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오펜하이머〉(크리스토퍼 놀란, 2023):
흥미롭지만 핵 논쟁의 중요한 맥락이 생략돼 있다
〈노동자 연대〉 구독
영화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던 물리학자 오펜하이머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 영화다.
오펜하이머는 ‘핵폭탄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러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을 알게 된 이후 그는 핵무기 개발과 확산에 반대했다.
이 영화는 핵폭탄 개발을 향한 야심과 열정이 핵폭탄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으로 바뀌어 가는 오펜하이머의 심리 변화를 묘사한다. 매카시즘 시기에 핵무기에 반대하다 그가 소련 첩자로 몰려 고초를 겪은 일도 보여 준다.
그러나 오펜하이머 개인에 초점을 맞추느라, 핵폭탄이 만들어지고 실제로 쓰이게 된 역사적 배경은 영화에서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미국은 왜 그토록 무시무시한 무기를 개발했을까? 그리고 영화에서도 잠깐 언급되듯 일본이 사실상 패망 수순이었는데도 왜 굳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했을까?
〈오펜하이머〉가 충분히 보여 주지 않은 것들
흔히 제2차세계대전을 민주주의 국가들이 파시즘에 맞선 전쟁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도 그런 주류적 관점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연합국 지배자들이 처음부터 파시스트들을 적대했던 것은 아니다. 처칠은 전쟁 전 무솔리니가 좌파들을 짓밟은 것을 칭송했다. 스탈린은 히틀러와 불가침조약을 맺었고 소련으로 망명한 독일 공산당원들을 나치에 넘겼다. 미국도 히틀러가 전쟁과 유대인 학살을 시작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 일본이 세력을 확장하며 태평양에서 자국에 도전하자 전쟁에 뛰어들었다.
연합국 지배자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이해관계 때문에 참전했다. 승리한 연합국 지배자들이 종전 이후 세계 곳곳에서 분출한 해방 염원을 짓밟은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히틀러보다 먼저 핵폭탄을 개발하려고 시작됐다. 그러나 영화에서도 짧게 언급되듯 독일이 항복하고 일본의 패배가 확실시됐는데도 맨해튼 프로젝트는 계속됐다. 미국이 핵폭탄을 전후 세력권 분할의 협상 카드로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뒤 오펜하이머는 “우리는 포츠담 회담 전까지 그것을 완성시키라는 엄청난 압력을 받았다” 하고 말했다. 영화에서도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 그로브스가 “[1945년] 7월”까지 실험을 성공시키라고 오펜하이머를 독촉하는 장면이 나온다.
최초의 핵실험인 ‘트리니티 실험’의 성공 장면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섬광과 화염, 굉음과 후폭풍에 오펜하이머와 동료들은 환호한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포츠담에서 소식을 들은 미국 대통령 트루먼도 쾌재를 불렀다.
“엄청난 신무기의 등장에 고무된 트루먼은 포츠담 회담에서 스탈린을 압박하는 카드로 핵무기를 선택했다. 핵 강압외교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핵과 인간》, 정욱식, 서해문집)
트리니티 실험 성공으로 미국은 가공할 위력의 신무기를 갖고 있음을 소련과 전 세계에 과시할 기회를 얻었다.
미국은 핵폭탄의 위력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있는 곳에 핵폭탄을 떨어뜨려야 했다. 미국 전략폭격조사단의 공식 보고서를 보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목표물로 선택된 이유는 경제 활동과 인구가 집중된 도시이기 때문이었다.”(《미국민중사 2》, 하워드 진, 이후)
미국은 순전히 소련과의 패권 경쟁을 위해 전쟁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핵폭탄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20만 명 넘는 사람이 죽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방사선 피폭으로 끔찍한 고통 속에 살다 죽었다. 그중에는 조선인들도 많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희생자들을 떠올리면 유니버셜픽쳐스가 이 영화의 한국 개봉일을 광복절로 정한 것은 매우 무례한 일이다. 핵폭탄 투하 덕분에 한국이 해방됐으니 ‘핵폭탄의 아버지’조차 자책하고 후회한 핵폭탄 개발을 보며 한국인 관객들이 기뻐하라는 것인가.
미국의 핵폭탄 투하는 한국 등 일본의 식민지들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국의 제국주의적 이익 때문이었다. 일본이 패배한 뒤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됐다.
영화는 핵폭탄 개발과 투하가 제국주의적 경쟁 속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 주지는 않는다.
핵전쟁
영화에서 오펜하이머가 핵 확산에 반대하면서 미국이 더 강력한 핵폭탄을 만들면 소련도 그에 대응해 새로운 핵폭탄을 만들게 된다고 경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펜하이머의 우려대로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들은 인류를 몇 번이고 절멸시킬 만큼 많은 핵무기를 만들어 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 수 있겠다. ‘그래도 핵무기가 전쟁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지 않나?’
물론 핵무기가 핵 보유국 간 직접 충돌을 어느 정도 억제하기는 한다. 그러나 핵무기가 만들어진 뒤에도 세계 각지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냉전 시기 미·소 간 핵무기 경쟁은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 핵전쟁이 실제로 벌어질 뻔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확전의 논리 속에서 핵전쟁의 위험이 점점 커지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도 미국이 한국에 핵 전력을 배치해 핵 경쟁을 자극하고 있다.
핵전쟁의 긴장이 커지고 있는 시기에 개봉했기 때문에 이 영화는 나름대로 시의성이 있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이 많이 생략돼 있어 핵무기가 등장하게 된 진정한 배경과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
영화의 메시지도 모호하다. 핵전쟁에 대한 오펜하이머의 공포를 표현하기는 하지만, 맨해튼 프로젝트와 히로시마 핵폭탄 투하가 필요하고 적절했는지에 대한 견해는 드러내지 않는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자신도 오펜하이머처럼 불온 인물로 찍히기 싫었던 것일까? 아니면 핵 폭발을 실제로 재연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던 걸까?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에서 과학 이야기를 즐겨 한다. 이 영화에서도 양자역학과 과학자들을 비중 있게 다룬다. 과학적 현상과 그 원리를 영상으로 만드는 데 많은 공을 들인다. 그런데 역사를 다루는 방식은 겉핥기에 가깝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이 진실의 전부라면 과학이 필요할까? 그가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과학적이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