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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캘리니코스 논평:
현실주의자가 아닌 권력 숭배자에 불과했던 키신저

서방 제국주의가 사랑한 전쟁 범죄자 헨리 키신저 ⓒ출처 Kai Mörk

헨리 키신저의 죽음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 군사력을 무자비하게 사용해 서방 제국주의를 지키려는 자들 사이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반응이다. 영국 노동당 전 대표 토니 블레어나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의 반응이 그런 사례다. 그들은 키신저의 지혜를 칭송하며 키신저를 진정한 “정치인”이라고 찬양했다.

그러나 세계의 나머지 사람들은 키신저를 전범이라고 비난했다. 물론 이것이 옳은 반응이다. 그러나 키신저가 베트남, 캄보디아, 칠레, 아르헨티나, 동티모르 등지에서 벌인 수많은 악명 높은 범죄들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계속 존경받는 유명인 대접을 받았는지는 던져 볼 만한 물음이다. 그것은 그 늙은 괴물이 스스로를 잘 홍보한 결과다.

《뉴 스테이츠먼》에 실린 벤 주다의 기사가 이 점을 탁월하게 지적했다. 원래 그 기사는 지난 5월 키신저의 100세 생일을 기해 쓴 것이다. 주다는 키신저가 공직에서 물러난 시점이 1977년 1월, 그러니까 무려 46년 전임을 지적한다. 그러나 “언론을 다루는 능숙한 솜씨로 키신저는 스스로를 브랜드로 만들고, 그 브랜드로 ‘키신저 협회’라는 고수익 국제 컨설팅 기업을 설립했다.”

주다는 키신저가 깊은 통찰을 주기보다는 “뻔한 얘기나 하는 인터뷰를 전문으로 했다”고 지적한다. “‘중국이 부상하고 있다’거나 ‘러시아가 보복을 꾀한다’는 뻔한 얘기를 마치 예언자스러운 위엄을 띠고 늘어놓았다. 그런 다음 독자들의 시야 바깥에 있는 18세기 후반 역사를 곁들였다.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메테르니히를 슬쩍 언급하는 식이다. 그 결과물은 별로 특별한 게 없는 맹탕이다.

“이것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지난 세월 동안 키신저가 발휘한 재능은 그런 싱거운 소리를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귀 기울이는 능력에 있었다. 키신저는 고객이나 후원자, 핵심 권력층에 귀 기울이고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바를 정확히 말하는 재능이 있었다.” 기업주들이 외부 전문가를 고용하는 것은 많은 경우 그들의 분석 능력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결정이 옳다는 것을 재확인하기 위해서라고 주다는 지적한다.

나는 주다가 키신저를 부정적으로 그리면서도 그를 그의 민주당 측 경쟁자이자 1977~1981년 지미 카터 정부의 안보 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와 대비시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브레진스키는 미국 제국주의의 세계적 우위를 유지한다는 목표를 숨기지 않고 거기에 인생을 바쳤다. 그 목표를 위해 브레진스키는 이슬람주의 게릴라를 지원해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에 맞서게 하는 정책을 개발하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그 정책은 알카에다와 탈레반의 부상을 낳았다. 극악한 수단만이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다가 정확하게 꼬집었듯이 키신저는 독자적인 사상가라기보다는 권력의 숭배자였다. 역사가 그렉 그랜딘도 《키신저의 그림자》(2015)에서 이러한 평가를 예고한 바 있다. 그랜딘은 키신저가 흔한 주장과 달리 현실주의의 신조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현실주의에 따르면 국가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필요한 경우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현실주의는 국가의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그에 따른 제약을 면밀하게 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한스 모겐소, 케네스 월츠, 존 미어샤이머 같은 주요 현실주의자들은 아마도 그런 신조에 따라 미국의 대외 정책을 비판하는 것일 테다.

반면 키신저는,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은 없다고 하버드대 학생 시절 때부터 줄곧 주장했다. 1963년 키신저는 이렇게 썼다. “두 종류의 현실주의자들이 있다. 사실을 주무르는 현실주의자들과 사실을 만들어내는 현실주의자들이다. 서방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사람은 자기 나름의 현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다.”

키신저는 경력을 쌓는 내내 “자기 나름의 현실을 만들어” 내려 했다. 키신저는 인상을 조작함으로써 출세했다. 처음에는 냉전의 절정기에 정책 지식인으로서, 그후 1967~1977년에는 닉슨 정부와 포드 정부에서 그렇게 했다. 그리고 그는 인도차이나 맹폭격을 지시해 수많은 사람을 죽게 했다. 현실이 아닌 인상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69년 당시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이 키신저에게 물었다. “왜 베트남에서 빠져나오지 않습니까?” 키신저는 이렇게 답했다. “갑작스럽게 빠져나오면 미국이 신뢰성 문제를 겪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1972년 4월 키신저는 소련 지도자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에게 베트남 전쟁에서 빠져나올 방안을 시사했다. “베트남에서 평화 합의가 이뤄진다면 [미국은 — 캘리니코스] 베트남인들이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데 선뜻 동의해 줄 것입니다. ⋯ 일정 시간, 예컨대 18개월 후에 말입니다.”

실제로 사이공이 함락된 것은 1975년 4월이었다. 미군 철수를 가능케 한 북베트남과의 평화협정이 체결된 지 2년 반이 지나고 나서였다. 그러는 동안 미국의 “신뢰성”을 구제하는 데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희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