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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퇴진 운동 2023~24년 팔레스타인 투쟁과 중동 트럼프 2기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이명박 시대 민주주의 투쟁을 ‘제대로 보는 법’

미디어 악법 날치기 통과로 이명박 정권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부쩍 커졌다. 쌍용차 파업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 작전은 이명박의 ‘친서민’ 사기극의 실체를 드러냈다. 이 상황에서 이명박 정권을 독재나 파시즘으로 규정하는 주장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고, 민주노동당 등은 대중의 반감을 정권 퇴진 운동으로 모아 내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대표적으로 〈시사IN〉 99호는 기획 특집 ‘이명박 시대를 제대로 보는 법’에서, 이 같은 진보진영의 담론이 “분노하는 소수”를 “‘흥분’시키는 비판”일 뿐, “방향이나 설득력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지난해 촛불항쟁 참가자들 이들은 ‘선출된 권력’보다 대중 자신의 주권을 우위에 놓고 싶어 했다. ⓒ이미진

〈시사IN〉 고동우 기자는 이명박 퇴진론을 뒷받침하는 ‘독재·파쇼론’이 “‘진짜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고 비판한다. ‘진짜 현실’에서는 ‘선출된 권력’ 뒤에 진정한 힘을 가진 “재벌과 조중동” 등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있고, 따라서 이명박만 사라진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 또한 이런 비판에 동참한다. “모든 걸 이명박에서 출발하는 논리는 일종의 ‘메시아주의’”이며, “여러 권력의 복합체이자 갈등의 구현체인 이명박 정부의 문제를 ‘이명박’이라는 ‘얼굴마담’의 흠결로 환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명박 정부를 “반민주 세력 또는 독재 정권으로 규정”하는 것은 “도덕적 비판”일 뿐 정확한 규정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명박 정권을 독재나 파시즘으로 규정하는 것은 과장이다. 이명박 정권이 집회 불허, 국가보안법을 이용한 탄압, 언론 자유 제약 등 반민주적 탄압을 일삼는 것은 사실이지만, 민주적 기본권이 1980년대 군사독재 수준으로 제약받는 상황은 아니다.

특히 한국 사회 민주화의 동력이었던 노동자와 피억압 대중의 운동과 조직들(노동조합, 노동자 정당 등)이 파괴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명박 정권을 노동자들의 조직을 절멸시키려는 파시즘이라고 보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부를 반민주 세력으로 규정하는 것조차 반대하는 이택광 교수의 주장은 황당하다. 한국 사회가 독재로 회귀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명박 정권을 민주주의 세력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현재의 불완전한 민주화조차 학생과 노동자 계급의 투쟁을 통해 얻은 성과이고, 그 과정에서 보수 우파와 한나라당은 민주화를 계속 가로막고 후퇴시키려 한 세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한계

고동우 기자의 지적대로 ‘독재·파쇼론’은 “이명박 정부를 ‘실재보다’ ‘필요 이상으로’ 강력”하게 보이도록 하는 약점이 있다. 이명박 정권이 반민주적 탄압을 일삼는 것은 강력해서가 아니라, “‘겉보기와 달리’ 매우 허약”하기 때문이다. 고동우 기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노동자와 피억압 대중의 현재 역량을 과소평가할 수 있다는 점도 ‘독재·파쇼론’의 약점이다.

그럼에도 고동우 기자의 실천적 결론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고동우 기자는 이명박 정권이 취약하고 진정한 권력은 다른 데 있으므로 사실상 정권 반대 운동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려는 듯하다.

물론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혁을 추구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선출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 아니라, 대기업 총수, 군대·경찰·사법기구 수뇌부 등에게 진정한 권력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명박 퇴진으로 한국 사회의 주요 문제들이 모두 해결될 수 없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반정부 투쟁 외에도 경제 위기, 제국주의 전쟁과 경쟁, 차별과 억압, 소외, 착취와 불평등에 맞서며 이를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혁과 연결시켜야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지배계급 이익에 충실한 ‘선출된 권력’에 대항하는 투쟁의 중요성이 사라지진 않는다. ‘선출된 권력’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강력한 영향을 받지만 단지 그들의 꼭두각시인 것만은 아니다. ‘선출된 권력’은 지배계급 전체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것에 이해관계가 있고, 어느 정도는 ‘자발적으로’ 그렇게 한다. 따라서 ‘선출된 권력’에 대항하는 투쟁은 지배계급 전체에 맞선 투쟁의 일부다.

또한 ‘선출된 권력’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은 긴밀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전자에 대한 투쟁은 후자에게도 곤혹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정권 반대 투쟁과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맞선 투쟁은 대립되기는커녕 상호보완적이다. 무엇보다 반정부 투쟁이 성공을 거둔다면 경제 권력에 맞서는 운동을 고무할 수 있다. 1987년 6월 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이 그런 사례다.

사실 고동우 기자가 ‘선출되지 않은 권력’ 문제를 언급했지만, 급진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고동우 기자가 정권 퇴진론을 비판하는 이유는 ‘선출된 권력’을 선거가 아니라 투쟁을 통해 물러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 한정하는 지식인들의 주장을 우호적으로 인용한다.

