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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란 무엇인가?

박근혜 치하에서 국가 기관들의 대선 개입 실태가 드러나고, 통합진보당 마녀사냥이 자행되고, 철도 파업에 정부가 초강경책으로 대응하는 것을 보면서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국가 기관들의 부패성과 억압성, 비민주성에 혀를 내두르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 국가가 지닌 본성을 우익 지도자들일수록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임을 보여 준다. 최일붕 노동자연대다함께 운영위원이 자본주의 국가의 본질을 살펴본다.

마르크스주의에서 ‘국가’에 관해 말할 때는 ‘나라 country’라는 통상적인 의미보다는 통치자들을 통틀어 가리키는 의미로 쓰인다. 곧, 대통령, 총리, 장관, 지방자치단체장들을 포함한 행정기관장, 국회의원, 고위 판·검사, 경찰 간부, 교도소장, 군장성, 공기업 사장, 공공 서비스(공공 의료·교육·교통) 기관장 등을 통칭하는 용어다.

그러므로 KBS 사장이나 MBC 사장, 한국은행 총재, 민영화됐어도 여전히 정부가 임명하는 KT 사장이나 포스코 사장, 서울대학교 총장 등 국립대학교 총장, 서울대병원장 등 국립대병원장 등도 포함한다. 그리고 지방의회 의원도 국가의 일부다.

이 사람들은 조직돼 있다. 그 조직들을 국가 기관 또는 국가 기구라고 한다.

이 조직은 철저하게 비민주적·권위주의적·비밀적·형식적인데다 그 기관장 개개인은 몰개성적이다.

그래서 국가는 해당 인물들을 통칭할 뿐 아니라 그들이 관리하는 기관들을 통칭하는 말로도 사용된다.

이 사람들 또는 이 기관들이 하는 활동의 원리와 방법과 규칙, 조직구조를 다룬 게 바로 헌법이다.(그러므로 심상정 정의당 의원께는 죄송하지만 노동계급 운동이 헌법을 고스란히 지켜야 할 이유는 없다.)

국가의 활동 방식이나 국가기관의 작동·운용 방식에 관한 갖가지 공식 설명들, 가령 국가 관료나 주류 언론이나 정치학·행정학·법학 교과서 등의 설명은 국가에 대한 이상화된 이미지일 뿐, 실제 현실과는 관계 없다.

현실은 뭔고 하니, 국가는 경제적 지배계급인 자본가 계급의 이해득실에 즉각 호의적으로 반응한다는 점이다.

국가와 자본의 상호 의존

국가가 자본가 계급의 이해득실에 즉각 호의적으로 반응하는 이유는 국가가 자본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경제 현상들, 가령 투자, 물가, 실업, 금리 등은 대기업들의 결정의 결과다. 이런 대기업들에는 사업의 범위가 한국에 국한된 기업뿐 아니라 한국을 포함해 여러 나라들에서 사업을 하는 다국적기업도 포함되고, 또 공기업이나 심지어 국립대학도 포함된다. 노동자들을 비롯한 보통 사람들의 바람은 사회에 별 영향을 못 미치는 반면 대자본가들의 결정은 큰 영향을 미친다. 이들이 생산적 자원을 지배하고 생산 체제를 지배하고 있어서 그들에게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의 결정에 가장 주된 영향을 미치는 건 단지 그들의 즉각적 이익뿐 아니라 무엇보다 수익성인데, 이와 연관된 쟁점들이 경제신문과 일간신문의 경제면을 도배하고, 정부 각료들의 뇌리를 사로잡는다.

국가기관장들은 자본가들의 분명하고 노골적인 메시지뿐 아니라, 간접적으로 경제지표들을 통해서도 자본가들의 필요를 읽어 낸다.

그들은 경제 성장이 둔화하고 실업이 증대하면, 자기들의 출세 전망이 흐려지고 자기들과 친한 정치인들의 선거 전망이 어두워지므로 재빨리 대응한다. 또, 공무원 봉급이 전부 세수입에서 나오고 세수입의 원천이 생산적 경제부문이므로, 국가 관리자들은 경제 성장을 촉진시키려 애쓰고, 특히 자본의 이윤율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국가가 자본에 의존하는 아마도 결정적인 이유는 국제적 국가체계 속에서 해당 국가의 위상이 그 국가와 연계된 자본들의 크기와 상당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폴 케네디에게는 죄송하지만, 정비례 관계는 아니다)

국가가 자본에 의존하듯이, 자본도 국가에 의존해 왔다. 국가는 기업 활동에 도움을 주고자 SOC(사회간접자본: 통신·수도·전력·가스·항만·도로·철도·공항 등)를 제공한다.

