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
인공 일반 지능, 그리고 기술이 구원할 것이라는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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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는 아랍에미리트의 스타게이트 사업에 참여한다고 발표했다. 스타게이트 사업은 글로벌 기술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구축을 목표로 최근 시작된 대규모 국제 사업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스타게이트 사업 참여가 한국이 세계 AI 선도주자가 되고 아시아에서 차세대 컴퓨팅의 허브로 도약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AI 기업들도 여전히 수익과는 거리가 멀고, 사회를 변혁할 기술 발전이 임박했다고 약속하면서 엄청난 금액의 자본을 빨아들이고 있다.
이런 현실은 투기적 거품 이상의 것, 즉 자본주의 심장부에 위치한 긴장을 드러낸다. 바로 자본주의가 자동화로 인간 노동을 없애려 하지만, 궁극적 이윤의 원천인 노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모순이다. 인공 일반 지능(AGI)을 위한 투자 열기가 세계적으로 뜨거워질수록 그 모순은 이론적 호기심의 영역을 넘어서서 당면한 경제적 위협을 제기할 것이다.
세계 곳곳의 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며 두려움에 떨고 있다. ‘AGI와 첨단 로봇의 등장으로 마침내 자본주의가 노동자 없는 생산이라는 꿈을 이룰 것인가?’ ‘자체 생산되는 기계가 인간 노동을 완전히 불필요하게 만들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기술에 관한 추측을 넘어 자본주의하에서 기술이 쓰이는 방식을 규정하는 사회관계를 살펴봐야 한다.
기술
그러나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 기술적 문제들이 있다.
AGI란 인간이 할 수 있는 업무를 모두(또는 대부분) 수행할 수 있고 시스템을 재구축하지 않아도 새 업무를 유연하게 학습할 수 있는 AI 시스템으로 흔히 정의된다.
현존하는 최상의 AI 시스템들 — 챗GPT 같은 거대 언어 모델(LLM)이든 또는 첨단 이미지 모델이든 — 은 모두 AGI가 아니다. 이 시스템들은 특정 상황에서 매우 인상적인 결과를 낼 수 있지만, 인간 지능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몇 가지 핵심 특징을 결여하고 있다.
장기 기억: 인간은 수년에 걸쳐 풍부하고 구조화된 기억을 형성할 수 있다. 우리는 인물, 장소, 계획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다. 반면 현존하는 프런트엔드[전체 시스템에서 이용자들이 직접 이용하는 부분] AI들은 한 번에 제한적인 “맥락 범위”만을 볼 수 있다. AI 시스템을 외부 프로그램이나 데이터베이스와 연동시킬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일생에 걸친 경험의 축적을 조야하게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
지속적인 학습과 자가 발전: 인간은 경험, 실수, 환경 변화로부터 끊임없이 배운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 “시스템 종료 후 재훈련” 과정이 필요 없다. 반면, 현존하는 거대 AI 모델은 대부분 가동을 중단한 뒤 대규모 데이터를 일괄 처리하는 방식으로 훈련된다. 모델을 갱신하는 데는 매우 큰 비용과 시간이 소요된다.
분야를 넘나드는 일반화: 인간은 일상적으로 여러 과제와 맥락을 넘나든다(요리, 정치적 논증, 친구를 위로하기, 오토바이 수리 등). 현존 AI들은 강력하지만 자신의 훈련 데이터 분포를 벗어난 조건에 직면하거나 환경이 변화하면 형편없이 무능할 수 있다.
현실적 감각, 인과적 추론, 물리적 존재:인간은 세계 속에서 생활하고 능동적으로 세계에 영향을 미치면서 물리 법칙, 사회적 눈치, 인과성에 대한 감각을 갖는 구체적인 존재다. 반면 현존하는 대부분의 AI들은 글이나 이미지처럼 직접적 물리적 실체가 없는 데이터 흐름을 가지고 작동한다. AI는 인과적 추론을 모방할 수 있지만, 행위가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키는지에 관해 신뢰성 있고 현실에 기초한 이해를 갖고 있는 것은 아직 아니다.
