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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가들을 위한 마르크스주의 입문 11: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하는가 II ─ 이데올로기의 구실

지난 번 칼럼에서 보았듯이, 지배계급의 지배는 근본적으로 강제력에 의존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가가 그 강제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지배가 순전히 강제력에만 의존한다면, 사회 성원의 대다수인 노동계급에 의한 [체제] 전복에 매우 취약할 것이다. 자본가 계급과 국가의 권력은 평상시에 그들에게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대다수 사람들한테서 그들의 지배에 대한 동의를 얻어낼 수 있다는 사실 덕분에 크게 강화된다.

이런 동의를 얻어내고 유지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의 구실이다. 모든 사회에는 지배 이데올로기, 즉 기존 사회 질서와 그 기구들을 설명하고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데 이바지하는 일련의 사상과 세계관이 있다.

상식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강점 가운데 하나는 대체로 그 이데올로기의 이름이 없거나 심지어 존재 자체도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지배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이니 모두 이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명하거나 역사적으로 분명히 입증된 일련의 ‘상식적’ 주장처럼 제시된다. 예컨대, “경영진과 노동자들은 노사 상생을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한다”,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 “당연히 기업은 이윤을 남겨야 한다”, “완전한 평등은 인간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등이 그렇다.

사실, 이런 주장은 각각 따로 떨어진 사상들이 아니라 체계적인 이데올로기의 일부로서 국가 기구와 마찬가지로 자본가 계급의 이익에 이바지한다. 그 기본 원리는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만고불변인 양 묘사하고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것을 모두 가망없고 비현실적이고 아주 사악한 짓인 양 묘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상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인 노동 대중이 흔히 그런 사상을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르크스는 이 물음에 분명하게 대답했다.

어떤 시대에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다. 즉, 사회의 물질적 힘을 지배하는 계급이 정신적 힘도 지배한다. 물질적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이 정신적 생산수단도 지배한다. 따라서 대체로 정신적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의 사상은 그것을 소유한 자들의 사상에 종속된다(《독일 이데올로기》).

마르크스 시대와 비교하면 오늘날 초중고등학교·대학교·출판사·언론사 등 정신적 생산수단은 엄청나게 성장했지만(대중교육·TV·라디오·영화 등), 여전히 거의 전적으로 자본가 계급과 그 국가의 수중에 있다. 이 때문에 대다수 사람들이 접하는 거의 모든 뉴스, 거의 모든 역사·경제·과학 지식, 대부분의 도덕·종교 관련 교육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오랜 전통이라는 장점과, 적어도 겉으로는 현실을 곧잘 반영하는 듯한 장점도 있다. 예컨대, 이윤을 남기지 못하는 기업들은 문을 닫아야 하고 그 기업의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국가를 정당화하듯이 국가의 물리적 강제력도 그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한다. 지난 번 칼럼에서 말했듯이, 강제력과 동의는 상호작용하고 서로를 강화한다.

이렇게 볼 때, 진정한 물음은 왜 그토록 많은 노동 대중이 부르주아 사상을 받아들이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그런 사상의 지배력을 깨뜨릴 수 있는가가 돼야 한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중대한 약점은 노동자들의 경험 ─ 착취·빈곤·실업·불의 등의 경험 ─ 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배 사상의 지배력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대다수 노동 대중은 그람시가 “모순적 의식”이라고 부른 것을 발전시킨다. 그들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일부는 거부하면서도 다른 부분은 계속 받아들인다. 예컨대, 작업장의 계급투쟁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노동자가 여성이나 이주노동자에 대해 반동적 태도를 취할 수도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전체를 떨쳐내고 일관된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 관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극소수일 것이다.

이 소수가 대단히 중요한 이유는 특정 상황에서 그들이 다수, 심지어 대다수 노동자들 ― 여전히 모순된 의식을 가진 ― 의 지도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특정 상황이란 어떤 상황인가? 첫째, 계급간 이해관계의 객관적 충돌이 파업, 특히 대중파업 같은 공공연한 투쟁으로 바뀔 때다. 둘째, 엄청난 불황이나 재앙적 전쟁 같은 심각한 경제·정치 위기 상황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아주 커져서 지배 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가 붕괴하기 시작할 때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두 상황이 맞물릴 때가 특히 그렇다. 그 때는 응집력 있는 소수가 대다수 노동자들의 투쟁을 ― 그들 의식의 진보적 측면을 바탕으로 해서 ― 지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의식을 전면적인 반체제 의식으로 바꿀 수도 있다.

동의

대중 투쟁이라는 요인이 결정적인 이유는 노동자들의 의식 수준이 분명히 그들의 자신감과 관계 있기 때문이다. 체제에 도전하고 체제를 변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약한 노동자들일수록 지배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그들의 분노와 원한을 엉뚱한 속죄양으로 돌리게 만드는 인종차별, 외국인 혐오, 여성차별, 동성애 혐오 등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들의 자신감이 강할수록 인식의 지평도 넓어지고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일 가능성도 커진다. 대중 투쟁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집단적 힘을 자각하고 실천을 통해 연대의 장점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응집력 있는 소수의 규모·영향력·조직과 그들이 대중의 분노와 염원에 분명한 정치적 초점을 제공할 수 있는가이다.

상황·사상·행동의 이런 결합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지배력과 자본주의 국가의 권력을 모두 분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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