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가 예술성으로 돋보이는 호러 영화는 아니다. 더 암시적이고 더 지적인 호러 영화들이 존재한다.
“호러 장르는 주로 죽음이 주는 두려움과 죽음이 찾아오는 다양한 방식과 불시에 찾아오는 속성 등에 관심이 많다.” ― 《호러 영화 : 매혹과 저항의 역사》
따라서 ‘완전히 죽지 않은 자’가 불안을 일으킨다. ‘죽음/최후’라는 공식에 대항하는 이 존재들은 비신체적이거나(악귀, 정령 등) 신체적인 형태로만(좀비) 살아있다.
현재의 호러 장르 팬들 다수는 〈파묘〉보다 은밀하고 암시적인 스타일을 선호하는 것 같다.
하지만 〈파묘〉가 “정치적”이라고 평가 절하될 이유는 없다.
호러 장르의 효시가 된 작품들이 오히려 더 정치적이고 역사적이었다.
뱀파이어 장르의 효시가 된 브람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1897)도 역사적이고 정치적이었다.
빅토리아 시대 말기를 휘감은 시대적 공포와 편견이 주된 소재였고 편협하기 짝이 없던 당대의 성도덕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봉건제적 낡은 유럽과 새로운 부르주아 질서 사이의 긴장감이 소설의 근간을 이뤘다.
좀비 장르의 효시가 된 조지 A. 로메로의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도 역사적이고 정치적이었다.
반란의 해 1968년의 10월에 나온 이 흑백 영화는 저항적이진 않아도 전복적이었다. 흑인 리더를 주인공으로 한 최초의 공포물이었다.
좀비 떼를 물리치고 혼자 생존한 흑인 주인공은 그러나 영화가 끝나기 1분 전에 백인 민병대에게 사살된다. 마치 미국 남부의 흑인 살해 장면과 같다.
일본 귀신이 영화적으로 진부한 소재이긴 하다. 그러나 아직 해결되지 않은 현실이 더 진력난다.
일제의 음양사가 부리는 정령 주술도 현실과 동떨어져 터무니없이 비약시킨 발상은 아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 청사(광화문), 조선신궁(남산), 신사들(전국 각지 1000여 곳)의 존재와 위치는 당시 조선인의 상식에 비추어 심리적으로 심한 위압과 모욕을 느낄 만했다.
일제 강점기 내내 조선 민중은 남산의 휘황한 신궁을 향해 멈춰 서서 묵념하거나 직접 참배를 가야 했다.
우파가 찬양하는 이승만은 나중에 그 위치의 상징성을 활용해 자신의 독재를 미화했다. 1956년 광복절을 기념해 조선신궁 자리에 높이 24미터인 자신의 동상을 세웠다(4·19 혁명기에 시위대가 끌어내 박살냈다).
동서고금의 권력자와 지배계급이 주술과 주술사를 곁에 두는 일은 흔했다. 그들이 순진한 탓에 그 힘을 전적으로 믿어서 그런 건 아니다.
21세기 일본 최고 권력자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조공하고 참배하는 게 영령에 대한 신실한 믿음 탓일까? 아니면 일본 우익의 정치적 행위로서 갖는 중요성 때문일까.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가수 밥 딜런의 노래처럼 “우리는 정치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 (귀)신이 있다면 그(녀)도 정치적일 것이다.
김은희 작가의 드라마 〈악귀〉(2023)에서는 자본가가 성공을 위해서 스스로 악귀에 씌인 것으로 나온다.
실제로도 자본가들은 영혼을 팔아야 할 것이다. 이 야만적인 자본주의 체제는 타락할 대로 타락한 자들이 커다란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