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 임시 대통령 델시 로드리게스, 석유를 미국에 개방하다
〈노동자 연대〉 구독
미국이 베네수엘라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 부부를 납치한 지 2주도 안 돼, 델시 로드리게스 임시대통령 정부는 국가의 부를 미국 제국주의에 개방했다.
1월 15일 국정연설에서 로드리게스는 ‘외국계’ 기업들이 베네수엘라 석유 산업에 투자하면 생산 석유의 최대 55퍼센트를 수익으로 가져갈 수 있게 하고, 각종 투자 제한도 완화하겠다고 약속했다.
트럼프가 베네수엘라 석유 갈취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바로 그 시점에 곳간 문을 더 열어 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트럼프는 “이게 바로 우리가 요청해 온 것”이라고 환호했다. 미국 국무장관 마코 루비오는 “베네수엘라가 이 개혁을 이뤄 낸다면 표적 제재 철회를 논의할 수 있다”며 약속 이행을 주문했다.
이를 위해 로드리게스는 석유 개발·판매를 총괄하는 탄화수소법을 개정해, 소수 프로젝트에만 적용되던 ‘봉쇄대응법’의 적용 범위를 대폭 확대하겠다고 했다.
베네수엘라의 한 사회주의 단체는 그 법의 이름에 속아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봉쇄대응법에는 경제 제재로부터 국부를 보호하는 메커니즘이 전혀 없다. 오히려 국영 기업의 민영화와 민관 합작 운영을 허용해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는 것이 이 법의 핵심이다. 그 ‘투자’는 기업을 헐값에 매각하거나 외채를 국영 석유기업 PDVSA 주식으로 상환하는 [즉, 손해를 보는] 식으로 이뤄지는데, 그 과정에서 관료들은 막대한 사익을 챙긴다.
“나라의 부를 이용해 사적 자본을 축적한 관료들과 신흥 자본가들이 외국계 자본과 제국주의 세력들과 공모해 국부를 포식하는 것이다.”
로드리게스는 경제부 장관 시절 봉쇄대응법을 직접 설계했다. 그 법이 시행된 후 베네수엘라 경제가 달러와 더 연동돼, 달러를 보유한 부유층이 제재하에서도 축재를 누릴 수 있었다.
반면 노동계급의 대중은 고통을 겪었다. 봉쇄대응법에 따라 투자하는 다국적기업들에게는 인력을 마음대로 감축하고 해고할 권한과, 월급이 50센트도 되지 않는 최저임금 정책의 혜택을 누렸다. 이런 법을 로드리게스는 신규 유전 건설이나 노후 유전 보수 전반에 적용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로써 국가 관료와 군부는 트럼프의 개방 압박에 일부 부응하면서도 권력과 이익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베네수엘라 국방장관 로페스는 이 개혁으로 “생산에서 군대의 역할이 강화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 노동계급 대중의 처지는 봉쇄대응법이 처음 도입되던 때보다도 훨씬 악화됐다. 1월 13일, 베네수엘라의 노동단체 ‘혁명, 자주, 노동계급 단결 운동’(C-Cura)은 지금 베네수엘라에는 “임금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규탄했다.
“노동자 임금은 2022년 3월 이후 1,400일간 동결돼 있다. 법정 최저임금 130볼리바르는 제정 당시 가치로 30달러 정도였는데, 4년이 지난 지금 그 가치는 98퍼센트나 폭락해 0.34달러에 불과하다.
“연간 물가 상승률은 507퍼센트, 일일 물가상승률이 2~3퍼센트에 이른다. 임금은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생계를 유지한다는 필수 기능을 상실했다.”
베네수엘라 인구의 35.6퍼센트(IMF 추산)에 이르는 실업자들은 그조차도 받지 못한다. 전체 인구의 56퍼센트가 극빈선 아래에 있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국외에서 노동하는 가족·친지의 송금에 생계를 의지한다.
노동계급 대중의 극심한 고통을 완화하려면 생필품 가격을 통제하고 공급을 보장하며, 외채 상환을 중단하고 그 부를 대중의 필요에 맞는 방향에 쓰도록 경제 운용 방식을 크게 바꿔야 한다.