이런 허점들 때문에 AGI가 언제 도래할지에 관해 전문가들의 견해가 극도로 엇갈린다. 몇몇 설문조사에 따르면 유의미한 소수의 AI 연구자들은 2030년대 초까지 AGI가 완성될 가능성이 25퍼센트, 2040년까지는 약 50퍼센트라고 전망했다. 다른 분석들은 훨씬 보수적인데, 20년 안에 혁신적 AGI가 등장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봤다.
AI 업계 주요 인사들의 시각도 혼재돼 있다. 오픈AI의 샘 올트먼은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일찍” AGI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때로는 그것이 10년 이내일 것이라고 암시한다.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는 5~10년을 말한다. 반면, 메타의 얀 르쾽은 AGI의 도래가 “전혀 임박하지 않았다”며 수년, 어쩌면 수십 년에 걸친 기초 연구가 필요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엇갈리는 전망들은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AGI가 도래할 시점에 관해 과학자들 사이의 일치된 견해가 없다는 것이다.
AGI가 정말로 도래한다면 그것은 스위치 하나를 켜는 것과 같은 과정이 아닐 것임은 분명하다. 그것은 일련의 단계적 변화일 공산이 더 크다. 어떤 시점에는 기억력이 향상되고, 어떤 시점에는 현실에 대한 감각이 향상되고, 어떤 시점에는 로봇과의 통합이 향상되고, 어떤 시점에는 새로운 훈련 방식이 도입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발전이 일어날 때마다 AI 시스템이 실제 일터와 사회적 조건에서 할 수 있는 일도 변화할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기존 권력 구조와 경제적 동기의 영향 속에서 일어날 것이다.
일각에서는 초인공지능(ASI), 즉 모든 인지 영역에서 인간 지능을 초월하고 스스로 발전할 잠재력을 가진 AI에 관해 말한다. 많은 AI 안전 연구자들은 AGI가 도래하면 ASI까지는 금세일 것이라고 본다. 다른 연구자들은 그런 전망이 억측이라고 보고 AI의 발전이 어떤 임계점을 지나 통제를 벗어나기보다는 갈수록 정체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호들갑
AI 업계 주요 인사들이 임박한 AGI의 도래가 가져올 기술 유토피아를 묘사하는 동안 많은 논자들은 현재 AI 거품이 일고 있다고 지적하기 시작했다. IMF나 영국 중앙은행 등의 기관들은 현 상황과 1990년대 말 닷컴 버블 때의 유사성을 지적하며 AI 관련 주가가 급락할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이런 미사여구와 경고의 저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해답의 일부는 하드웨어와 인프라를 둘러싼 금융 기법에 있다. AI용 고사양 GPU의 핵심 생산자인 엔비디아가 그 중심에 있다. 경제 분석가들은 일종의 “판매자 금융”에 관해 지적한다. 엔비디아는 고객 기업의 주식을 사거나 대출 보증을 서 줘서 그 기업이 더 많은 대출을 받아 자사 GPU로 데이터센터를 지을 수 있게 하고 있다. 최첨단 GPU를 담보로 거액이 대출되고, 이에 기초한 채권과 증권 시장이 등장했다. 이는 1990년대 말 닷컴 버블을 연상시키는데, 당시에도 수요가 치솟을 것이라는 전망 아래 많은 장비들을 담보로 한 고위험 대출이 횡행했기 때문이다.
국가들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미국 정부, 한국 정부 등은 국가 경쟁력 향상이라는 미명 아래 데이터센터 건설, 발전소 건설, GPU 대량 구매 등 “AI 인프라” 구축에 공적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한국 정부는 최근 아랍에미리트의 스타게이트 사업 참여를 발표했다. 스타게이트 사업은 미국 바깥의 세계 최대 AI 데이터센터 구축 사업으로 홍보되고 있고, 한국 정부는 이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 ‘역내 AI 허브’로 발돋움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고 설명한다. 정부 부처들은 한국을 ‘AI 3대 강국’, ‘아시아의 AI 수도’로 만들겠다고 말한다. 이 사업의 초기 투자 비용은 30조 원이 넘는다.