국가는 경제 행위의 규칙들을 법률로 확정하고 집행한다.

국가는 금리와 환율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 등을 통해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산업의 국제경쟁력을 높이려 애쓴다. 그런 정책에는 노동계급을 통제하는 노동정책도 포함된다.

기본적으로 국가는 다른 국가나 노동계급으로부터 자본을 보호한다. 그래서 국가의 활동은 기본적으로 탄압이다. 국가는 법·질서의 이름으로 경찰·군대·법원·감옥 등을 통해 폭력 행사를 독점한다. 그 법·질서는 자본가들의 법이고 자본가들의 질서다. 결국 사법제도라는 것은 폭력 사용에 의존하는 것이다. ‘공권력’의 이름으로 말이다.

군대는 다른 나라 지배계급으로부터 자국 지배계급을 지키는 일뿐 아니라 때때로 노동자 파업을 깨뜨리는 일에도 동원된다. 2010년 스페인에서 공항 관제사들이 파업했을 때 정부는 군대를 투입해 파업 투쟁을 진압했다. 지금 박근혜 정부가 철도 파업을 분쇄하기 위해 대체인력으로 군인들을 투입하고 있는 것도 본질적으로 똑같은 짓이다.

물론 군대는 광주 민주화 항쟁 같은 긴급사태에 대비한 비상대책을 갖고 있다. 그런 사전대책을 점검하기 위해 기무사가 사찰 활동을 한다. 가령 몇 달 전에 진보당 이상규 의원은 기무사가 국정원 및 검찰·경찰과 함께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정당들을 사찰했다고 폭로했다.

국가는 적절한 노동력을 자본가 계급에 공급하고자 보건정책·교육정책·복지정책을 시행한다. 교육은 기업이 원하는 노동력과 관리자를 양성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기술과 지식뿐 아니라 현실에 순응할 줄 알도록 하는 사상과 관념도 포함된다.

실업수당은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가 다시 노동시장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것이고, 연금은 노동자에게 노후보장을 해줘 그가 ‘능률적으로’(즉, 높은 착취율을 감수하며) 일하라는 취지로 제공되는 것이다. 그동안 수고했노라고 주는 보상 같은 게 아니다.

흔히들 정부와 재벌의 관계가 독재 정권 시절과 달라졌다고 하지만, 그 본질적 성격 — 이해관계를 같이한다는 — 은 달라지지 않았다. 어떤 정당이 집권하든 이는 마찬가지였고(김대중과 노무현 하에서 재벌 개혁이 완전히 실패한 것을 들 수 있음),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명한 말은 FTA와 비정규직 양산, 노동법 개악 등 자신의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정당화하려는 변명이었을 뿐이다.

‘[독재 정권 시절과 달리] 이제 자본이 국가보다 우위에 있다’는 일부 좌파들의 주장도 여전히 강력한 국가의 역할과 자본의 국가 의존도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세계화 속에서 국가와 자본의 상호 의존

국가와 자본의 상호 의존 때문에 자본주의 하에서 “경제 민주화”는 공상이다. ⓒ사진 출처 청와대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국가의 권력이 약화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국가의 ‘자율성’(이 말 앞에 ‘상대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긴 하지만 큰 차이는 없다)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국가와 자본의 이해관계의 차이를 강조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듯이 둘의 이해관계는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물론 ‘기본적으로’라고 함은 제한적인 경우에 둘의 이해관계가 다를 수 있음을 필자가 인정한다는 뜻이다. 나치가 티센의 기업을 몰수해 헤르만 괴링 공장을 세운 일, 아르헨티나의 제1차 페론 정부(1946-55)가 농업 자본가들의 독점 이윤을 몰수해 공업 분야 국영기업들 쪽으로 돌려쓴 일, 이집트의 나세르와 시리아의 바트당이 대자본을 몰수해 국유화한 일,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동유럽의 공산당들이 전면적 국유화를 단행한 일 등이 국가의 ‘자율성’ 사례로 언급된다.

