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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국가는(물론 문재인 정부도 윤석열 정부도) 디지털 성범죄를 해결하지 못한다

9월 21일 서울 혜화역에 딥페이크 성범죄에 분노한 여성 5000명이 모였다. 참가자 다수는 20~30대 여성이었다. 2018년 혜화역에서 불법촬영 항의 시위(“불편한 용기”)가 벌어진 지 6년 만이다.

이들은 “[6년 동안] 피해는 점차 확대되고 있지만 법과 제도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 심지어 후퇴하고 있다”며, 경찰, 법원, 국회,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 디지털 성범죄를 방치한 국가 기관들을 강도 높게 규탄했다.(관련 기사: 딥페이크 성범죄에 분노한 여성들 수천 명이 서울 혜화역에 모이다)

거리로 나온 여성들(대부분이 노동계급 등 서민층)이 국가 기관들을 규탄해 대규모 대중 행동을 벌이고, 현실을 바꾸려고 시도하는 것은 실로 고무적인 일이다.

디지털 성범죄를 방치한 국가에 항의하는 대규모 여성들의 운동(왼 2018년, 오른 2024년) ⓒ이미진

디지털 성범죄는 일단 한 번 유포되면 언제 어디까지 퍼질지 알 수 없고 무한 재생될 수 있어 피해자는 큰 불안과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피해 회복은 … 어쩌면 평생 이루어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이미 제 신상 정보와 사진, 허위영상물 등은 불특정 다수에게 유포되었고, 저는 3년 넘게 흐른 지금까지도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고통받고 있으며, … 수많은 가해자들이 어디서 어떻게 피해물을 이용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를 떠안고 살아가야만 합니다.”(서울대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자 법정 진술문, 〈한겨레〉에서 재인용)

디지털 성범죄는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기술이 발전할수록 일상 속으로 깊이 파고들고 있다. 딥페이크 기술이 상용화돼, 이제 소셜 미디어에 올린 사진 하나만으로도 피해자가 될 수 있게 됐다.

설사 그 시작이 10대 남성 또래집단의 객기에서 비롯한 장난이었을지라도 그 피해는 그들이 책임질 수 없는 수준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만큼 10대 가해자를 엄벌주의로 다스리는 것은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다. 물론 그 반대로 이 문제를 작은 것으로 축소해서도 안 된다.

학업 성취나 교내외 활동 등에서 남성에게 뒤지지 않고 동등한 기대 속에서 자란 오늘날 청년 여성들이 여성의 몸을 한낱 노리개로 여기는 현실에 크게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국가는 이 문제를 소홀히 여기며 방치해 왔다.

2010년대부터 디지털 성범죄가 사회적 문제로 다뤄지기 시작한 것도 여성들의 항의 덕분이었다. 특히, 수사에 미온적인 경찰이 지탄의 대상이었다.

2015년 ‘소라넷 폐지 운동’을 주도한 여성들은 ‘서버가 해외에 있다’는 이유로 수사하지 않는 경찰의 행태에 분노해 경찰을 “한남캅(COP)“이라고 조롱했다. 연인원 35만 명이 참가한 2018년 불법촬영 항의 운동도 여성의 피해에 대한 경찰의 미온적인 수사로 촉발됐다.

그런데 2024년에도 여성들은 똑같은 일을 경험하고 있다. 서울대와 인하대의 딥페이크 사건에 대해 경찰은 ‘텔레그램 서버가 해외에 있다’는 이유로 수사를 거부했다. 결국 피해자들이 직접 조사와 증거 수집에 나서고 나서야 가해자를 검거할 수 있었다. 디지털 성범죄의 기소율은 50퍼센트가 안 된다.

혜화역에서 수천 명이 “텔레그램 / 해외서버 / 못 잡는다 / 핑계 마라, / 못 잡는 게 /아니라 / 안 잡는 거 / 다 들켰다”(공식 구호) 하고 외친 이유다.

무신경, 무책임

수사기관만이 문제가 아니다. 지난 5년간 디지털 성범죄 피해물 삭제 요청은 93만 건이었는데, 이 중 26만 건(약 30퍼센트)은 삭제되지 않았다. 김여진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는 한 토론회에서 “[삭제 지원이 되는] 구성요건에서 피해자들의 피해 경험이 탈락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성적’인 신체 부위가 덜 노출돼 있다거나, 피해자 자신이 인터넷 방송을 한 것에서 비롯한 피해물이라는 이유로 탈락된다고 한다.

피해자 상담과 피해물 삭제 지원을 하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의 재정난과 인력난도 수년째 개선되지 않고 있다. 피해 접수는 급증하는 데 반해 지원센터의 인력은 3년째 39명이다(그중 40퍼센트가 기간제 비정규직이다). 정부가 여기에 예산을 지원하지 않아서다.

‘디지털 성범죄 특화상담소’의 사정도 마찬가지인데, 전국 14곳의 상담원은 겨우 28명이다. 상담원들은 “피해자를 모두 지원하기엔 한계가 있다,” “피해자들을 섬세하게 챙기기 어렵다” 하고 호소한다.

이처럼 무신경하고 무책임한 경찰의 태도와 정부의 인색한 피해자 지원은 우파 정부만 그런 게 아니다. 민주당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예산을 심의·확정하는 국회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국가기구의 본질에서 비롯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국가(경찰은 평상시 가장 중요한 일부다)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극소수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절대 중시하고 자본주의 시스템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국가의 위상은 그 국가와 연계된 자본들의 규모와 영향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자본가 계급의 이해득실에는 즉각 호의적으로 반응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요구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래서 경찰 등 국가 기관은 보통의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차별과 성적 피해에 대해 무신경하다. 특별한 압력이 없다면 그런 일들은 귀찮은 업무 중 하나로 취급되기 일쑤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에 들이는 돈은 그토록 아까워하면서 법인세 약 14조 원, 종합부동산세 약 6조 원은 턱턱 감면해 주는 걸 보라.

이번에도 정부는 딥페이크 성범죄로 혹여라도 인공지능(AI) 기술에 대한 규제 요구가 높아질까 우려한다. 규제가 AI 산업 촉진을 방해할까 봐서다.(현재 국회에는 AI 산업 활성화에 방점이 있는 AI기본법이 발의돼 있다.)

디지털 성범죄는 여성이 차별받는 현실의 한 역겨운 증상이다. 그런데 자본가 계급은 여성 차별을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를 갖는다. 기본적으로 여성 차별은 노동력 재생산을 개별 가족(주로 그 안의 여성)에게 떠넘기는 것에서 비롯한다. 가족제도는 자본가 계급에게 엄청난 경제적·이데올로기적 이득을 준다.

자본주의 국가기구의 수장들이 여성으로 바뀐다고 하더라도 그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제는 더 많은 여성을 정치인이나 국가 관료에 올리는 일에 힘쓸 게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그 국가를 포함함)을 겨냥하는 진정으로 급진적인 운동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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