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남태평양 식민지 누벨칼레도니(뉴칼레도니아)에서 독립 항쟁 분출하다
〈노동자 연대〉 구독
남태평양의 섬 누벨칼레도니(영어명 뉴칼레도니아) 사람들이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 맞서 항쟁에 나섰다.
프랑스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수일 동안 자동차와 사업체를 불태우고 상점을 약탈했다. 지난 30여 년 이래 누벨칼레도니에서 일어난 가장 큰 항쟁이다.
누벨칼레도니 주재 프랑스 고등판무관 루이 르프랑은 그 소요를 “내란”으로 일컬었다. 르프랑은 수도인 누메아의 거리에서 약 3000~4000명이 “활개 치고 있고”, 누메아 주변 지역의 거리에서 또 다른 5000명이 그러고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국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병력 수백 명을 추가 파병했다. 프랑스 총리 가브리엘 아탈은 당국이 “폭도와 약탈자들을 최대한 가혹하게 처벌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리고 12일간의 비상사태 선포로 “질서 회복을 위한 조처를 대대적으로 시행”하겠다고 했다.
친(親)프랑스 무장 단체들은 프랑스 국가의 승인하에 나름대로 탄압을 수행하고 있다.
이번 소요는 프랑스 의회가 유권자 등록법을 개정해 누벨칼레도니 선거에서 더 많은 프랑스인 유권자가 투표할 수 있게 한 것에 항의해서 분출한 것이다. 토착 원주민 지도자들은 그 법 개정으로 누벨칼레도니 인구의 약 41퍼센트를 차지하는 토착 원주민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고 독립 요구 주민투표가 차단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4월 중순 누메아에서는 독립 요구 시위대 약 5만 5000명과 친프랑스 시위대 3만 5000명이 경합했다. 누벨칼레도니 인구가 27만 5000명인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규모다. 2020년에 열린 주민투표에서 프랑스로부터 분리 독립은 5000표도 안 되는 표차로 부결됐다.
터무니없게도 프랑스 정부는 이번 소요에 관해 누벨칼레도니에서 한참 떨어진 아제르바이잔을 탓했다. 2023년 7월 아제르바이잔은 “식민 지배의 완전한 종식을 향해”라는 제목의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프랑스 식민지들인 마르티나크섬·기아나·누벨칼레도니·폴리네시아의 독립 지지자들을 초청했다.
언론인이자 활동가인 브누아 고댕은 [프랑스의 혁명적 좌파 언론] 〈레볼뤼시옹 페르마낭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독립에 반대하는 정당들은 모두 2022년 프랑스 대선 때 에마뉘엘 마크롱을 재선시키자고 호소했어요. ‘충성파’와 프랑스 국가는 밀접하게 공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누벨칼레도니에서 프랑스의 지배력을 되도록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번 유권자 확대 조처는 이를 위한 결정적 단계입니다. 이는 카낙인[토착 원주민]들과 독립 운동가들이 투쟁으로 얻어낸 핵심 성과를 공격하는 처사입니다.
“카낙인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카낙인들은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의 부름에 매번 응했습니다. 독립 투표를 해야 할 때 카낙인들은 투표소로 몰려갔어요. 다른 선택이 없자 카낙인들은 거리로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무시당했고 그래서 폭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누벨칼레도니는 니켈 매장량이 풍부해 전 세계 니켈 생산량의 6퍼센트를 차지한다. 니켈은 전기차 배터리 생산과 제철의 필수 원료로, 17일 금요일 [세계 최대 비철금속 거래 시장인] 런던 비철 금속 거래소에서는 니켈 선물 시장 가격이 7퍼센트 가까이 올랐다.
프랑스 제국주의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과 피지 사이에 위치한 누벨칼레도니를 어느 때보다 중시한다. 태평양이 서방과 중국의 동맹자들이 대결하는 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영국과 군사 동맹 오커스로 엮여 있는 호주는 지난해 프랑스와 보조를 맞춰 식민 지배 종식을 촉구하는 여러 유엔 결의안에 기권 투표했다.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은 프랑스와 그 동맹자들에 맞선 누벨칼레도니 항쟁을 지지해야 한다.
억압과 저항의 역사
누벨칼레도니는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1만 700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1853년에 누벨칼레도니를 병합한 프랑스 제국주의는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하는 동시에 프랑스인 정착자들을 보내 토착 원주민 카낙인들의 땅을 빼앗는 방식으로 그곳을 지배했다.
1960년대 말에는 카낙인들이 직면한 인종차별과 빈곤에 항의해 대규모 청년 운동이 분출했다.
프랑스 국가는 프랑스인들과 유럽인들을 누벨칼레도니에 대거 이주시키는 것으로 대응했다.
1972년 당시 프랑스 총리 피에르 메스메르가 회람시킨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누벨칼레도니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력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은 (세계대전을 제외하면) 토착 원주민의 민족주의적 요구뿐이다. 프랑스 시민의 대규모 이주는 인구 비중을 유지·개선함으로써 그런 위협을 피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1988년 프랑스 대선을 이틀 앞두고 카낙인 무장 세력이 누벨칼레도니의 한 지역인 루아요테제도에 속한 오베아시(市)의 중무장한 경찰서를 장악했다.
이들은 프랑스 경찰관 네 명을 살해하고 27명을 포로로 잡았다.
독립 투사들은 유엔 감독 하에서 제대로 된 독립 주민투표를 시행할 것을 요구했다.
카낙 민족주의 운동 지도자 장마리 티바우는 그들의 행동은 경악스럽지만 근본적 책임은 프랑스 제국주의에 있다고 밝혔다. “우리 나라를 훔쳐간 순간부터 프랑스는 자신의 악행을 규탄하는 모든 사람을 제거하려 해 왔다. 식민 지배가 시작됐을 때부터 줄곧 그래 왔다.”
투사들은 포로를 일부 석방했지만, 프랑스 국가는 증오로 가득한 언사를 더 강화했다.
당시 프랑스 해외영토부 장관 베르나르 퐁은 카낙인 게릴라 지도자 알폰소 디아누를 “리비아에서 훈련받은 광신도”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사실 디아누는 피지에 있는 로마 가톨릭 수도원에서 훈련을 받았다.
대선 결선투표를 앞둔 5월 5일 프랑스군은 포로가 억류돼 있던 오베아의 동굴을 공격해 카낙인 19명을 살해했다.
당시 프랑수아 미테랑 사회당 정부는 이 학살을 통해 ‘강경’하게 비쳐서 파시스트 지지자들의 표를 얻으려 했다. 그 학살에 관여한 프랑스군 지휘자의 한 명인 필리프 르고쥬는 미테랑이 중재자를 통해 평화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방안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고 시인했다.
당시 한 카낙 민족주의자는 이렇게 밀했다. “프랑스 지도자들은 암살자처럼 굴었다. 저들을 살인죄로 고발한다. 학살은 피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저들은 카낙인들의 피로 르펜의 친구들의 표를 사는 편을 선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