가령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정권에 대한 “괴물화”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권력과 대중의 괴리감”을 키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꼭 필요한 시기에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도록 호흡 조절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사실상 선거 시기까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자제하라고 주문한다.

김윤철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도 비슷하게 주장한다. “아무리 밉더라도 어쨌든 이 대통령은 민주주의 제도 내에 존재한다. 모든 문제가 선출된 권력에 있다는 식으로만 비판하면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대중의 회의는 더욱더 깊어질 것이다.”

실제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대중의 회의는 매우 깊다. 서구나 한국이나 투표율 저하는 공통된 추세다. 그러나 이런 ‘대중의 회의’는 정권 비판 세력이 아니라 기업주와 부자의 이익을 위해 대중의 의사를 무시한 ‘선출된 권력’ 스스로가 부추긴 것이다. 게다가 이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제도가 대중의 민주주의 열망을 채워 주지 못한다는 점을 반영한 것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선출되지 않은 집단이 진정한 권력을 갖고 있고, 대중은 이들을 통제할 수 없다. 선출된 집단이 대중의 의사와 반하는 결정을 내려도 그들을 통제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집권 초부터 수백만 대중의 저항에 부딪혔고, 지금껏 국민 다수의 환멸을 사는 정권이 단지 선출됐다는 이유로 임기를 보장받고 있는 현실 자체가 이를 잘 보여 준다. 촛불항쟁 때 수많은 대중이 “대한민국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하고 외치며 ‘선출된 권력’보다 대중 자신의 주권을 우위에 놓고 싶어 했던 것은 이런 현실에 대한 반발이었다.

정권 퇴진론의 현실성

한편 고동우 기자는 진보신당 관계자 인터뷰를 인용해, 정권 퇴진론은 현실성이 없다고 비판한다. ‘독재·파쇼론’을 비판할 때는 이명박 정권이 취약하다면서, 모순이게도 취약한 정권을 퇴진시키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엄청난 국가 탄압으로 대중 행동이 억압당하고 있고, 이로 인해 대중의 사기가 그다지 높지 않은 현 국면에서 당장 퇴진의 동력이 준비돼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앞으로도 지금 같은 조건이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미 지난해 촛불항쟁을 통해, 대중 자신의 힘으로 정권 퇴진의 동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서울 도심에서만 70만 명이 시위에 나선 6월 10일 전후로 정권의 지지율이 7퍼센트로 떨어지고, 퇴진 지지 여론이 40퍼센트에 이르렀을 때는 분명히 퇴진을 실질화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정권 퇴진을 운동의 목표로 삼기를 극구 거부하고, 촛불항쟁을 노동자 파업 등으로 확대시키는 것을 회피해 기회를 놓치게 됐다.

그럼에도 촛불항쟁을 거치면서 이명박 정권이 개혁 불가능한 정권이라는 점만큼은 대중적으로 분명히 입증됐다. 용산 살인 진압과 쌍용차 진압 등을 거치며 이런 점은 더 분명해졌다. 또한 이명박 정권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을 수 없는 총체적 불신의 대상이 됐고, 충성도가 높지 않은 집토끼들이라도 달래 지지율 30퍼센트를 턱걸이하는 식으로 연명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퇴진을 운동의 목표로 삼고 조직하는 것은 충분히 정당하고 현실성 있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민주노동당이 이명박 정권 퇴진 운동 건설을 결의한 것은 환영할 일이다.

물론 이명박 퇴진 이후에 박근혜 같은 정치인이 집권할 것을 우려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는 결정된 문제가 아니다. 퇴진을 어떤 힘으로 이루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만약 대중 자신의 힘으로 정권을 퇴진시킨다면, 자신감을 얻은 대중은 진보적 대안을 찾으려 할 것이다. 물론 대안 부재 상황을 비집고 우파가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이들이 우파적 프로그램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만만치 않은 상황이 될 것이다.

이명박 퇴진은 현실화할 수 있는 목표다. 다만 이를 위해 기존의 민주주의 투쟁 경험에서 배워야 한다. 이 경험들을 통해 배울 수 있는 핵심 교훈은 오늘날 민주주의 투쟁을 이끌 수 있는 세력은 노동자 계급이라는 점이다.

진정한 민주주의에는 한참 못미치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조차 자본가들이 선사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투쟁에 대한 지배자들의 양보로서 나타났다. 보통선거권은 서구에서 1백 년에 가까운 투쟁을 통해 쟁취한 것이고, 한국의 제한된 민주화 과정조차 1987년 6월 항쟁7·8·9월 노동자 대투쟁, 그리고 그에 이은 민주노조와 진보정당 건설 운동 등 학생과 노동자들의 투쟁과 조직을 통해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명박 퇴진을 현실화하려면 노동계급이 경제 위기 고통전가에 맞선 투쟁과 함께 민주주의 투쟁에서도 주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를 위해 변혁적 좌파는 노동자 투쟁에 대한 물질적·이데올로기적 지원을 통해 노동계급의 자신감을 고무하고, 민주주의 투쟁이 노동계급적 요구와 결합되도록 애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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