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차별 개선 않고 ‘남성 차별’ 대책 주문한 이재명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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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남성의 고통을 ‘남성 차별’이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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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이 “남성 차별” 대책을 마련하라고 주문하면서, 성평등가족부(전 여성가족부)에 관련 전담 부서가 신설되고 성평등정책관실을 총괄하는 주무 부서 역할까지 맡게 됐다. 현재 성평등가족부는 ‘남성 차별’ 사례를 찾아내는 청년 토크 콘서트를 연속으로 열고 있다.
한편, 11월 15일에는 “역차별 부서[성형평성기획과를 가리킴] 폐지하라” 시위가 700명 규모로 보신각에서 열렸다(여성의당 주최). 대부분 2030 여성인 집회 참가자들은 “남초 눈치 살피느라 여성정책이 지워졌다”며 “응원봉으로 세운 정부가 여성들을 배반했다”며 이재명 정부를 정면 규탄했다.
이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재명 정부는 윤석열 정부가 퇴행시킨 성평등 정책을 바로잡을 책무와 기대를 안고 등장했다. 하지만 정부 출범 반년이 다 되도록 이렇다 할 진전은 없다. 페미니스트인 원민경 변호사를 성평등가족부 장관으로 임명하며 기대를 모으기도 했지만, 여성 차별 개선은 이재명 정부의 우선순위에 있지 않다.
국정 과제에 포함돼 기대를 모았던 임신중지 약물 도입은 정부의 허가만 있으면 당장 실현 가능한데도 감감무소식이다. 여성들이 높은 가격에 음성적으로 유통되는 약을 사용해야 하는 처지인데도(지난해 임신중지 의약품 불법판매로 적발된 것만 700건이 넘는다), 국정감사에 나온 정부 관계자들은 관련 질의에 “논의 중”이라며 회피로 일관했다.
최근 고용노동부에서 여성노동 정책을 책임지는 부서인 여성고용정책과는 아예 폐지됐다. 그 기능 일부를 성평등가족부로 이관했다지만 고용노동부와 달리 행정집행권이 없어서 여성노동 정책 추진력이 후퇴할 것이라는 합당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윤석열 정부하에서 폐지된 민간 고용평등상담실(직장 내 성희롱, 성차별 등에 관한 상담 기구)은 예산을 충분히 배정하지 않아서 “반토막 복구”에 머무르게 됐다. 여성 노동자가 다수인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에도 묵묵부답이다. 국방비 예산을 5조 478억 원이나 대폭 인상한 것과 대조적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대통령 자신이 “남성 차별” 대책을 거듭 주문하고 있으니, 여성들이 분통을 터트리는 것은 당연하다.
무엇보다 이재명 정부가 “남성 차별”을 의제화하는 것은 성차별적인 극우에게 기회주의적으로 타협하는 것이다.
극우는 최근 몇 년간 페미니즘 반대 목소리를 높여 왔다. 그들은 여성 차별의 현실을 부정하며 차별 개선 요구와 성평등 정책들 때문에 남성이 “역차별” 받는다고 호도한다. 윤석열이 “구조적 차별은 없다”고 선언하고 여성가족부 폐지와 무고죄 처벌 강화를 공약으로 내건 것이 대표적이다.
이런 주장은 문재인 정부의 개혁 배신에 실망하고 불만을 키운 청년 남성 일부를 견인하는 구실을 했다. 친민주당 인사들이 ‘이대남 보수화론’을 띄우며 문재인 정부 지지 하락의 책임을 청년 남성들의 낮은 인식 탓으로 돌린 것도 우파의 주장이 더 잘 먹히도록 도왔다.
그럼에도 이재명 정부는 문재인 정부의 개혁 배신을 진지하게 돌아보며 교훈을 도출하기보다는, 2030 남성들의 저조한 지지를 올려보려고 우파의 안티 페미니즘에 추파를 던지는 것이다.
설령 이재명 정부가 평범한 청년 남성들이 겪는 고통과 불만을 해결하려는 진실한 의도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 과제를 성평등가족부의 특정 부서에 맡긴다고 될 일일까?
이런 기회주의적 타협은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여성과 남성을 이간질하는 논리를 강화해 오히려 성차별적 우파에게 자신감만 줄 뿐이다. 이준석이 이재명 대통령의 젠더 갈등 언급에 대해 “민주진보 계열 정당들이 젠더 문제에서 매우 위선적”이라고 공격한 것만 봐도 그렇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꼴이지만 말이다.
남성은 차별받는가?
물론 극우만 ‘남성 차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2021년 정부 연구 결과에 따르면 청년 남성 절반 이상이 ‘우리 사회는 남성에게 불평등하다’고 답했다.
이런 정서는 평범한 청년 남성들이 실제로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취업난과 주거난, 경쟁 심화는 가족 부양이라는 남성에게 부과되는 역할 기대를 점점 더 성취하기 어렵게 만든다. 보통의 청년 남성들은 아버지 세대보다 성취할 수 있는 것이 훨씬 적다. 게다가 군 강제 징집도 큰 고통과 박탈감을 준다.
이런 현실은 세계적으로도 유사하다. 《젊은 남성은 왜 분노하는가?》(바다출판사)의 저자 사이먼 제임스 코플런드는 이렇게 말한다.
“젠더를 둘러싼 환경이 달라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많은 남성은 남성성의 사명에 부응하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 이와 동시에 이 사명과 그것이 초래한 여러 해악을 정당하게 비판하는 움직임도 등장했다. 그 결과 수많은 남성이 남자다움이란 무엇인지 혼란을 느끼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 문제는 이러한 변화들이 후기 자본주의 체제[신자유주의] 아래에서 벌어진 경제적, 사회적 불안정성과 맞물려 나타났다는 점이다.”
평범한 청년 남성이 겪는 고통은 분명 자본주의 체제와 그 사회 구조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것을 ‘남성 차별’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차별은 단지 개인이 느끼는 중압감이나 억울함이 아니고, 개인들 간 경쟁에서 겪는 불리함만도 아니다.
이렇게 차별 개념을 느슨하게 쓰면 여성이 사회에서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차별과 천대를 받는다는 점이 흐려지기 쉽다.
더 나아가, 차별 문제를 개인 간 갈등으로 환원하거나 왜곡하고, 서로를 적대하게 만드는 효과를 낼 수도 있다. 삶의 조건이 악화되고 이것을 바꿀 자신이 없거나 부족하면 그 분노와 울분은 문제의 진정한 원인이 아니라 엉뚱한 다른 사람을 향할 수 있다. 지배자들과 우파는 “역차별” 논리로 이런 분열을 부추긴다.
차별은 특정 사회 집단에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대중을 이간해 지배하는 지배 전략의 일부이다.
물론 차별은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 방식과 깊숙이 얽혀 있어 물질적 토대가 있다. 예컨대 여성 차별은 자본주의하에서 다음 세대 노동자를 재생산하는 데서 핵심 구실을 하는 가족제도와 관련 있다. 이 사회에서 돌봄과 양육의 책임은 개별 가족(주로 그 안의 여성)에게 전가돼 있다. 가족은 사람들이 종종 사랑과 지원을 받는 곳이지만, 여성의 삶을 크게 제약하고 성차별적 관념을 경제적·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구실을 한다.
이런 관점에서 차별을 인식하면 여성 차별은 이 체제와 체제를 수호하려는 자들에게 이로운 반면, 남녀 노동계급 대중에게는 해롭다. 남녀 대립적 관점이 아니라 청년 여성과 남성이 겪는 문제들의 공통 원인인 체제와 지배계급 권력에 맞서 단결할 수 있는 정치와 투쟁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