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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 〈조선인 여공의 노래〉:
우리가 알아야 할 조선인 이주 여성 노동자의 삶과 투쟁

85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영화 〈조선인 여공의 노래〉(이원식 감독, 2024)는 작은 예술관에서 드물게 상영된다. 그러니 지금 보기 힘들다면 OTT나 VOD 서비스가 될 때 봐도 좋을 것이다.

원작은 같은 제목의 일본어 책(1982)이다. 《어느 여공의 노래》로 국내에도 출간됐다. 하지만 일본과 한국 모두에서 절판된 상태다. 공공도서관의 디지털 자료실에 가야 읽을 수 있다.

〈조선인 여공의 노래〉, 이원식 감독, 2024

1970년대 여러 해에 걸쳐 저자 김찬정은 1910년대와 1920년대 오사카 방적 공장에서 일했던 한인 여성들을 찾아 일본 각지를 돌아다녔다. 어렵사리 찾은 그들이 이미 고인이 돼 있을 때마다 뒤늦은 자신을 탓했다.

이런 헌신 덕분에 우리가 다시 그들을 기억할 수 있게 됐다.

영화 〈조선인 여공의 노래〉는 지금은 다 사라진 방적 공장과 기숙사 터에서 당시 모습을 그려서 보여 주고, 삶과 투쟁의 사연을 재연해 준다. 일본 치안 당국의 낡은 문서철 말고는 이제 다 사라져 버린 파업의 기억까지 꺼내 보인다.

99세, 98세가 된 “조선인 여공”도 인터뷰한다. 이들은 책이 다루는 시기보다 늦은 1930년대 중반~1940년대 초반에 방적 여공이었다. 1920년대 여공들의 증언은 〈귀향〉(2016)의 강하나 배우를 비롯해 재일교포 4세들이 재연한다.

책과 영화의 배경인 1910년대와 1920년대의 오사카는 “동양의 맨체스터”라 불릴 만큼 방적 산업의 메카였다.

1914~1918년 제1차세계대전 기간 일본은 사상 최대 호황을 누렸고 아시아 제일 공업국이 됐다.

1916년 오사카에는 3000명 이상의 여공이 있는 방적 공장이 10곳이 넘었다. 1919년 방적 산업 생산액은 1914년의 2배가 넘었다.

자본가들은 일본 농어촌과 산간에서 여성들을 데려오고 서로 여공들을 빼 가느라 눈이 벌게졌다. 결국 식민지 조선으로 눈을 돌렸다.

이주

마침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강탈했다. 경작지를 뺏기고 빈곤에 허덕이던 조선 농민들은 해외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916~1921년 사이 오사카에는 조선인 여성이 100배 가까이 폭증했다.

집을 구하기 어려운 조선인들은 폐공장과 전염병 격리 병원에 거주했다. 공장 기숙사도 불결하긴 마찬가지였다. 재일 조선인 여공의 수는 1930년 1만여 명이 됐다.

방적 공장의 일본인·조선인 여공은 “돼지” “방적 돼지” “여공 돼지” “조선 돼지”라 불리며 멸시당했다.

공장들은 가축우리보다 못한 기숙사와, 비료로 쓰는 썩은 재료로 만든 돼지죽 비슷한 식사를 제공했다. 과로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여공들이 어쩌다 밖에서 식사하면 어찌나 정신없이 먹던지 ‘돼지’라고 놀림당한 것이다.

일본보다 앞서 영국과 미국도 그랬듯이 대규모 방적 공장은 당대 산업 자본주의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저임금 산업이었고 여성, 아동, 이주노동자가 많이 고용됐다. 조선인 여공들 역시 여성, 이주노동자였고 어린 10대가 많았다.

영화 속 당시 일본 공장의 상황은 영국과 미국 공장의 직전 상황과 판박이 같다.

농촌과 해외에서 빈곤 때문에 도시와 공장으로 떠밀려 온 절박한 처지, 아동 노동과 장시간 노동, 영양실조, 심각한 직업병, 회사 측의 폭행과 학대, 노동자들의 조기 사망까지.

방적 공장에서 일본인과 조선인 여공들은 과로와 굶주림, 각종 차별에 시달렸다 ⓒ출처 시네마달

정부와 자본가가 본국 노동자와 이주노동자를 분열시키기 위한 책략에 들인 특별히 정성스러운 노력까지 똑같았다.

조선인 이주노동자 차별에 기생하는 악독한 집단 “모집인”(브로커)과 “상애회”(폭력 조직)는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직면하는 위험과 비슷하다.

“100년 전 이야기지만, 지금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실제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아이들이 돈을 벌러 외국으로 나가는 현실도 분명 있고요.”(이원식 감독)

오사카에서 조선인 여공을 가장 많이 고용한 기업은 키시와다 방적이었다.

그래서 책과 영화 둘 다 키시와다 방적을 많이 다룬다.

1923년 불황과 1929년 세계 대공황이 오사카 방적 산업에도 해고와 임금 삭감을 불러왔다. 1930년 상황은 급격히 심각해졌다.

임금 삭감과 조업 단축으로 키시와다 방적 노동자들은 실질 임금이 최대 40퍼센트 줄었다.

1920년대에도 노동자들은 파업했고 종종 승리했다. 차별에 항의하거나 해고에 맞서 파업했다.

키시와다 방적은 일본인 여공과 조선인 여공을 분열시켜 서로의 파업 파괴자로 활용했다.

그러나 분열 책략이 늘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인 여공의 해고에 맞서 조선인 여공들이 파업을 벌인 적도 있다.

파업

1930년 1월에서 4월까지 네 차례 임금 삭감이 단행되자, 5월 5일 여공 100명이 파업했다.

그중 조선인 여공이 많았다. 일본인 지역노동조합, 조선인노동조합, 농민과 사회단체들이 연대했다.

영화는 파업 대오가 최대 500명까지 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전체 키시와다 방적 노동자들은 6000여 명이었다.

오사카 전역에서 해고, 실업, 폐업이 급증하던 때다. 회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파업은 고립되는 듯했다.

그러자 지역 지도부는 오히려 소수의 공장 타격 투쟁을 거듭 시도했다.

회사와 상애회, 경찰은 파업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경찰은 지역의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폭행, 체포했다. 여공들까지 고문할 만큼 강경 탄압했다. 지도부를 전원 체포했다.

친일 깡패 조직 상애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농성장을 침탈했다.

여공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돌을 던지며 여러 날을 격렬히 저항했다. 전에는 그토록 두려워했던 상애회 깡패들과 밤새도록 싸웠다. 여공들은 경찰 부대와도 충돌했다.

패배하더라도 굴복하지 않겠다는 심정이었다. 결국 파업은 패배했지만 41일 만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길고 격렬한 싸움이었다.

농성을 풀던 “그날, 조선의 딸들은 선명한 빨간색의 댕기를 매고 있었다. 그녀들은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고 승자처럼 당당했다고 한다.”

책에는 최후까지 파업 농성장을 지켰던 조선인 여공들이 모두 해고됐고 고향에 갈 여비를 받아 쫓겨났다는 사실이 나온다.

그러나 딱 2년 뒤인 1932년 5월 5일 자 〈조선일보〉에는 오사카 세계 노동절 시위에 3만여 명이 모였고, 조선인 노동자 수천 명이 참가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 실린 사진 속에는 한복을 입고 행진하는 조선인 여공 수백 명이 보인다. 그들은 꺾이지 않고 다시 일어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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