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학교에서 이집트인 난민에게 이집트 혁명사와 난민의 삶을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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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과 이주민들의 이런 교류가 더 늘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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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8일,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운영하는 동아리 ‘난민과 함께 손잡고’ 주최로 이집트인 난민을 초대해 ‘난민과의 대화’ 간담회를 진행했다.
난민 인정자 마준 씨와 난민 청소년 호세이파 씨가 한국에 오기까지 이집트에서 겪은 혁명 이야기, 한국에서 난민으로 겪은 어려움, 그리고 다른 난민 신청자들이 겪는 제도적 차별 등에 대해 생생하게 들려줬다.
마준 씨는 2011년 이집트인들이 무바라크의 24년 독재와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권력 세습 시도에 항의하고 ‘빵, 자유, 사회 정의’를 요구하며 거리에 나섰다고 말했다.
이 저항은 2008년 마할라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작됐다. 경찰 폭력과 대규모 체포로 진압됐지만, 2011년 1만 5000명이 타흐리르 광장을 점거하며 혁명의 불꽃이 되살아났다.
무바라크 사퇴 이후 군부의 통제에도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계속했으며, 2012년 최초의 민주적 선거를 통해 선출된 무르시 대통령이 2013년 군사 쿠데타로 축출됐다. 마준 씨는 당시 이집트에서 완전한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면 단호하고 결연한 투쟁이 필요했다고 돌아봤다.
그러나 군부는 라바아 광장 대학살로 저항을 짓밟았고, 군부 독재자 엘시시는 2014년 선거 조작으로 당선됐다.
마준 씨는 2017년 군부 독재의 엄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군부 독재 반대 운동을 조직하기 위해 알 자라비 연합을 결성하고 거리에서 선전물을 배포했지만,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수감됐다. 그는 반정부 조직 결성 혐의로 징역 17년 형, 반정부 선전 유인물 배포 혐의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간담회에 참가한 학생들은 마준 씨에게 형을 다 살면 석방될 수 있는지 물었다. 마준 씨는 군부 정권이 새로운 혐의를 추가해 형을 늘려 가며 정치범들을 무기한으로 수감한다고 답했다. 이 모든 과정이 국가보안법, 긴급체포, 군사재판 등 불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했다. 마준 씨는 경찰의 폭행과 고문으로 이마에 패인 상처를 보여 주기도 했다.
이집트에서 수감 중 잠시 석방된 마준 씨는 급히 케냐로 떠났고,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고 난민협약 가입국인 한국행을 선택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NGO 단체의 도움을 받으려 했으나 거주할 곳이 없어 지인의 집에 얹혀살았다. 한국어를 전혀 못 하는 상태에서 하루에 17시간씩 공장이나 택배 일을 하며 지냈고, 건강이 안 좋아진 지금은 다른 일을 구하기 어렵다는 고충을 토로했다.
마준 씨는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한 난민 신청자들이 한국에 거주하는 동안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해 병원에 가기 어렵다는 점도 이야기했다. 한 난민은 건강보험이 없어 출산 과정에서 병원비로 1천만 원 가까이 지불해야 했다.
또, 한국 정부의 난민 인정률이 매우 낮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난민 인정을 받기까지 3년이 걸렸고, 다른 난민들은 7~8년을 거주했음에도 여전히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호세이파 씨는 나에게 이집트인 친구가 한국에서는 난민 인정을 거부당했지만 네덜란드에서는 3개월 만에 난민 인정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이는 한국 정부가 난민 인정에 얼마나 인색한지 보여 주는 사례다.
심지어 한국 정부는 한 난민 신청자의 어머니가 한국으로 관광 왔을 때 모자가 상봉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의 어머니도 난민 신청을 할까 봐 사전에 막고자 한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간담회에 참가한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탄식이 흘렀고, 한국 정부가 난민들이 가족도 만나지 못하게 하는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학생들은 호세이파 씨가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에 놀라워했다. 호세이파 씨는 아랍인들이 자신의 이름과 조상들의 이름을 붙여 이름을 짓는 방식에 대해 설명하며, 자신의 아버지도 이집트 혁명에 참여하고 군부 독재로부터 탄압받았다고 밝혔다. 학생들은 호세이파 씨와의 대화에서 공감대를 찾으며, 그의 한국어 실력에 감탄하고 그의 취미나 관심사에 대해서도 질문했다.
학생들은 이집트를 떠올릴 때 축구 선수 살라 정도밖에 몰랐었는데, 이날 간담회에서 이집트인들이 한국의 군부 독재와 유사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돼 충격받았다고 했다. 또 이집트인들이 하루빨리 민주주의를 찾기를 바란다고 소감을 남겼다.
또한, 자국에서 불의에 맞서 저항하던 난민들이 난민협약 가입국인 한국에서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하고 복지를 누리지 못하는 점이 안타깝다고 생각하며, 한국 정부가 난민들을 차별하지 않고 따뜻하게 포용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호세이파 씨가 학교에서 한국 학생들로부터 차별을 겪지 않은 점이 다행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또 한 학생은 마준 씨에게 이집트로 돌아갈 여건이 된다면 무엇을 가장 하고 싶냐고 질문했다. 마준 씨는 그때까지도 이집트가 민주적인 국가가 되지 않았다면, 다시 타흐리르 광장에 서고 싶다고 답했다. 마준은 이집트에 약혼녀를 남겨 두고 7년간 헤어져 있는 상태이며, 경제적 상황이 안정되지 않아 그녀를 데려오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학생은 이집트 군부가 인권을 유린하고 대학살을 저질렀는데도 유엔이 이를 방관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며, 긴급체포법을 통해 20년에 가까운 형을 선고한 뒤 형을 늘려 평생 감옥에서 살게 하는 것은 인권을 무시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난민으로 한국에 어렵게 왔는데, 이들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아 힘든 삶을 살게 하는 한국 정부도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사인 나는 학생들이 이집트인 난민들과 직접 대화하며 이집트 혁명사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난민들의 어려움에 공감하며 이집트와 한국 정부의 불의에 분노하는 모습에 놀라웠다.
학생들은 처음 난민을 떠올릴 때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가졌지만, 마준 씨와 호세이파 씨의 아버지와 같은 난민들은 이집트에서 잘 살았던 사람들이며 사회를 바꾸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집트에서도, 한국에서도 당당하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간담회 이후 학생들은 이들이 정의를 위해 싸우다가 한국에 온 사람들이고, 한국 정부가 이들을 제도적으로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연대감을 느끼게 됐다.
학생들은 마준 씨와 호세이파 씨가 한국에 와서 신기했던 점은 무엇인지 물어보기도 했다. 마준 씨는 이집트에는 눈이 안 오는데, 한국에 와서 눈을 처음 보고 신기했다고 말했다. 마준 씨와 같은 난민들에게 앞으로의 한국 생활이 낯설고 차갑게 느껴지기보다는, 어린아이가 눈을 처음 볼 때의 즐거움처럼 긍정적인 경험이 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서 앞으로 한국인과 난민들의 교류와 연대가 더욱 늘어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