오픈AI 같은 기업들은 소프트웨어 부문에서 놀라운 매출 증가세를 보여 줬지만, 수익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 오픈AI의 연간 환산 매출은 2023년 20억 달러에서 2025년 중엽 130억 달러로 늘었다. 그러나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오픈AI는 2024년 37억 달러의 매출을 내고 50억 달러를 지출해 적자를 기록했다. 2025년에는 140억 달러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고, 흑자 전환은 2029년경에나 이룰 것으로 희망하고 있다. 가장 “성공적인” AI 기업조차 시장에서 평가된 가치를 뒷받침할 안정적이고 수익성 있는 사업 모델을 입증해 보이지 못한 것이다.
이런 점들을 종합하면 현재 자본이 좇고 있는 서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AGI는 곧 도래할 것이고, AGI를 남들보다 먼저 개발하는 자는 엄청난 이윤과 지정학적 권력을 쥐게 될 것이다. 그런 만큼 반도체, 데이터센터, AI모델에 수조 달러를 퍼붓는 것은 당장 효용과 수익성이 변변찮더라도 합리적 선택이다.’ 여기서 AGI 담론은 결정적 구실을 하는데, 극단적으로 높은 기업 가치 평가와 막대한 자본 지출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더 먼 미래에 더 큰 변화를 약속할수록 당장의 모순을 제쳐 두기가 더 쉬워지기 때문이다.
AI 유토피아?
최근 미국-사우디아라비아 투자 포럼에서 일론 머스크는 AI에 대한 흔한 주장을 잘 요약했다. 향후 10~20년 안에 노동이 “선택적”이 되고, 돈이 “쓸모없는 것”이 되고, AI와 로봇이 “빈곤을 퇴치하고” 모든 사람을 부유하게 만들 것이라는 것이다. 풍요롭고, 노동과 빈곤이 사라진 세상이라니, SF소설에 나오는 사회주의 유토피아처럼 들린다. 그러나 자동차 공장과 데이터센터를 소유한 이 억만장자가 자사의 기술이 노동과 빈곤을 없앨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문제는 단순하다. 자본주의에서 로봇은 ‘사회의 로봇’이 아니라 기업과 부유한 투자자들의 사적 소유물이다. 생산성 증대는 자동으로 다수의 여가와 안정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먼저, 소유주들의 더 많은 이윤과 노동자들의 실업으로 나타난다. 머스크의 유토피아에서 노동이 “선택적”이라는 것은 사실 자본가들에게 그렇다는 것이다. 즉, 노동자들을 전혀 고용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머스크는 AI가 빈곤을 퇴치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존 기술로도 빈곤은 충분히 퇴치 가능하다. 식량이나 주택 자재는 필요 이상으로 생산되고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존엄한 삶을 보장할 의료 지식도 이미 있다. 계속되는 빈곤은 자본주의적 축적 때문에 나타나는 구조적 현상이다. 빈곤의 존재는 노동자들이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받아들이고 규율을 따르도록 그들을 상시적으로 압박한다. 실업자들로 이뤄진 산업예비군은 자본주의의 우발적 산물이 아니라 작동 방식의 일부다.
‘AI가 모두를 풍요롭게 만든다’는 약속은 대규모 투자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누가 그 시스템들을 소유하고 거기에서 득을 보느냐는 문제로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는 구실을 한다. 그런 약속은 자본주의의 틀을 유지하면서 사회주의 유토피아와 같은 결과를 마술적으로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역사를 보면 그런 주장을 믿을 이유는 별로 없다. 자본주의에서 신기술은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이윤 창출에 먼저 복무한다.
AI와 인간 노동
AI와 로봇은 과거의 신기술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다. 산업 혁명 이래 자본은 노동 방식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기계를 끊임없이 도입해 왔다. 이는 노동자들에게 언제나 이중적 성격을 띠었다. 기계는 가혹한 일을 줄일 수 있지만, 더 많은 생산량을 짜내고 노동 강도를 높이고 임금을 억제하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긴장은 추상적인 ‘인간 대 기계’의 긴장이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기계가 도입되는 방식과 노동자 사이의 긴장이다.
