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익히는 마르크스주의 2:
자본주의와 이데올로기 ─ 사람들의 관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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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팀 주]
아래 글에서 다루는 이데올로기 문제는 최근 한국 사회에서 극우로 이끌리는 평범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윤석열 탄핵 반대 집회 참가자 중 많은 사람들은 불평등한 현실의 피해자이다. 서부지법 폭동으로 구속된 상당수는 실업자들과 소상공인들이었다.
그들은 ‘현실의 많은 문제가 민주당, 민주노총, 좌파와 그 배후에 있는 중국, 북한 탓’이라는 음모론을 받아들인다.

물론 그 이유는 주로 윤석열과 우익 정치인, 우익 언론, 우익 학자 등이 그런 견해를 퍼뜨리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의 대변자들인 그들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를 표현하는 것이다.
주류 언론은 ‘중립성’과 ‘공정성’을 이유로, 윤석열과 국힘이 내놓는 궤변을 꼬박꼬박 주요 뉴스거리로 소개시켜 준다.
그러나 극우적 주장은 또한 불평등한 현실을 (극우 나름으로) 설명해 주기 때문에 일부 서민들에게 수용되는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우파 정부와 기업인들은 경제가 어렵고 물가가 높은 것이 노동자들의 “고임금” 때문이라고 설명해 왔다.
물론 치우치고 반쪽의 진실일 뿐이지만, 본질적으로 이는 인건비가 부담스러운 소상공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부 실업자와 일부 저임금 노동자, 일부 무직 청년들로 하여금 처지가 비교적 나은 조직 노동자들을 원망하도록 만들려는 거짓말이다.
첨예해지는 미중 갈등 속에서 반중·친미주의가 조장되고, 개혁 염원을 배신했던 민주당 정부들에 대한 환멸이 윤석열 같은 극우 정치인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토양이 된다.
투쟁과 연대
이런 극우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집단적 투쟁 속에서 연대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이 글은 강조한다.
착취와 차별에 맞서려면 투쟁과 연대를 빌드업 해야 한다.
투쟁에 참가하는 노동자들은 기업이 ‘한 가족’, 정부가 ‘중립적’이라는 말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기존의 세계관에 균열이 생기면서 이들은 새로운 사상에 좀 더 열린 태도를 보인다.
이전까지 성차별적인 의식을 가졌던 남성 노동자가 파업 과정에서 동료 여성 노동자와 힘을 합쳐 싸우면서 태도가 바뀌는 경우가 흔한 사례다.
마트 노동자, 택배 노동자 등이 파업을 벌여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을 때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 노동자들의 낮은 임금과 고된 노동, 열악한 근무 환경에 대해 알게 되고 그 투쟁에 지지를 나타냈다.
대중은 투쟁의 연대와 빌드업 속에서 고통의 뿌리인 자본주의와 각종 구조적·제도적 차별이 얽혀 있음도 깨달을 수 있다.
왜 불평등과 불안정한 삶에 분노하는 사람들의 일부는 사회주의 조직이 아니라 도널드 트럼프나 나이절 퍼라지 같은 인종차별주의 선동가들에게 기대를 걸까?
이 사회에서 살다 보면 거짓 해결책과, 사회에 대한 그릇된 설명에 취약해지기 십상이다. 이 사회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는 체제가 약속했던 것과 우리가 실제로 누리고 있는 것 사이의 커다란 모순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이 모순을 설명해 줄 무언가를 찾으려 애쓴다.
많은 경우, 가장 손쉬운 설명 방식은 기존의 편견들에 기대는 것이다.
이런 관념은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시대에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다. 사회에서 지배적인 물질적 세력인 계급이 동시에 지배적인 지적 세력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 개념을 이용해, 사회 불평등 변호론들의 이면에 있는 진실들을 들춰냈다. 불평등을 당연시하는 그런 “상식”은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그들의 권력을 강화한다.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 질서 내에서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는 점을 이해했다. 더 근본적으로, 체제 내에서 자신이 처한 처지 때문에 노동자들은 반동적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 노동자들은 필요한 것을 놓고 다른 사람들과 번번이 경쟁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그러한 경쟁 때문에 편견, 의심, 적개심이 마음속에 자리 잡을 수 있다.

계급으로 나뉜 사회는 모두 소수 집단이 지배한다. 부자들은 빈자들이 더 잘 복종하게 만들려고 우리를 억압하고 늘 강제력을 동원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지배가 우리에게 최선이라고 믿게 만들려 한다.
19세기 동안 신흥 자본가 계급은 저항에 두려움을 느끼고 동의를 만들어 내는 데로 눈길을 돌렸다. 그들은 노동계급 사람들이 같은 계급의 사람들이 아니라 지배자들과 일체감을 갖도록 설득하기 위해 의회와 교회 설교, 언론에 기대어 애국심과 인종차별, 식민주의, 보수적 성 관념 등을 조장했다.
자본가 계급은 이데올로기, 즉 세계를 보는 관념과 신념 체계를 강력하게 발전시켰다.
그들의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개인이며, 시장을 통해 이익을 추구할 자유가 있고, 성공도 실패도 그 자유에 따른다는 것이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사회를 움직이는 진정한 힘들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이 일반적 틀 안에서 치열한 이데올로기적·정치적 논쟁이 벌어진다. 일부 모순들은 자본가 계급 내 상이한 집단들 간의 긴장을 반영한다. 예컨대, 지배계급의 일부는 더 강한 국경 통제를 요구하는 반면 일부는 이주민 유입을 원한다. 또한 라이프스타일을 놓고 오랫동안 가졌던 관념과 신념이 사회 변화로 흔들릴 때도 논쟁이 벌어진다.
지배계급 내부의 심각한 의견 대립은 종종 사회주의 사상이 청중을 얻을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매스 미디어는 좌파의 목소리를 체계적으로 배제하고, 체제 비판자들을 비방한다. 지배계급이 사람들의 사고 방식에 영향력을 미치려고 경제적·정치적 권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부유하면 언론에 막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억만장자 일론 머스크는 X(옛 트위터)를 인수해 반동 사상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GB뉴스[영국의 보수적 뉴스 및 시사 채널]의 공동 소유자인 폴 마샬 경은 헤지펀드 경영자이고 그의 개인 자산은 6억 3000만 파운드[약 1조 1000억 원]다.
또한 지배계급은 국가 관리자들의 관념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국가 기관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기성 질서를 정당화하고, 일체의 급진적 목소리를 묵살한다.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서로 다른 계급이 사회의 “헤게모니”를 놓고 경쟁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모든 계급은 다른 계급을 밀어내고 자신이 “문화적,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주도권을 행사하려고 다툰다는 것이다.
또한 그람시는 노동계급 사람들이 종종 모순된 의식을 갖는 이유를 설명했다. 사람들은 언론과 정치인들이 끊임없이 반복하는 편견들을 일부 받아들인다.
그러나 다양한 집단에 속해 보는 경험을 하고 일터에서의 노동자 연대를 경험하면 그런 편견은 도전받는다.
노동계급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처지에 있으므로 그들은 그 이데올로기를 꿰뚫어 보고, 힘을 합쳐 자신들의 기업주에게 도전할 잠재력이 있다.
그러한 저항으로 반동적 관념들을 무너뜨리고, 자본주의의 상식에 도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