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잘못된 단어 – 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우리를 침묵시키는가》:
어느 진보 언론인의 정치적 올바름 비판서
〈노동자 연대〉 구독
《잘못된 단어 – 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우리를 침묵시키는가》(이하 《잘못된 단어》)는 ‘정치적 올바름’(이른바 PC)에 대한 만만찮은 비판을 제기한다.
저자 르네 피스터는 독일의 진보 성향 주간지 〈슈피겔〉의 기자로, 미국 국가안보국이 앙겔라 메르켈의 휴대전화를 도청한 사건을 취재해 독일어권 최고의 기자상인 헨리난넨상을 수상한 바 있다.
저자는 트럼프가 대통령이던 시절 미국에서 특파원으로 일하며 정치적 올바름 문화에 대해 보고 느낀 것을 이 책에 기록했다. 저자는 다양한 사례를 들어 정치적 올바름의 과도함과 독단주의 문제를 조목조목 짚는다. 그 사례들을 보면 국내에서 있었던 일부 유사한 일들도 떠오른다.
저자는 정치적 올바름이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킨다는 점에 주목한다. 극우의 부상으로 표현의 자유가 공격받고, 좌파의 일부도 “혐오표현” 제한을 이유로 표현의 자유 제한에 찬성하는 오늘날, 저자의 이런 비판은 경청할 만하다.
본격적인 서평에 앞서 정치적 올바름이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게 좋겠다. 정치적 올바름은 넓게는 차별에 민감해야 한다는 정서와 문화를 대변하며, 차별적 언어 쓰지 않기, 언어 개혁, 소수자 우대 조치 등 여러 차별 개선 조처를 묶어서 일컫는다.
정치적 올바름이 표방하는 이런 조처들은 지지해야 한다.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깜둥이,” “변태,” “병신” 같은 노골적인 비하 표현은 물론, “절름발이 정책”처럼 무심코 쓰는 관용구도 피하는 게 옳다.
우파는 좌파가 정치적 올바름을 앞세워 차별에 “과민하게” 굴고, 이것이 표현의 자유를 해치고 역차별을 낳고 있다고 비난한다(대표 주자로 트럼프, 한국에서는 이준석·하태경이 있다).
그러나 우파의 이런 공격은 차별 개선을 가로막거나 후퇴시키고자 차별 반대 정서와 그 운동 전체를 비난하기 위한 것이다. 또, 그들의 ‘표현의 자유’ 운운은 성차별, 인종차별적 언행을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우파의 위선적 비난에 속아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저자가 조목조목 짚어 내듯이 정치적 올바름은 만만찮은 부작용도 내고 있다. 때문에 차별 반대 운동의 전진을 위해서 그에 대한 비판도 필요하다.
요컨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혁명적 좌파의 태도는 비판적 지지여야 한다. (이는 저자가 비판 일색인 것과는 차이가 있다.)
《잘못된 단어》의 저자가 지적하는 정치적 올바름의 과도한 측면들과 그 부작용에 대한 비판은 이런 출발점 위에서 살펴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차별적 의도가 없는 말일지라도 공격
저자는 정치적 올바름 지지자들이 차별적 의도가 없거나 오히려 차별을 개선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나온 말이라도 맥락을 무시한 채 공격하는 우를 범한다고 지적한다.
그가 든 사례는 다음과 같다. 2020년 시카고 일리노이대학교의 한 법학 교수는 직장 내 차별을 다루는 과제를 학생들에게 주면서 한 여성이 당한 언어적 모욕 사례를 제시했다. 교수는 그녀가 당한 ‘니그로’라는 흑인 차별적 말을 그대로 노출하지 않기 위해, 이 단어의 앞 글자만 따서 ‘n…….”이라고 표기한 후, 이 단어가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여성을 지칭하는 비속어”라고 각주를 달았다.
그러나 법학과 흑인학생회는 n이라는 단어를 보기만 해도 “정신적 테러”를 겪었다고 항의했다. 교수는 임시 정직 처분을 받았다.
누가 보더라도 해당 교수는 명백히 차별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비속어를 비판적으로 언급했다. 그런 언급조차 잘못이라는 건 분별없는 행동이다.
또 다른 사례로는 2018년 베를린의 앨리스살로몬대학 당국이 대학 건물 벽에 적힌 오이겐 곰링어의 시를 제거한 일이다. 1951년에 지어진 그 시는 구체시의 고전으로, 아래와 같다.
“가로수/가로수와 꽃/꽃과 여자/가로수/가로수와 여자/가로수와 꽃과 여자 그리고/숭배자”
그런데 일부 학생이 여기서 ‘숭배자’를 성추행범으로 해석하며 대학 당국에 항의했다. 곰링어는 철거가 예술과 시적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이 사례는 배우 유아인의 트위터상 ‘애호박’ 발언이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태도로 터무니없이 매도된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차별적 함의가 없는 말이나 창작물조차 차별적이라고 낙인찍고 비평과 비판을 넘어 작품을 아예 없애라고 요구하는 방식은 정치적 올바름 지지자 다수의 도그마주의를 보여 준다.
