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가 이 사회의 흉악한 일들을 분석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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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행위를 한 사람들은 흔히 그냥 ‘악마’인 것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사이먼 바스케터는 설명이 일절 불가능한 인간 행동이 있다고 봐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영국에서 신생아 7명을 살해해 최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연쇄 살인 간호사 루시 렛비나 전쟁처럼 더 거대한 규모의 잔혹 행위를 벌이는 자들은 그저 악마인 걸까? 끔찍하고 흉악한 행위들은 흔히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 행위들은 어쩌다 보니 어떤 악의 기운이 개인이나 온 세상에 씌워서 나온 것이라고들 한다. 이런 악귀가 여기저기 붙어 다니면서 연쇄 살인마가 생겨나고 전쟁으로 난리가 나고 대량 학살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끔찍한 일을 너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려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일을 분석해야 할 중대한 이유들이 있다.
예컨대 홀로코스트가 ‘다시는 되풀이돼선 안 된다’고 주장하고자 한다면, 그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끔찍한 행위들을 그저 모호한 ‘악’의 결과로 치부하면 이 체제가 그런 행위를 부추기고 정당화하는 현실을 가리게 된다. 체제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명심해야 할 점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체제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개인의 모든 행동을 완전히 설명하거나 거기에서 하나하나 의미를 이끌어 내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살인자가 왜 그 행위를 특정 방식으로 특정 시점에 했는지는 선정적인 다큐멘터리나 더 진지한 회고록, 피해자 연구에서 차고 넘치게 다룬다.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는 이렇게 썼다. “마르크스주의는 심지어 체스의 역사를 다룰 때에도 매우 훌륭하게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로 체스 두는 법을 배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학수사대(CSI) 마르크스주의를 홍보하는 말은 분명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로 한 사람이 특정 행동을 하도록 만든 원인, 환경, 선택 사이의 정확한 상호작용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그 행동의 맥락을 제시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자기 마음대로 만들지는 못한다.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환경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미 주어지고 과거에서 물려받은 환경 속에서 역사를 만든다.”
마르크스의 통찰은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상호작용하고 그 환경을 변화시킨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개인들이 의지를 자신이 처한 환경과 무관하게 관철시킬 수는 없다는 점도 지적한다.
대량 살해
대량 살인범들에 대한 최초의 만만찮은 연구는 1980년대에 사회학자 엘리엇 레이턴에 의해 이뤄졌다. 레이턴은 이렇게 주장했다. “살인범들은 천재가 아니다. 오히려 사악하고 화가 난 멍청이들이다.” 그러나 또한 레이턴은 사람들이 위협받는 계급적 입지를 지키려 하면서 대량 살인마가 생겨난다는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봉건 시대에는 대량 살해가 만연했는데, 이것은 영주와 왕이 농노 계급의 노동에 빌붙어 사는 극도로 불평등한 체제의 산물이었다.
반란의 시기에 영주들과 왕들은 살육으로 지배력을 각인시키려 했다. 이런 환경은 농노들을 먹잇감으로 삼은 대량 살인 귀족들을 만들어 냈다. 레이턴은 15세기 프랑스의 남작 질 드레의 사례를 든다.
그는 “적게는 141명, 많게는 800명의 농노 아이들을 살해했다. 그는 그가 속한 계급이 품은 광폭한 탄압 열망의 화신이었다.”
산업 시대로 넘어와서 레이턴은 이렇게 주장한다. “새롭게 부상한 부르주아지의 필요에 복무하기 위해 만들어진 계급에 속한 의사, 교사, 교수, 공무원 같은 중간계급 직능인들은 더 낮은 계급의 구성원들, 특히 매춘부나 하녀를 먹잇감으로 삼았다.”
물론 이런 설명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게다가 이런 역사 서술에는 허점도 있다.
현대에는 불안정한 노동계급 사이에서도 살인자들이 생겨나고, 이들이 많은 경우에는 차별받는 집단이나 약자들을 죽인다는 것을 레이턴은 간과했다. 트로츠키가 지적했듯이 ‘누가 아동보다 약하겠는가?’
그러나 사람이 그저 ‘미쳐서’, 또는 ‘사악해서’, 혹은 둘 다여서 끔찍한 일을 벌인다는 미디어와 사법적 접근에 비하면, 레이턴의 접근법은 더 현명한 출발점을 시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자연스럽게 적응하기는커녕, 자본주의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거나 무너진다. 자본주의 체제는 사람들을 아예 죽이기도 하고, 그러지 않는 경우에도 사람들의 신체적, 정신적 발전을 방해한다. 사람들의 지적 능력이 방치되고, 예술적 재능이 발견되지 않거나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다.