하지만 이 사례들을 언급한 크리스 하먼 자신이 강조하듯이 이런 경우는 그다지 흔하지 않거니와, 그나마 자본에게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 자본주의적 착취와 축적이 이뤄지는 한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개별 자본이 국가의 이익을 거슬러 행동하는 정도에도 한계가 있다. 물론 세계화는 국가와 자본의 상호작용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 영향이라는 게 국가와 자본 사이를 단절케 해 자본이 자기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대로 가게 해 주는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금융자본은 세계를 하루에도 몇 바퀴씩 돌고도 남지만, 산업자본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산업자본은 기동성이 비할 데 없이 훨씬 작다. 산업 기업은 사업 지역을 옮기려면 막대한 비용을 들여야 한다. 공장부지, 건물, 설비 장착, 노동자나 기술자의 기술 훈련 등에 드는 비용은 적은 액수가 아니다. 또한 원료나 완제품 운송 면에서 수익성에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기업은 (다국적기업조차) 자기가 활동하는 곳의 국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SOC 상태도 중요하고, 마케팅이나 금융 환경도 좋아야 한다. 무엇보다 노동계급을 비롯한 아래로부터의 도전을 그곳의 국가가 막아 줘야 하고, 경쟁 자본가들이 영향을 미치는 다른 국가가 사업을 방해하지 못하게도 막아 줘야 한다.

게다가 자기를 뒷받침해 주는 국가가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어 그걸 이용해 다른 국가에 경제적 압박을 가할 수 있다면 그건 자본에게 황금 같은 사업 기회를 제공해 준다. 미국의 국가가 자신과 연계된 자본가 계급을 위해 IMF(국제통화기금)나 WTO(세계무역기구) 등을 통해, 또는 이라크 전쟁 등을 통해 하는 일이 이런 사례다.

그러므로 자본은 국가의 규제를 피해 이 국가에서 저 국가로 그저 훨훨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싶기는커녕 오히려 국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로 국가와 자본의 연계가 끊어진 게 아니다. 자본은 국가와의 연계를 끊는 게 아니라, 연계를 맺는 국가의 수를 늘리는 것이다. 자본은 전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의존하면서도 전과 달리 국가 밖으로 진출해, 다른 국가와 연계된 다른 자본들과 연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른 소위 규제 폐지라는 것은 대개 규제 개편이라고 불려야 맞다. 다시 말해, 국가의 자본 축적 촉진 수단이 변모하게 됐다는 게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구조적’ 상호 의존

지금까지 보았듯이, 국가와 자본의 관계는 공생 관계다. 그런 공생 관계 속에서 존속해 오는 가운데 국가 기관들에는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들이 구석구석 배어들었다. 이처럼 국가와 자본이 서로 상대방의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두고 영국 마르크스주의자 크리스 하먼은 둘의 ‘구조적 상호 의존’이라고 불렀다.

사기업처럼 국가도 엄격한 위계제로 운용된다. 아래에는 노동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임금을 받아야만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 또, 노동 과정에 대한 통제력도 없고, 아무런 인적 자원이나 무생물 자원을 지배하지 못한다.

국가 기관의 상층에는 국가 관료 또는 중견 정치인이 자리 잡고 있어, 자산과 직원을 사용하고 배치한다. 이 관료 또는 정치관료(공직선거로 선출된 경우)는 사기업의 CEO가 민간부문의 생산관계 속에서 하는 역할과 똑같은 역할을 국가 기관 내에서 수행한다.

그리고 이들은 생산적 자원에 대한 지배 문제나 조직 관리의 권위 문제 등에서 민간 자본가들과 이해관계를 같이한다.

국가 관리자들도 사기업 경영자들처럼 생산성 증가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피고용인들에게 되도록 적게 주고 되도록 많이 뽑아내려 한다. 이 같은 착취율 제고를 위해 1970년대 말 이후로 국가는 법인화·민영화·아웃소싱 따위를 밀어붙인다.

그러므로 국가를 경영하는 지배계급 부분은 민간 부문을 경영하는 나머지 지배계급 부분과 체제 유지에 이해관계가 같다.

자본으로서의 국가(국가 즉 자본)

생산수단의 국유화라는 사실만을 이유로 국가 부문의 생산을 모두 비생산적 노동이라고 규정한다면 오류일 것이다. 국가는 일종의 자본가일 수 있고, 그것도 생산적 자본가일 수 있다. 물론 이 경우 국가는 특별한 종류의 자본가로, 그 자본가적 성격은 국가라는 형태로 위장된다.