무조건 배척의 문제점
저자는 정치적 올바름 지지자들이 사안의 진상과 경중, 당사자의 태도 변화 등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찍어내고 배척하는 문제점도 지적한다.
그리고 정치적 올바름 문화 속에서는 “극히 작은 실수조차 가장 가혹하게 처벌된다.” 정치적 올바름 지지자들은 누군가 한 번 잘못하면 무조건 배척하고, 이후 그가 공동체로 복귀하려면 무한히 반복적인 사과를 요구한다.
저자는 이와 관련한 몇몇 사례도 소개한다. 2021년 《틴 보그》 편집장으로 영입된 흑인 기자인 알렉시 맥캐먼드는 17살 때 트위터에 아시아 여성과 동성애자를 멸시하는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맥캐먼드는 2019년에 이 일을 사죄하고 글을 삭제했다. 철없던 10대 시절의 잘못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몇 년 후 맥캐먼드가 편집장으로 임명되자 《틴 보그》 편집자들이 맥캐먼드 채용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17살 때 남긴 트위터의 스크린샷이 다시 인터넷에 등장했다.
맥캐먼드는 더 높은 강도로 자책하며 그 일에 대해서 다시 사죄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맥캐먼드는 편집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 사례는 녹색당 트랜스젠더 활동가였던 고(故)김기홍 씨의 사례를 떠오르게 한다. 김기홍 씨는 정치에 입문하기 전인 10년 전에 트위터에 몇몇 부적절한 언급을 했다는 이유로 거센 국회의원 후보 사퇴 요구를 받았다. 그는 과거 언급에 대해 사과하고 후보에서 사퇴했지만, 온라인에서 맹렬한 비난과 트랜스 혐오적 비방이 이어졌다. 그 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18년 영어권 최고 문예 교양 잡지인 《뉴욕 리뷰 오브 북스》는 록스타이자 라디오 진행자였던 지안 고메시의 글을 실었다. 그는 여러 여성이 제기한 성폭행 혐의로 기소됐다가 무죄 판결을 받았다(판사는 여성들이 법원을 속였고, 진실만을 말하겠다는 맹세를 일부 저버렸다고 지적했다).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 실린 고메시의 글은, 형사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대중의 도덕 재판에서 단죄받아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한 남자의 체험담이었다.
그 글은 SNS에서도 분노의 폭풍을 맞았다. “진상이 무엇이건” 성폭행 혐의를 받은 자에게 어떻게 발언권을 줄 수 있냐는 비난이 빗발쳤다. 결국 《뉴욕 리뷰 오브 북스》의 대표는 고메시의 글을 실은 편집장 이안 부루마에게도 사직을 권고했다. 부루마가 아주 오랫동안 칼럼을 연재했던 신문과 잡지는 이후 그와 일하기를 피했다. 계속 일하고 싶으면 공개 사과를 하라는 압박이 그에게 가해졌다.
정치적 올바름 지지자들에게 한 번 찍히면 명예를 회복할 길은 사실상 영구히 차단된다. 저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이런 분노는 진실에 관심이 없고 분노의 대상이 직장이나 발언권을 상실해야 비로소 가라앉는다.”
표현의 자유 억압 문제
저자는 부적절하거나 이견이 있을 수 있는 주장에 대해 비판을 넘어 찍어내고 배척하는 풍토인 ‘캔슬 컬처’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언급한다. (캔슬 컬처의 구체적 사례들과 그 문제점에 대해서는 ‘캔슬 컬처, 차별에 맞선 효과적인 방법?’(〈노동자 연대〉 413호)을 참고하기 바란다.)
특히, 저자는 정치적 올바름 지지자들이 벌인 여러 강연 취소(노플랫폼) 사례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이런 노플랫폼 전술의 무분별한 남용 경향은 특히 대학에서 강한데, 저자는 학생들이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 토론하고 논쟁하기보다는 발언권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대응한다며 우려를 표한다.
“학생들은 더 나은 주장을 펼치려 애쓰지는 않고 자신의 세계관 강화에 몰두했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시도를 자신의 정서적 안정과 안전을 공격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좌파는 콘돌리자 라이스(전 미국 국무부 장관)나 크리스틴 라가르드(IMF 총재) 같이 대중의 삶을 망가뜨리는 악행을 저지른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항의를 문제 삼아선 안 될 것이다.
하지만 그저 자신들이 보기에 ‘자격’이 충분치 않거나,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강연 취소를 요구하는 것은 정치적 이견을 둘러싼 토론을 가로막는 문제점을 낳는다.