역사적으로 노동자들은 수동적이지 않았다. 노동운동의 역사는 신기술 도입을 둘러싼 투쟁으로 가득하다. 한국에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구조조정과 자동화가 낳는 고용 불안정에 맞서 1987년 대중 파업 이래로 오늘날까지 거듭 싸워 왔다. 2017년 현대차 노조는 로봇과 AI가 감원 사유가 될 수 없음을 확약하라고 사용자 측에 요구했다. 2024년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는 3만 명의 조합원을 둔 전국삼성전자노조가 사용자 측의 40년 된 ‘무노조’ 전통[전국삼성전자노조는 2019년 설립됐지만, 사용자 측은 노조를 줄곧 무시했다]을 깨고 사상 첫 파업에 돌입했다. ‘글로벌 경쟁’이라는 미명하에 사용자 측이 주 64시간까지 일을 시킬 수 있는 특례를 누리는 삼성전자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투쟁했다. 이들의 투쟁은 중요한 진실을 보여 준다. 가장 자동화된 공장에서도 자본은 여전히 인간 노동을 쥐어짜야 한다는 것이다.
변증법의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하의 생산력 발전은 양적 변화가 장기간 누적되다가 간헐적으로 질적인 도약이 나타나는 형태를 보인다. 이런 패턴을 AI 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거대 언어 모델은 점진적으로 발전했다. 더 많은 훈련 데이터가 투입되고, 더 많은 매개 변수가 사용되고, 더 나은 최적화가 적용됐다. 이처럼 양적 발전이 누적돼 임계점에 이르자 질적인 발전을 낳았다. 그저 양적인 증대로 보였던 것이 어느 순간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도약이지만 기적이 아니다. 그것은 이전까지 투입된 연산 결과, 데이터, 알고리듬, 수많은 기술자들과 연구자들의 노동을 발판으로 이뤄진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이 일정한 발전 수준에 이르면 기존 생산관계와 충돌을 빚게 된다”고 썼다. AI의 비약적 발전도 그러한 생산력 발전에 해당한다. 그러나 기술적 능력의 극적인 도약이 우리를 하루아침에 새로운 사회로 순간 이동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 기술은 데이터센터와 공장으로 물질화돼야 하고, 소프트웨어 제품으로 개발돼야 하고, 물류 체계를 통해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아야 하고, 실제 일터에 적용돼야 한다. 여기서 기존의 생산관계가 다시금 관건이 되고 계급투쟁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
AI와 로봇의 도입이 내는 효과는 매우 구체적이고 불균등하게 나타난다. 자동차 공장에서는 더 많은 로봇과 더 적은 노동자를 배치하도록 생산 라인이 재조직된다. 사무실에서는 관리자가 같은 인력에 더 많은 결과물을 요구할 수 있도록 AI가 도입된다. 이런 변화 중 어느 것도 그 자체로 즉각 “노동의 종말”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각각의 변화는 일터에서 세력 관계, 노동 강도, 노동자들의 협상력을 변화시킨다. 자동화의 양적 증대와 간헐적인 질적 도약은 생산관계에 의해 굴절돼서 임금 수준, 고용 안정, 노동 시간, 노동자들의 작업 통제권에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두 상반된 신화를 모두 거부해야 한다. 하나는 AGI가 아무런 투쟁 없이 노동을 사라지게 할 것이라는 자본가들의 유토피아다. 다른 하나는 노동자들이 대응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로봇에게 밀려 나갈 것이라는 숙명론적 비관론이다. 역사를 보면 신기술 도입의 실제 패턴은 더 복잡했다. 자본은 신기술을 도입해 착취를 늘리려 하지만, 노동자들은 반격하고 때로는 승리한다. AGI와 첨단 로봇 역시 그 패턴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근저에 깔린 사회관계를 바꾸기 위해 의식적으로 투쟁한다면 말이다.
핵심 물음은 ‘AGI가 모든 일자리를 하루아침에 없앨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자동화의 방향과 속도를 통제하고 거기서 얻은 이익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다. 노동자들이 조직화한다면 그들은 매 기술 발전(점진적인 것이든 비약적인 것이든)이 해고가 아닌 노동 시간 단축, 노동 강도 강화가 아닌 더 안전한 노동조건, 새 기계에 대한 민주적 통제로 이어지도록 투쟁할 수 있을 것이다. AGI가 도래하는 과정에서 인간 노동의 미래가 무엇일지는 컴퓨터 코드에 새겨져 있지 않다. 그 미래는 그 코드가 어떻게 사용될지를 둘러싼 투쟁으로 결정될 것이다. 기술 발전은 비약적으로 이뤄질 수 있지만, 그것의 사회적, 경제적 결과는 구체적인 사회적 조건과 물질적 제약, 계급투쟁을 매개로 나타날 것이다.