이를 두고 레닌과 부하린은 국가독점자본주의 또는 단순히 국가자본주의라고 불렀다. 토니 클리프가 창시자인 국제사회주의경향IST은 후자의 용어를 선호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인 각국 공산당이 민중전선(계급을 초월한 국민적 연합)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놓은 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과 혼동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국가자본주의는 단지 옛 소련 블록과 현 북한 같은 국가들에만 해당하는 현상이 아니다. 서방 세계에도 해당하는 현상이다. 서방 각국 경제의 적어도 3분의 1이 국영 산업들이기 때문이다. 이 부문은 체제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데이비드 하비 같은 탁월한 마르크스주의자도 이렇게 오해한다), 체제의 구성 요소이다.

게다가 전에 국영기업이었다가 민영화된 기업들도 사실상 국가의 통제를 받는다. 가령 포항제철과 한국통신은 민영화돼 각각 포스코와 KT로 이름을 바꿨지만, 여전히 정부가 사장을 임명하고 정부는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두 기업의 사업을 돕는다.

국가를 자본이 축적 순환 속에서 거쳐야 할 하나의 필수적 국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국가자본주의를 말할 수 있다. 금융 기업이나 상업 기업처럼 국가도 자본주의적 생산의 지속을 위해 필수적이다. 생산적 자본이 잉여 가치를 창조하는 반면 상업 자본은 유통과 판매를 통해 잉여 가치의 실현에 관여한다. 이 기능 덕분에 상업 자본가는 상업 이윤의 형태로 잉여 가치의 일부를 자기 몫으로 떼어 받는다. 은행들은 주로 자본가 계급 내에서 잉여 가치를 재분배하고 자기 몫으로 이자를 떼어 받는다. 국가는 자본 축적의 전반적인 조건들을 마련하고 그 조건들을 보호하는 구실을 한다. 그 대가로 국가의 관리자들은 자본가 계급이 노동계급으로부터 추출한 잉여가치의 일부를 (봉급, 금융 자산, 부동산 자산, 뇌물 등의 형태로) 떼어 받는다.

이처럼 자본의 재생산을 확보하는 구실 때문에, 국가를 지배하는 지배계급 부분은 민간 부문을 지배하는 나머지 지배계급 부분과 긴밀하게 접촉한다. 더욱이 그들은 배경이 비슷하고, 학교, 교회, 대학, 동아리, 봉사 활동 등에서 만나 인맥을 형성한다. 민간 기업과 국가 기관 사이에 인사 교류도 있다. 장관 하다가 기업 CEO나 컨설턴트로 가거나 그 반대 케이스도 있다. 이런 교류와 접촉 과정에서 민간과 국가, 양대 지배계급 부분은 자본주의적 지배계급으로서 기본적으로 공통의 세계관을 공유한다.

국가자본주의론은 중요하다. 이 이론이 함축하는 가장 중요한 실천적 결론은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또한 전쟁이 오늘날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점이다.

특히, 주변 강대국들인 미국·일본과 중국 사이에 제국주의 간 갈등이 점점 악화돼 가고 있는데다, 설상가상으로 북한이라는 스탈린주의 국가가 같은 민족 안에 포함돼 있는 남한에서 활동하는 마르크스주의자에게 국가자본주의론은 정말 중요하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하에서는 착취가 숨겨져 있으므로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법적 지위와 권리가 같아도 체제가 돌아갈 수 있다(‘법 앞의 평등’). 경제력이 아무리 격차가 나도 우리 모두는 평등한 시민이다. 자본가도 노동자도 남의 지갑을 훔치다 걸리면 불법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법적 권리가 같다는 건 법전에 씌어져 있는 얘기일 뿐이지, 현실이 정말 그런 것은 아니다. 현실은 “유전무죄 무전유죄”인 것이다. 형법뿐 아니라 민법도 계급 차별적으로 적용된다. 그래서 노동자와 서민은 보험회사를 상대로 소송해선 좀체 이기지 못한다.

국가의 실제 존재 이유는 재산권 집행이고, 재산은 대개 자본가들과 국가 관료들이 소유하고 관리하고 있고, 그 덕분에 그들에게는 권력이 있다. 법과 사법제도는 본질적으로 자본가 계급의 재산을 지키는 것이 핵심 기능이다.

언론·출판의 자유가 있지만, 부유층이 아닌 보통 사람들에게 신문·방송에 대한 접근성은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필자가 지금 쓰고 있는 것과 같은 글을 도대체 어느 기성 언론이 실어 주려 하겠는가.