그러려면 미국과 거래에 열심인 관료들이 아니라 노동계급 대중 자신이 국가의 부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로드리게스 정부에게 ‘민중 권력’이라는 말은 차베스의 향수를 이용하려는 수사에 불과하다. 로드리게스는 법 개정으로 발생한 추가 수익 일부를 복지·인프라를 지원하는 ‘사회 보호 펀드’ 조성에 쓰겠다고만 말하고 있다. 그러나 턱없이 부족한 조처다.
계엄
로드리게스는 ‘사회 보호 펀드’로 가지 않는 나머지 수익을 치안 강화에 쓰겠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현재 군대와 경찰이 하는 ‘질서 유지’ 노력을 크게 칭찬했다.
로드리게스가 말하는 ‘질서 유지’는 대중의 분노 표출을 단속하는 것이다. 현 정부는 1월 3일 침공 직후 선포된 계엄을 유지하며 집회·결사의 자유 등 민주적 권리를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사회주의자 미겔 앙헬 에르난데스는 1월 14일 인터뷰에서 “계엄은 또 다른 억압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관제 시위 외에는 시위가 열리지 못합니다. 지난주 카라카스에서 몇 차례 관제 시위가 열렸지만, 정부 관계자 중심 시위이지, 대중 참가는 없었습니다. 구호는 ‘마두로를 석방하라’ 뿐이고 미국의 군사 개입 반대 구호도 없었습니다.”
로드리게스 정부는 이런 탄압으로 대중을 단속하는 한편 트럼프와의 거래로 베네수엘라 자본주의와 정부의 안위를 지키려 한다.
트럼프는 베네수엘라의 1976년 석유 산업 국유화를 되돌리겠다고 공언한다. 그 전까지 베네수엘라 석유 산업은 미국 기업들의 놀이터였고, 베네수엘라 GDP의 최대 12퍼센트가 미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지난해 GDP로 환산하면 그 규모는 약 100억 달러에 이른다.
미국은 지금도 베네수엘라 앞바다에 투입한 대군을 유지하며 해상 봉쇄를 지속하고 있다. 로드리게스는 이를 핑계 삼아 트럼프와의 거래를 정당화하고, 대중의 분노를 대미 협상 카드로만 사용하려 한다.
중국 문제도 있다. 그간 중국은 600억 달러 넘는 베네수엘라의 외채를 석유로 상환받고 있었고, 마두로 납치 이후 이 상환의 유지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트럼프는 이 상환이 보장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동시에 로드리게스 정부에 중국과의 단교를 압박하고 있다.
이에 응해 로드리게스는 대(對)중국 무역을 지휘하던 산업장관 알렉스 사브를 경질하고 정부의 무역 기구를 재편했다.
미중 갈등이 더 심화되면 베네수엘라의 대중국 외채 상환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베네수엘라 경제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힐 것이다.
그래서 에르난데스도 “정국 안정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상황은 누가 봐도 불안정합니다. 문제는 사태가 터지느냐 여부가 아니라 언제 터지느냐입니다.
“현직 대통령이 끌려가는 초대형 사건이 터졌는데 이 정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동하려 합니다. 하지만 미국의 이번 군사 개입은 이 정부의 취약성도 드러내 보였습니다.
“그 때문에 몇몇 부문에서는 오랫동안 제기돼 오던 요구들이 조금씩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에르난데스는 생활고에 관한 요구와 민주적 권리에 관한 요구가 모두 있다고 전했다. “임금 인상이나 생계 보장에 관한 요구들이 있습니다.
“저희는 계엄 종식과 모든 좌파·친민주주의 정당의 합법화도 요구합니다.
“정치수 석방 요구도 반향이 있습니다. 현재 베네수엘라에는 정치수가 약 800명이 있는데, 그중 23명이 석방됐습니다. 그나마도 대부분이 [우익] 야당 정치인들입니다.
“하지만 정치수 중에는 노동계급 사람들도 많습니다. 석유·교사·공공부문 등 여러 부문의 노조 활동가들이 도합 500명 정도 수감돼 있습니다. 이들을 석방해야 합니다.”
베네수엘라 사회주의자들은 민주적 권리 방어 요구와 함께, 나라의 부를 미국이 아니라 민중의 필요에 맞게 쓰도록 하는 대중 저항을 건설해야 한다. 국제 연대 운동은 그런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지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