자동화의 역설
AGI 유토피아 서사의 근본에 있는 경제적 모순을 이해하려면, 자본주의에서 이윤이 실제로 어떻게 생겨나는지 살펴봐야 한다. 로봇이 원자재를 채취하고, 공장을 가동하고, 다른 로봇을 수리하고, 유통을 관리하는 등 오늘날 인간이 하는 거의 모든 일을 수행하는 세계를 상상해 보자. 그러면 다음 물음(구체적 함의가 있는 물음이다)을 던질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얻기 위해 인간 노동에 의존하는데, 인간 노동이 더는 불필요해지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상품에 관한 기본적 구분을 알면 이 물음에 답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자본주의하에서 모든 상품은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사용가치는 상품이 사람들에게 실제로 주는 것이다. 음식은 영양분을 주고, 집은 들어가서 살 수 있는 곳이고, 전화는 통신을 할 수 있게 한다. 이처럼 사용가치란 상품의 물리적, 실용적 유용성을 뜻한다.
교환가치는 시장에서 다른 상품과 거래되는 양으로서, 가격으로 표현된다. 이는 궁극적으로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드는 사회적 필요 노동 시간을 반영한다. 사회적 필요 노동 시간이란 특정 공장에서 일하는 특정 노동자의 생산 시간이 아니라 통상적 조건에서 그것을 생산하는 데 드는 평균 노동 시간을 뜻한다.
두 측면이 언제나 조응하는 것은 아니다. 깨끗한 공기의 사용가치는 엄청나지만, 그것은 상품으로 생산되지 않기에 교환가치를 갖지 않는다. 명품 가방의 사용가치는 대단치 않지만 교환가치는 매우 크다. 요점은 교환가치가 사물의 자연적 속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사회관계, 구체적으로는 자본주의하의 상품 생산자들 사이의 관계다.
로봇과 AI는 분명 사용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 앞서 상상한 가상의 미래에서 로봇과 AI는 막대한 식량, 주택, 의료 행위, 소비재를 최소한의 노력으로 생산할 것이다. 그 사회에서 물질적 부, 즉 유용성을 가진 재화들은 어마어마하게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처럼 사용가치가 아무리 많아도 자본주의 질서하에서는 그것이 자동으로 교환가치 증대 또는 이윤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산 노동과 죽은 노동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기계류는 ‘죽은 노동’을 나타낸다. 즉 과거의 인간 노동이 도구와 인프라로 굳은 것이다. 반면 노동자들은 ‘산 노동’으로서, 자신들에게 지급된 가치 이상으로 새로운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생산 요소다.
기계류는 조금씩 마모되면서 자신의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시킨다(감가상각). 사용기한이 10년인 10만 달러짜리 로봇은 생산되는 제품에 매년 1만 달러의 가치를 이전할 것이다. 그러나 잉여가치를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로봇은 자신의 구입 비용을 생산물로 이전할 뿐이다. 반면 산 노동은 임금에 해당하는 가치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 이상으로 일함으로써 잉여가치를 만들어 낸다.
단순화된 사례를 들어 보겠다. 공장주가 기계류와 원자재에 7만 달러, 임금에 3만 달러를 투자했고 노동자들이 생산한 재화가 12만 달러에 팔린다고 하자. 기계류와 원자재의 가치 7만 달러는 생산품으로 그대로 이전된다. 그러나 공장주는 임금으로 지불한 금액을 회수하고도 2만 달러를 더 챙긴다. 노동자들이 임금으로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가치, 즉 잉여가치를 생산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거의 모든 것이 자동화된 공장을 상상해 보자. 로봇과 원재자에는 10만 달러, 임금에는 사실상 0달러가 쓰인다. 이 경우에도 로봇은 재화를 생산한다. 그러나 경쟁 시장에서 이 재화는 얼마에 팔릴까?
