과학자를 매수해 실험 결과를 조작하고, 언론들에 압박을 넣는다.
국가도 화학 물질에 대한 규제를 제대로 하지 않고 위험한 제품을 허가해 준 책임이 있다. 그런데 오히려 책임을 회피하는 기업을 돕는다. 피해자들이 합심해 어렵게 재판이 열리지만, 사법부는 재판을 질질 끌려 하는 기업 편을 든다. 청문회 장면에서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바쁜 각 부처 관료들을 보면 울화가 치민다.
기업, 국가, 정치인들이 책임을 무마하려 시간을 끄는 동안 피해자들은 죽어 갔다. 병원비로 큰 빚을 진 피해자들도 많았다.
우선순위
피해자들이 처절하게 싸우는데도, ‘사람 좀 죽으면 어때? 남은 것도 다 팔아치워’ 하고 말하는 잔인한 기업주들이 대비되는 장면을 보면 어떻게 같은 인간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는지 분노가 인다.
기업들의 우선순위는 그 무엇보다 이윤 경쟁에서 앞서나가는 것이다. 국가는 그런 기업을 위해 규제를 풀고 무죄를 선고한다(실제로 SK케미칼과 애경의 전직 임원들이 지난해 1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기업 경쟁력이 곧 국가의 경쟁력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 규제를 풀고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핵심 책임 기업들이 무죄를 받은 것에서 보듯, 참사 책임자들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고 오히려 더 많은 희생을 불러올 규제 완화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경제〉 등 경제지들은 ‘화학 규제’로 기업들이 몸살을 앓는다며 끊임없이 규제 완화를 주문한다.
문재인 정부는 2019년 한일 갈등 국면을 이용해, 가습기 살균제 참사 등을 계기로 도입된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을 개악하려 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안전을 대가로 한국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려 한 것이다.
윤석열은 안 그래도 누더기인 중대재해처벌법을 더 후퇴시키려 한다.
사람들의 안전과 생명을 볼모로 삼는 이윤 몰이는 자본주의 체제의 지상 과제다. 세월호 참사, 광주 아파트 붕괴 참사, 끊이지 않는 산업재해 모두 이윤을 앞세우는 자본주의 논리 때문이다.
영화 〈공기살인〉은 분노한 유족과 피해자들이 앞장선 항의 집회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기업과 국가에 대한 항의, 나아가 자본주의를 향한 항의만이 안전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길이다. 지금도 항의를 이어 가고 있는 이들에게 연대를 보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