경제적 불평등 때문에 기성 정당들도 대개 부자들의 환심을 사려 한다. 주로 정치 자금 때문이다. 기성 정당들은 서로 고함을 치고 싸우지만 그들은 사회의 극소수가 대부분의 생산적 자원을 지배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자본주의 국가는 대중의 정치적 수동성을 조장하고, 노동자는 일에 지쳐 피곤하고 시간이 갈수록 정치적 관심도 무뎌진다. 우리는 몇 년마다 한 번씩 투표하는 동안에만, 그래서 평생 몇십 분간만 민주주의를 누릴 뿐이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시간을 정치인들이 배신하는 꼴을 그저 두고 봐야만 한다.

그나마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하의 민주적 의사 결정은 의회 같은 대의기구에 국한돼 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직장 앞에서 멈춘다. 우리가 사장을, 관리자를 뽑을 수 있는가? 기업과 정부 부서 내에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가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 국가를 노동계급에 이익이 되도록 사용할 수 없다. 개혁주의 지도자들께는 죄송하지만 말이다. 국가 기관은 의회 선거처럼 보잘것없고 결함 있는 민주주의조차 없이 철저히 비민주적이다. 국가 기관장은 거의 다 선출되지 않는다. 국정원장, 법무장관, 검찰총장, 경찰청장, 국세청장, 금융감독원장, 감사원장, 국방부 장관, 외교부 장관 등은 물론이고 보건복지부 장관, 교육부 장관, 노동부 장관, 지법·고법·대법·헌재의 수장들, 공기업 사장들은 결코 선출되지 않는다.

그런데 대다수 국회의원들보다 바로 이런 기관들이 노동계급의 삶에 비할 데 없이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이들은 법률을 해석하거나 적용하고, 규칙을 만들고, 임금 인상 상한선을 설정하고, 물가나 월세에 영향을 미친다.

혹시 진보 인사가 공직자로 선출돼도 취임 직후부터 그의 측근에 포진한 고위 관료들이 그를 감언이설로 속여, 결국 그의 처음 개혁안을 누더기로 만들거나 알량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이러한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제한된 민주주의에조차 굶주려 있다. 국가보안법으로 사상 표현의 자유를 제약받는 우리 나라 좌파의 많은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21세기 초 현재,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국가 형태인 나라는 전 세계 나라들의 절반 미만이다! 근대 민주주의의 싹이 튼 게 부르주아 혁명들인 미국 혁명(1776)과 프랑스 대혁명(1789)이므로, 그동안 2백몇십 년이 지났는데도 사정이 이렇다.

19세기 중엽 이후 지금까지 민주주의를 결정적으로 증진시킨 건 노동계급 운동과 조직이었다. 가령 1867년 영국에서 도시 숙련 노동자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한 제2차 선거법 개혁은 노동운동의 투쟁성에 대한 대응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자신이 제1인터내셔널 활동을 통해 여기에 크게 기여했다.

물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하에서는 결국 자본가 계급이 정치를 지배하게 될 것이므로 진정한 민주주의는 노동자 민주주의(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용어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만 가능하다는 분명한 단서를 붙였다. 특히 1871년 파리 코뮌을 겪으면서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이 기존 국가를 인수해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없고, 오직 노동자 권력으로써 기존 국가를 분쇄하고 노동자 민주주의로 대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트로츠키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라는 국가 형태의 사회적 내용이 실은 노동자 투쟁과 조직(노동조합, 노동자 정당, 작업장위원회 등)이라고 강조하면서, 이를 통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사회적 내용이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조직이라는 트로츠키의 강조(마르크스의 이론과 실천이기도 하다)는 매우 중요하다. 특히, 박근혜의 진보당 마녀사냥 등 매카시즘과 매우 억압적인 통치 스타일을 물리치거나 적어도 그 효과를 감소시킬 유일한 방법임을 시사한다.

그람시는 국가가 동의와 강제를 혼합해 헤게모니(주도력, 지배력)를 행사한다고 지적했다. 동의와 관련된 시민사회의 여러 형태들 가운데 오늘날 교회·학교·정당·지방의회 등은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지만 매스미디어는 그렇지 않다. 동의는 흔히 두려움을 이용하고, 이를 통해 국가 탄압을 정당화한다. 박근혜 정부가 북한의 ‘위협’, ‘종북세력’의 내란음모, 흉악범죄 등을 한껏 부풀려 국가보안법과 형법 내란죄 조항들, 노조 탄압, 법질서 등을 강요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동의와 강제를 얼마만큼의 상대적 비중으로 혼합하느냐는 다음 네 가지 조건에 달려 있다: (1) 경제의 상태, (2) 지정학적 환경, (3) 국가의 내적 응집력, (4) 노동계급의 자신감과 조직화 수준.