경쟁하에서 가격은 비용 더하기 경제 전반의 이윤율로 수렴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 상상 속의 공장처럼 인간 노동이 사라지고, 또 그런 일이 경제의 여러 부문에서 일어난다면 잉여가치는 어디서 나올 수 있는가.
단기적으로 보면, 경쟁자들보다 먼저 자동화를 도입한 자본가는 재화를 더 저렴하게 생산하고도 기존 가격에 팔 수 있기 때문에 초과이윤을 얻는다. 그러나 자동화가 해당 부문 전반으로 확산되면 경쟁 압력에 따라 가격이 더 낮아진 생산 비용을 따라 내려가고, 일시적 우위는 사라진다. 그리고 이런 일이 경제 전반에 걸쳐 일어난다면, 즉 로봇과 AGI가 대부분의 부문에서 인간 노동을 대체하면 체제 전체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마르크스의 분석에 따르면, 생산 과정에서 산 노동을 점진적으로 제거하면 잉여가치의 원천도 제거하게 된다. 막대한 생산 능력과 재화는 여전히 있겠지만, 이윤을 생성하는 메커니즘은 잠식될 것이다. 인건비 없는 생산이라는 자본의 꿈은 자승자박이다. 사용가치가 넘쳐 나는 세상과 정상적인 이윤 체제는 같은 바탕 위에서 무한정 양립할 수 없다.
이것은 단지 이론적 사변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현실에서 이것의 일종을 목도하고 있다. 고도로 자동화된 물류 창고처럼 고도의 자동화가 이뤄지고 노동 집약도가 낮은 산업에서는 엄청난 생산성에도 불구하고 이윤을 짜내기 위한 매우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기업들은 다른 곳에서 이윤을 뽑아내야 한다. 그래서 독점적 지위나 지적 재산권을 통한 초과이윤(이것은 진정한 지대와 달리 시간에 따라 줄어드는 경향이 있는데, 기술적 우위가 시간에 따라 사라지기 때문이다)에 의존하거나, 상품을 생산해서 경쟁적인 시장에서 판매하는 것이 아닌 금융 기법에 의존할 때가 많은 것이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한가
자동화를 향한 자본의 맹렬한 노력이 궁극적으로 이윤의 기반을 먹어 들어간다면, 자본주의가 완전한 자동화로 나아가는 과정은 위기와 불안정으로 가득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기업들이 경쟁 우위를 위해 자동화를 도입하지만 결국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시장을 갉아먹는 사이클이 반복될 것이다. 그리고 생산을 통한 이윤을 얻는 대신 희소성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고, 독점을 강화하고, 금융화를 확장해야 한다는 엄청난 압력이 형성될 것이다.
노동을 없애려는 자본주의의 노력과, 이윤의 원천인 노동에 대한 자본주의의 의존 사이의 모순은 기술 발전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모순은 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조직 방식이 현대 기술의 생산 잠재력과 갈수록 불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가치와 자동화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이 보여 주는 바는 로봇이 유용한 재화를 막대하게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풍요를 합리적으로 조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래는 로봇이 무엇을 할 수 있냐는 기술적 문제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누가 로봇을 소유하고 누구의 이해관계를 위해 작동시킬 것이냐는 정치적 물음에 의해 결정된다.
기술적 구원을 넘어
오늘날 AGI라는 꿈은 빅토리아 시대에 산업 혁명이 자본가들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구실을 하고 있다. 차세대 기계가 발명되면 시스템에 내재한 긴장을 마침내 해소할 수 있다는 기대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봤듯이 그 모순들(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모순, 노동을 없애려는 자본의 노력과 이윤의 원천인 노동에 대한 의존 사이의 모순, 기술이 안겨 주는 풍요와 인위적인 희소성의 모순)은 기술적 해법을 기다리고 있는 기술적 문제들이 아니다. 이것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기초한 사회의 모순들이다.
AGI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없애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더 첨예하게 만들 것이다. 신기술의 생산적 잠재력이 크면 클수록, 생활 수단을 얻기 위해 그 기계의 소유자들에게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현실은 더 부조리한 것이 될 것이다. 머스크 등이 약속하는 미래 ― 투쟁이 사라진 풍요, 재분배가 필요 없는 부, 집단적 소유 없는 자유 ― 는 사적 자본 축적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는 길을 완전히 바꿔야 도달할 수 있는 목적지다.