2021년 독일 하노버시는 정년 퇴임한 한 아프리카 역사학 교수를 초청해 인종차별 반대와 독일 식민지 역사에 대해 강연하고 젊은 활동가들과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하려고 했다. 그 교수는 독일이 과거 식민지에서 저지른 범죄를 정부가 직시하게 하는 운동을 수십 년 동안 벌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단의 활동가들이 이 강연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가 아프리카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는 늙은 백인 남성이라는 이유였다. 결국 하노버시는 행사를 취소했다.
한계와 약점
이렇듯 저자는 정치적 올바름 지지자들의 과도함과 도그마주의에 따른 문제점들을 통찰력 있게 지적한다.
그러나 ‘진보’파에 동반되곤 하는 약점도 있다.
저자는 양극단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급진적인 주장들 자체에 다소 부정적인 견해를 비치기도 한다. 그것이 국민 대다수의 정서와 맞지 않다는 이유로 말이다.
가령 저자는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 내에서 제기된 경찰 예산 삭감 구호나 경찰을 “쓰레기”라고 규탄한 주장, 독일 기후위기 활동가들이 ‘신호등 연정[녹색당-자유민주당-사민당의 연정]‘을 향해 개혁 염원을 배신했다고 비판한 것 등이 역풍을 부르는 과도한 주장이라고 보는 듯하다. 하지만 서평자가 보기에 이런 요구와 비판들은 오히려 옳다.
저자는 정치적 올바름이 트럼프 같은 우익을 득세하게 만들어 민주당이 패배했다고도 주장한다.
미국 민주당은 진정한 개혁을 제공하지는 않으면서 정치적 올바름의 몇몇 언사를 사용해, 트럼프를 지지한 노동자들을 “개탄스러운 자들”이라 경멸했다. 물론 이것은 이들을 정서적으로 이반케 하는 효과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이 패배한 진정한 원인은 민주당이 급진적이었다거나, 정치적 올바름에 헌신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진정한 이유는 민주당의 개혁 약속 배신, 기만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미국 서민들이 환멸을 느껴 민주당에 냉담했던 것이다.
민주당은 또한 전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았다.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은 오바마 정부 때 시작됐고, 바이든 정부는 임신중단권을 부정한 대법원 판결 이후 이에 대한 실질적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대안
이 책은 정치적 올바름에 몇몇 난점이 있음에도 차별에 맞서는 사람들이 왜 이 정서와 문화에 이끌리는지, 또 차별에 맞선 더 효과적인 대안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데서도 공백이 있다.
정치적 올바름 정서와 문화의 확산은 수년간 급진화가 전개됐지만 차별 완화의 근본 동력이 돼야 할 계급 투쟁의 수위는 낮은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시기에 급진화된 세대는 각종 차별에 대한 정당한 반감을 갖고 있지만, 차별을 낳고 온존시키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강력하게 도전하는 집단적 투쟁은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개인주의적 방식으로 차별에 도전하기 쉽다.
좌파가 차별의 원인을 개인들의 부적절한 언행에서 찾고 이들을 공격하고 배척하는 데 초점을 맞춰 온 것은 특히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차별 반대 운동 내에서 득세한 ‘특권 이론’이나 정체성 정치는 특정 차별을 겪지 않는 사람들을 권력자나 심지어 잠재적 가해자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정치적 올바름의 핵심 전략은 노동계급 대중 투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기보다는 권위 있는 지위를 이용해서 차별 반대 조처를 위로부터 도입하는 것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차별받는 집단 내에서도 주류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일정한 지위를 가진 층에 그 사회적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은 중간계급 지향성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도 지적하듯이 정치적 올바름이 때로는 민주당 같은 기득권 정당부터 실리콘 밸리, CIA 같은 조직에서도 채택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특히 차별과 계급 문제를 분리시켜서 생각하는 것은 정치적 올바름의 가장 큰 난점이다. 그런 접근법은 차별을 온존케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공격하기보다는, 그런 시스템의 영향을 받는 개개인들을 차별의 원인으로 여겨 그런 개인들을 주된 공격대상으로 삼기 쉽다.
그렇기에 정치적 올바름은 그 지지자나 반대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사실은 급진적이지 못하다. 그리고 혁명적이지 않고 명백히 개량주의적이다.
특히, 운동 내 일부 개인들이나 단체들을 비난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방식은 대중 운동을 어렵게 만들기 쉽다. 그런 사람들을 낙인 찍고 밀어내야 차별을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과도 함께 투쟁하고 운동을 키우면서, 편견에 도전하는 토론과 논쟁을 해야 한다. 바로 그런 과정에서 대중은 편견을 깨고 의식과 언어, 습관을 변화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