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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이스라엘의 교전과 캠프 데이비드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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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7일 가자지구 라파흐 검문소 인근에서 이집트군과 이스라엘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져 이집트 병사 1명이 사망했다.
이번 교전은 최근 이스라엘이 라파흐 검문소를 장악해 1978~1979년 평화협정(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어긴 상황에서 벌어졌다.
1978~1979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오늘날에도 미국의 중동 전략의 핵심에 속한다.
1950~1960년대 중동·북아프리카에서는 식민지 해방 혁명들 속에서 등장한 아랍 국가들이 동맹을 형성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를 깨뜨리기 위한 전략을 수립했는데, 이집트가 “중립”을 표방하도록 만들고 제국주의와 이스라엘에 도전하는 국가들을 고립시키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 전략에 따라 중동의 정치 지형이 크게 바뀐 계기가 바로 1978~1979년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가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체결한 일이었다.
이 협정으로 이집트는 미국의 하위 파트너가 됐고, 미국은 뒤이어 사우디아라비아, 레바논, 예멘 등 다른 중동 국가들을 길들일 수 있었다. 또한 이란과 시리아처럼 미국이 주도하는 “신 중동 질서”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국가들은 고립됐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의 대가로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서 적게 잡아도 연간 수억 달러어치의 교류가 이뤄졌다.
이스라엘 관광객들이 나일강에서 유람선 관광을 즐기고 이집트 호화 리조트에서 여가를 즐길 수 있게 됐다. 이집트 경제 자유 구역에 이스라엘 기업들이 진출해 미국 시장을 겨냥한 이집트 면화 수출에 투자했다.
또한 이집트는 확고한 친미 국가가 된 대가로 미국의 군사적 원조를 이스라엘 다음으로 많이 받는 국가가 됐다.
그러나 협정의 혜택은 이스라엘이 훨씬 더 컸다. 1978년 이전까지 이스라엘은 GDP 대비 23퍼센트를 군비 지출에 써야 했다. 이집트와의 협정 이후 그 비중은 9퍼센트로 떨어졌다.
이밖에도 더 많은 커다란 변화들이 있었다.
적수 하나가 사라진 이스라엘은 군사력을 팔레스타인인들과 레바논, 시리아를 향해 집중할 수 있게 됐다.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처음 서명될 때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1차 침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 협정에 따라 이집트에 시나이 반도 반환을 마무리하던 1982년에 전보다 더 파괴적으로 레바논 2차 침공을 벌였다.
또한 이집트가 미국에 협조하면서 수에즈 운하를 포함한 홍해 등에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점령에 필요한 핵심 보급로들의 안보가 보장됐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오랫동안 미국 제국주의자들의 ‘신의 한 수’로 여겨졌다.
그래서 이집트의 한 혁명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집트군을 ‘캠프 데이비드 군대’라고 부른다. 굴욕적인 군대라는 뜻이다.”
오늘날 이집트의 엘시시 정부는 이스라엘과의 협력을 깨뜨릴 생각이 없다. 그러기는커녕 가자지구 봉쇄에 협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이집트 정부는 갈수록 커지는 자국 내 불만에 직면해 있다. 이스라엘이 라파흐 점령으로 협정을 일방적으로 어기고 이집트 병사까지 살해하면서 그런 불만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인종 학살에 동조하는 자국 정부에 맞선 이집트 대중의 불만이 폭발하는 것이야말로 바이든과 네타냐후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