진정한 선택은 인간이냐 기계냐가 아니다. 진정한 선택은 이윤을 중심으로 조직되는 사회냐 인간의 필요를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냐다. AGI는 그 선택을 내려 주지 않는다. 다만 그 선택을 더 화급한 것으로 만들 뿐이다.
부록: 보편적 기본소득
많은 사람들은 외견상 단순해 보이는 해법을 제시한다. 자동화로 인간 노동이 덜 또는 아예 필요 없어진다면 보편적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되지 않을까? AGI 로봇이 도래한 상상 속 미래 사회에서는 기계가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게 하고, 인간에게는 필요한 것을 구매할 수 있는 보장된 소득을 지급하면 된다는 것이다. 노동은 선택적이 되지만 화폐는 여전히 시스템을 순환하게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기본소득론이 사후 분배만 다룰 뿐, 가치와 이윤이 생산되는 근저의 메커니즘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틀 속에서 기본소득을 지급하려면 결국 이윤에 세금을 부과하거나, 공공 부채를 늘리거나, 노동자들에게 간접세를 매기는 등 결국 어딘가에서 재원을 확보해야 한다. 마르크스의 용어로 말하자면,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체제 어딘가에서 이뤄지는 산 노동을 착취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이미 생산된 잉여가치를 재분배하는 것에 불과하다. 로봇과 AI는 생산성을 올리고 재화의 가격을 낮출 수 있지만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마법을 부리지는 못한다. 기본소득은 그 잉여가치의 일부를 누가 가져갈지를 달라지게 할 수 있지만, 그 잉여가치가 생산되는 방식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유지되는 한, 기본소득은 기존 계급 구조를 강화하는 메커니즘이 되기 쉽다. 매달 통장으로 기본소득이 입금돼도 그 돈은 바로 임대인 계급에게 지대로, 채권자들에게 원리금으로, 거대 플랫폼 기업들이 부과한 구독료와 독점 가격으로 빠져나갈 것이다. 기본소득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주택이나 인프라, 디지털 플랫폼을 소유한 자들에게 안정적인 소비자층을 제공하는 국가 보조금 성격을 띨 것이다.
인간 노동이 크게 줄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사회가 온다면, 좌파적 기본소득론자들의 취지(빈곤을 완화하고 노동자들의 교섭력을 키우기)는 이해할 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소득론은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단이 못 된다. 좌파적 기본소득론은 복지국가 완전 해체를 목표로 하는 우파적 기본소득론과 구별돼야 하지만, 좋은 취지의 기본소득 방안조차 사회 안전망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 기본소득론자들은 기존 복지 제도로부터의 배제를 과장하고 기본소득이 기존 복지 제도를 약화시킬 위험은 축소해서 말할 때가 있다. 자본주의 내에서의 개혁으로서 기본소득은 근본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다. 자본은 잉여가치의 궁극적 원천인 노동에 의존하지만, 노동을 기계로 대체할 강력한 동기를 갖고 있다. 기본소득이 자본을 위협하지 않을 작은 액수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불평등한 시스템의 한 꺼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노동시장과 임대인로부터 정말로 해방시킬 만큼 기본소득을 지급하려면, 소유와 통제를 둘러싼 전면적 투쟁을 피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자동화된 사회라는 상상은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로봇과 AGI가 사실상 모든 노동을 담당하고, ‘로봇 이윤’으로 모두에게 후한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면 그 사회는 더는 일반적인 자본주의가 아니게 된다. 그런 사회는 잉여가 사회적으로 이용되고 집단적으로 배분되고, 생활 수단을 마련하기 위해 노동력을 판매하거나 임대인에게 지대를 납부해야 할 필요가 없는 사회일 것이다. 다시 말해, 기본소득은 기존 계급 관계를 안정시키는 제한적인 땜질 처방에 그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본주의 자체를 뛰어넘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 자체로는 마르크스가 지적한 자본과 노동, 가치의 모순을 없애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