이를 바탕으로 박근혜 치하 국가 탄압의 수준을 전망해 보면 이렇다:

(1) 세계경제의 상태: 별로 좋지 않고 가까운 장래에 회복될 전망도 거의 없다. 그래서 세계 여러 국가들이 비민주적 수단들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고 있고, 허용했던 권리도 도로 뺏고 있다. 미국에서 오큐파이(점거) 운동이 결국 혹심한 탄압을 받게 된 것, 2011년 영국에서 거의 소요 사태에 가까운 항의 운동이 일어난 뒤 집회·시위 권리들이 크게 침해받고 있는 것 등을 사례로 들 수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이명박에 이어 좀더 강경한 우익인 박근혜 정부가 노동계급에 대한 파상 공세를 시작하고 있다.

(2)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상황: 간간이 화해 제스처들이 끼어들겠지만, 장기적으로 악화될 것 같다. 한국의 우익은 지난 대선에서 총단결해 박근혜를 밀었을 때 신자유주의적 공격을 위한 발톱은 감춘 채, 주로 지정학적 환경에 의해 악화된 남북관계를 명분으로(특히 NLL 논란을 통해) 집권당과 다양한 국가기관들이 나서서 대선에 개입하는 부정·부패를 자행했다.

(3) 국가의 내적 응집력: 앞에서 우리는 국가와 자본의 구조적 상호 의존 관계를 살펴봤다. 그런데 자본은 노동 착취와 탄압 문제에선 하나의 단일체처럼 운동하지만, 개개의 자본들은 서로 맹렬하게 경쟁한다. 그래서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이 국가 내로 반영돼, 국가는 거의 상시적으로 내분하는 경향이 있다. 상이한 국가 기관이 상이한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노동계급 투쟁에 대한 대처 방법 문제와 한반도 주변 정세에 대한 대처 방법 문제를 놓고 통치자들이 때때로 서로 매우 날카롭게 충돌할 수 있다. 최근 사례들로 전교조에 유리했던 법원 판결, 채동욱·윤석열을 둘러싼 갈등, 최근 집권당 내의 중진 국회의원들인 이재오와 정몽준이 박근혜 정부를 비판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국가 내 갈등의 정도는 자본의 권력과 이윤의 장기적 안정성이 위협받는 수준을 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국가의 이런 내분 덕분에, 천대받는 사회집단들, 특히 노동계급이 아래로부터 도전을 제기할 자신이 생길 수 있다.

(4) 노동계급의 자신감·조직화 수준: 지금 벌어지는 철도 파업은 특히 다음 일들을 원인으로 해서 벌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①경제 위기, ②지정학적 위기, ③박근혜 집권 후에도 주눅들지 않고 일어난 노동자들의 저항(진주의료원, 전교조, 현대차, 삼성전자서비스, 학교비정규직 등), ④부패 행위인 국가기관들의 대선 개입과 박근혜 대선 공약 파기를 둘러싸고 생겨난 예리한 국가 균열.

하지만 철도 민영화 반대 운동의 경우, 1년반 전부터 철도노조 투사들과 활동가들이 좌파단체 활동가들과 꾸준히 공동 활동을 해오며 자신감과 조직을 건설해 온 것이 박근혜와의 정면 충돌에도 견디고 저항하는 남다른 능력을 부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결론을 맺자면: 요컨대 박근혜 하에서 때로는 드러나지 않고 수면 아래서, 때로는 두드러지게 드러날 국가 내 균열을 이용해 조직 노동계급 내부에서 투쟁과 조직을 굳건히 건설하는 것만이 박근혜 통치의 효과를 상쇄하고 정치적 공간을 (바라건대 활짝) 여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그 길로 안내할 길라잡이는 운동의 일반적 분출 전 시기에는 오직 단단히 조직되고 집중된 혁명가 조직뿐이다. 물론 그 혁명가 조직은 다른 노동계급 정치 단체들과, 또 차별 반대 운동 단체들과 함께 공동전선을 구축해 대중 운동을 건설할 줄도 알아야 한다.

더 읽을거리

‘오늘날 국가와 자본주의’ 《자본주의 국가 ─ 마르크스주의의 관점》

크리스 하먼, 알렉스 캘리니코스 외 지음, 최일붕 엮음, 책갈피, 2005
29~107쪽에 실림

국제주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

《자본주의 발전과 민주주의》

디트리히 뤼시마이어 지음
나남출판, 1997

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