창의적이고 사회적으로 유용한 일을 하는 인간 고유의 능력은 상품으로 전락하고, 그 값어치는 오로지 자본가들이 지불하려 하는 만큼으로 정해진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말처럼 “시대의 오물” 속에 빠져 있다. 인종차별, 성차별, 동성애 혐오, 경쟁심, 순응하는 태도, 수동성, 불안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관념과 태도들은 자본가들이 대중을 분열시키고 약화시키며, 소수인 그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우리는 우리보다 더 ‘잘난 자’들의 결정과 쇼를 수동적으로 지켜보는 처지로 전락해 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삶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배운다.
우리는 사회, 더 나아가 역사가 위대한 개인들(주로 백인 남성이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사상을 쉴 새 없이 주입받는다. 그리고 ‘실패’는 개인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라고, 더 나쁘게는 그냥 원래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이라고 배운다.
그러나 예컨대, 성폭력은 여성을 혐오하는 남성의 본성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성폭력은 여성을 상품과 이등 시민으로 취급하며 성이 소외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환경과 선택
경제 위기와 차별, 빈곤, 실업은 어느 개인도 혼자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다.
폭력과 착취에 기반한 사회에서 사는 경험은 여러 결과를 낳는다. 개인들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자신이 직면한 갈등과 좌절에 대처하는 방식에도 커다란 영향을 준다.
트로츠키가 썼듯이 “비슷한(당연히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조건에서 겪는 비슷한 고통은 비슷한 반응을 낳는다. 고통이 강력할수록 개인의 특수성이 무의미해지는 시점도 앞당겨진다.
“간지럼을 태우면 사람들의 반응은 상이하다. 그러나 뜨겁게 달군 인두에는 비슷하게 반응한다. 증기 망치가 둥근 것이든 정육면체로 된 쇳덩이든 모두 얇은 철판으로 만들어 버리듯이, 너무나 강력하고 거스를 수 없는 사건들의 타격 속에서는 저항력이 무너지고 ‘개성’의 경계가 사라진다.”
사회 내의 분노와 착취, 소외는 사람들 사이에서 불화를 낳는다. 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는데, 모든 것이 긍정적인 건 아니다.
나쁜 일을 설명하려는 것은 그것을 정당화하자는 게 아니다. 사회에는 온갖 종류의 분열이 있어서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지배하고 차별하는 결과를 낳는다.
모든 군대는 판에 박은 듯이 움직이는 관료적 살인자들을 양성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 갖은 애를 써야 한다는 사실은 그런 일이 인간 본성이 아님을 보여 준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이 체제에 내재된 불변하는 특징이다. 그 대가로 전쟁이 일어나 사람들이 희생되고 이후에는 흔히 군인들 자신도 거기에 영향을 받는다.
사회가 서로 비슷한 선택을 하는 몇몇 개인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은 일이다. 그 체제를 존속시키려고 생겨난 기관들이 죽음과 파괴를 극대화하고 그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하도록 조직돼 있으니 말이다.
무엇을 악으로 볼 것이냐에 관한 지배 사상의 위선과 더불어, ‘선’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일련의 규칙들도 있다. 도덕적 관념들은 사회의 산물이다. 도덕적 관념들은 사회가 계속 기능하려면 인간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믿음을 강력하게 표현한다.
우리가 모두를 명백히 이롭게 하는 안정적이고 공정한 사회에 살고 있다면, 무엇이 ‘선’이냐는 물음에 답하기는 쉬울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선’이란 집단에 이로운 행동을 뜻할 것이다. 그러나 계급사회에서는 모순과 갈등 때문에 모순적인 ‘선’의 개념이 발전했다.
기존 사회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계급은 사회가 계속 굴러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에 관한 일련의 관념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도덕적 관념들을 사람들에게 강요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파하려는 가치를 사회 전체에 필요한 가치, 즉 그 자체로 옳은 절대적인 ‘선’으로 제시해야 한다. 예컨대, 기독교는 사람들이 “악하게” 태어났다고 가르친다.
이는 내세에서 사람들을 구원할 교회의 힘과 현세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국가의 힘, 둘 다를 정당화했다.
‘선한’ 행동에 대한 관념은 무엇이 지배계급에 이로운지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이런 도덕은 지배층 사람들은 제멋대로 해도 되지만 노동계급 사람들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으로 강요된다.
도덕의 모순
반면, 자신의 필요가 충족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계급, 그래서 사회를 다른 기초 위에 서도록 변화시키려 하는 계급은 도덕 관념에 대한 다른 해석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자본주의가 봉건주의를 대체하면서 도덕적 가치가 변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된 현재, 우리가 도달한 단계의 생산양식은 대다수를 착취하는 데 의존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인류 전체의 운명과 지구를 위협하고 있다.
그 결과, 공동체가 기능하지 못하게 하는 질서를 존속시키는 바로 그 도덕이, 되풀이되는 대규모 야만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국지적인 수준에서 재생산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어떤 기준으로 봐도 ‘악’이다. 반면, 이 체제에서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투쟁은 연대와 나눔 그리고 평등주의를 지향하는 관념들을 낳는다.
이것이 이 끔찍한 세상에서 빠져나올 발판이고 최소한의 좋은(그리고 ‘선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