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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이 드러낸 우파의 도서 퇴출 운동의 한심함

노벨문학상 작가의 작품을 읽지 말라고? 보수 단체들이 퇴출시키려는 《채식주의자》는 한강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다

경기도의 일선 학교 도서관에서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유해도서’로 분류돼 폐기·열람 제한된 일이 지난달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경기도교육청 국정감사 이후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올해 초 경기지역 초·중·고등학교에서 도서 2500여 권이 폐기되고, 3300여 권이 열람 제한됐다. 여기에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최진영 작가의 《구의 증명》, 사라마구 작가의 《눈먼자들의 도시》 등 유명 문학 작품도 포함됐다.

지난해부터 보수 단체들은 학교와 공공 도서관에 성교육·페미니즘 도서를 “유해”하다며 폐기하라는 민원을 집요하게 넣었다. 심지어 이들은 해당 도서를 구입한 자료선정위원회 등을 징계하라고까지 요구했다.

이는 심각한 표현의 자유 훼손이다.

그런데 국민의힘 소속의 일부 지자체장과 보수 교육감은 이런 얼토당토않은 민원을 수용했다.

경기도교육청(교육감 임태희)은 지난해 각 학교에 “부적절한 논란 내용이 포함된 도서에 대해 협의해 조치하라”는 공문을 2차례 발송하고, 올해 2월엔 ‘[폐기] 처리된 도서 집계 목록’을 보고하도록 했다.

이런 검열 압박 속에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포함한 수백 권의 도서가 학교에서 폐기되거나 열람 제한됐다. 경기도교육청이 ‘폐기를 지시한 적 없다며 각 학교의 자율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변명한 것이 군색한 이유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은 작품이 학교 도서관에서 퇴출당한 것만 보더라도, 이들의 도서 검열이 얼마나 편협하고 문제가 많은지 알 수 있다.

성남의 한 고등학교는 《채식주의자》를 폐기한 이유로 “음란한 자태를 지나치게 묘사한 것, 성행위 성관계를 조장하는 것” 등을 꼽았다(〈한겨레〉 10월 22일 자).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다시 논란이 일자 보수 학부모 단체는 한술 더 떠서 《채식주의자》의 학교 도서관 비치 반대 서명을 벌이며 이 책의 “폭력적 내용”도 문제 삼았다.

하지만 소설은 현실의 일부를 묘사했을 뿐이다. (하루 치 매스미디어만 봐도 자해, 자살, 강간 사건은 쏟아진다.) 진정한 폭력은 실제 세계에 있다. 가자지구에서는 광란의 인종청소가 서방 지도자들과 정치인들, 매스미디어의 (노골적, 측면적) 지지 속에서 일 년 넘게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인간의 성은 어떤가? 광고부터 TV 프로그램, 게임, 포르노까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성적 대상으로 여겨지고, 인간의 몸과 성행위는 인격과 분리돼 손쉽게 사고 팔린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진정한 폭력과 성의 왜곡·억압을 낳는 체제는 옹호하면서, 그저 도덕주의적으로 성과 폭력 문제를 다룬다. 이는 위선적일 뿐 아니라, 솔직한 토론을 방해해 오늘날 청소년들이 겪는 성과 폭력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청소년들에게는, 솔직하게 공감할 수 있으면서도 도덕주의적이지 않고 왜곡되지 않은 방식으로 성을 배울 기회가 오히려 더 크게 늘어야 한다. 그러려면 검열 없이 성교육 도서와 다양한 소설을 읽을 수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청소년의 성교육(과 관련 도서)은 서구에서도 오랫동안 진보와 보수의 이데올로기 전쟁터였다. 보수주의자들은 ‘청소년 안전’을 내세워 학교에서 다양하고 포괄적인 성과 성애를 가르치는 것을 반대하고, 이를 통해 사회를 더 오른쪽으로 이끌려 한다.

보수 단체가 《채식주의자》를 타깃으로 삼은 것은 한강 작가가 광주 항쟁, 제주 4.3항쟁을 소설의 주제로 삼는 등 진보적 면모를 보여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강 작가는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분류됐었고, 2014년 문체부의 세종도서 지원사업에서 《소년이 온다》는 ‘사상적 편향성’을 지적받고 최종 탈락했다.

최근 노벨상 수상 직후에도 한강 작가의 아버지 한승원 작가는 한강 작가가 ‘러시아,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에서 날마다 주검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겠냐’ 하는 취지로 기자회견을 거절했다고 말했다.

부커 인터내셔널상 선정위원회는 《채식주의자》에 대해 “수치와 욕망,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갇힌 한 육체가 다른 갇힌 육체를 이해하려는 우리 모두의 불안정한 시도들에 관한 소설”이라고 수상 사유를 밝혔다.

이런 책들이 더 많이 읽히고 토론돼 인간과 인간관계에 대해 사람들이 더 깊은 통찰을 얻기를 바란다. 지면을 빌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

보수 단체들의 학교와 공공 도서관의 도서 퇴출 운동은 중단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