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은 2024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다.
양반 종려(박정민 분)와 노비 천영(강동원 분)이 전란 속에서 각각 왕의 최측근 무관과 의병이 되어 대립하는 이야기다.
정여립의 난(1589년)부터 시작해 임진년(1592년)에 시작된 전쟁이 끝나고 난 직후까지 전(戰), 쟁(爭), 반(反), 란(亂)에 이르는 네 장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대담한 구성만큼 완성도가 높진 않다.
그럼에도 전쟁을 탈정치화하지 않는 장점이 있다. 이 영화는 계급적 갈등을 다루고 권력자에 대한 의심을 유지한다.
흔히 영화는 영화가 그려 낸 시대보다 영화가 제작된 시대를 반영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서도 과거와 현재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특히 차승원 배우가 연기한 선조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이 하이라이트다.
과장이거나 우화적인 장면도 있지만, 선조가 빗속에 야반도주를 하고 임진강을 건너자마자 배와 나루를 전부 끊고 주변 인가를 파괴하라 명령하는 것은 《선조실록》을 고증 수준으로 재연한 장면과 대사다. 백성들은 물론이고 신하들도 미처 강을 건너지 못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분노한 평양 백성들이 중전 일행을 몽둥이로 공격했다. 그들은 참수돼 머리가 높이 매달렸다. 다음날 선조는 평양을 빠져나왔다.
영화 내내 왕은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 모두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린다. “다스리는 자들의 고달픈 숙명”이라고도 말한다.
“궁을 태우고 왕에게 돌팔매질하는 것들이 그게 백성이냐? 그게 사람의 새끼야?” 반란에 대한 왕의 깊은 적의는 외적에 대한 적의보다 커 보이기까지 하다.
“어찌하여 순신은 죽었고 자령은 살아 있느냐?” 실제로 선조는 이순신을 고문했고 의병장 김덕령은 고문당하다 옥사했다. 선조는 그들을 정적처럼 여겼다.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선조의 장면들에서 이승만을 떠올릴 만하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시작되자 이승만 역시 서울을 떠났고, 아무 경고 없이 한강 다리를 폭파해 사람들을 죽게 했다.
같은 날 이승만은 국무회의를 열어 긴급명령 제1호를 발표했다. ‘의심스러운’ 민간인에 대한 단속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영화 속 선조가 “항왜”(항복한 일본군)를 민란 “토벌”에 투입하는 것도 이승만과 미국이 “토벌”이라 부른 민간인 학살과 닮았다.
미국과 이승만은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 군경, 우익 폭력배를 동원해 제주와 여수, 순천 등에서 수만 명을 도륙하게 했다.
영화에서 묘사한 전쟁 이후 “백성들이 시체를 뜯어 먹고 사는 형편” 역시 실록의 표현 그대로다.
1945년 해방 후에도 다수는 빈곤했지만 일제에 부역했던 지배층은 호의호식했다.
이승만은 조봉암 등 정적은 제거했지만 일제에 이어 미군정에 협력하는 자본가와 정치인은 보호했다.
윤석열은 이런 “도살자”를 “아버지”로 모시는 뉴라이트들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다.
정치적인 사람들이 영화 속 선조를 보며 윤석열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고위층의 위선이 판치고 정의가 결여된 시대에는 이런 액션영화라 해도 부당함과 모욕감을 참고 지내야 하는 보통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얻을 수 있다.
이럴 때 정치적 문제를 제기하면 지나치게 엄격할 수 있겠지만, 〈군도〉나 〈킹덤〉처럼 〈전,란〉도 민중을 저항의 능동적 주역보다 불안한 군중에 가깝게 그린다.
하지만 많고 많은 사람들의 아래로부터의 투쟁만이 세상을 공정하고 평등하게 뒤바꿀 비결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영화 〈전,란〉은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