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의 권리와 여성의 권리는 대립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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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선 트랜스젠더들이 자기 선택만으로 성별 변경을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 개정안을 놓고 트랜스젠더 권리와 여성차별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이 다시 불붙고 있다. 국내에 널리 알려진 책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의 저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도 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8월 22일 화요일 이른 새벽,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트랜스젠더 여성이자 세 자녀의 엄마인 키위 헤링이 경찰에 사살됐다. 키위 헤링이 이웃을 칼로 찔렀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의 한 명이 키위 헤링과의 언쟁 중에
그 다음 날, 키위 헤링의 지지자 약 100명이 숨진 그녀를 기리는 추도회를 열고, 교차로를 막고 길거리를 행진했다. 그러던 중 한 남자가 시위대를 향해 차를 돌진해 세 명을 치었다. 다행히 그 누구도 심각하게 다치진 않았다. 한 목격자에 따르면 운전자는 사람들을 향해 돌진하면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고 한다.
키위 헤링을 포함해 올해 들어 적어도 트랜스젠더 18명이 살해당했다. 살해당한 트랜스젠더의 다수는 키위 헤링처럼 흑인 여성이다. 키위 헤링의 가족들은 트랜스젠더 혐오자인 한 이웃이 상당한 기간 동안 그녀를 괴롭혔다고 진술했다.
내가 서두에서 키위 헤링의 사례를 소개하는 이유는 트랜스젠더의 권리에 관한 어떤 토론이든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차별의 실상을 아는 것에서 출발하는 게 정말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앞서 서술한 사건들은 인종차별과 트랜스젠더 혐오가 체계적으로 짜여 있고, 편견에 찌든 개인과 국가의 손을 빌려 트랜스젠더에게 위해를 가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다. 또한 트랜스젠더들과 그 지지자들이 이런 현실에 그저 침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오늘날 트랜스젠더 혐오는 만연하다. 2016년
최근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트랜스젠더의 입대를 금지하겠다며 트랜스젠더 혐오자들에게 힘을 보태줬다. 그는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다시 한 번, 트랜스젠더들은
차별에 저항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현실의 트랜스젠더 혐오가 끔찍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트랜스젠더들의 삶을 개선하는 변화를 지지해야 한다.
지난 몇 년간 트랜스젠더 운동이 부상하면서 몇몇 쟁점이 정치적 의제가 됐고 법률뿐 아니라 성별에 관한 용어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는 젠더
핵심 논쟁 중 하나는 영국에서 2004년 제정된 성별인정법
반대
올여름, 〈모닝스타〉가 영국교원노조
이는 그동안 주로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제기해 온 주장, 즉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인정하면 여성 권리가 침해되거나 심지어 여성의 안전까지도 위협받는다고 묘사하는 일련의 비슷한 주장들에 동조하는 것이다.
중요하게 지적해야 할 사실이 있다. 올해 상반기 교원노조 대의원대회에서 이 논쟁이 벌어졌을 때 대의원들이 성별 자기 결정권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는 것이다.
성별인정법은 2004년에 통과될 때 비교적 진보적인 법이었다. 트랜스젠더들이 성 전환 수술을 거치지 않고도 자신이 원하는 성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는 중요한 조처였다. 어떤 트랜스젠더들은

그럼에도 기존 법은 매우 큰 한계가 있다. 성별 인정 증명서를 받으려면
2년이라는 유예 기간 때문에 아직 자신의 성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트랜스젠더 여성 중 특히 징역형을 받는 이들은 남성 교도소에 수감되면서 심각한 공격이나 강간, 괴롭힘에 시달려 왔고 종종 죽음에 이르렀다. 2년간의 유예 기간 탓에 트랜스젠더들은 각종 서비스들에 접근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자신이 원하는 성별로 인정받으려면 각종 장애물을 통과해야 한다.
올가을에 논의될 성별인정법 개정안은 성별 인정 증명서를 원할 경우 각종 진단이나 심사위원의 승인을 받을 필요 없이 자신의 선언만으로 가능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미 덴마크나 아일랜드에서 통과된 수준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이 개정안을 균형감 있게 보자. 성별인정법 개정안은 트랜스젠더 혐오를
그러므로 성별인정법 개정안을 지지해야 한다.
불행히도, 몇몇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과 좌파와 노동조합 운동의 일부는 이런 관점으로 문제를 바라보지 않는다. 예컨대, 키리 텅스는 기고문에서 성별 자기 결정권이
내가 여러 번 들은 반론이 있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이언 헌틀리
성별 이분법 고착화?
오스트레일리아에 기반을 둔 학자인 실라 제프리스는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성별인정법이 2004년 처음 도입될 때부터 반대해 왔다. 2008년에 쓴 글에서 그는 성별인정법이 젠더 규범을 법률에 고착화시키고 젠더
이 두 주장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성별인정법이 오직 두 성별 ― 남성과 여성 ― 만 허용하고 모든 개인은 이거 아니면 저거로 자신을 규정해야 하기 때문에, 넌바이너리
젠더가 사라진 사회를 지향한다는 이유로 현재의 젠더 다양성을 부정하는 것은 마치 임금 제도 자체의 철폐를 지향한다는 이유로 현재의 임금 인상 투쟁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둘째, 성별인정법이 생물학적 성과 젠더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는 제프리스의 지적은 옳다. 그러나 이는 성별인정법의 장점이다. 그 덕분에 성 전환 수술을 원하지 않거나 받을 수 없는 사람들도 법률상 성별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트랜스젠더 여성은 〈뉴스테이츠먼〉에 글을 기고해 이를 반대하며, 오직
그러나 최근 몇 년간 더 가시화된 트랜스젠더들을 보면, 자신이 태어난 몸이 어떠하든 자신이 원하는 젠더로 살아갈 수 있다고 느끼는 트랜스젠더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몇몇 페미니스트들은 한 개인을
남자아이로 자란 사람은 여자아이로 자란 사람과 당연히 경험이 다를 테지만 그걸 어느 정도로 중시해야 할까? 인도의 여자아이는 스웨덴의 여자아이와 경험한 것이 같지 않을 것이다. 가난하게 자란 남자아이는
핵심은 트랜스젠더에게 그들이 누구인지 말해 주는 게 국가의 일이 아니라는 것, 노동조합 혹은 여성운동의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스스로 가져야 한다는 것은 여성운동의 핵심 요구였다. 그 자율성을 트랜스젠더들이 자신을 규정할 권리에도 마땅히 동등하게 적용해야 하는 것 아닐까?
섹스와 젠더
일부 트랜스젠더 이론가들은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반박하며 생물학적 성이란 개념이 실제로 얼마나 안정적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무엇보다 사람들 사이에는 단순히 두 종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생물학적 특징은 20만 년 동안 변하지 않았는데 여성은 그 대부분의 시간 동안 차별받는 집단이 아니었다. 여성차별은 지난 1만 년 동안 계급 사회가 자리잡은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계급 사회는 사유재산
그리고 지난 수천 년 동안 젠더는 여러 방식으로 통제됐다. 그래서 중세 유럽에서는 크로스드레싱
남성, 여성 그리고 아동의 위계 서열을 전제로 하고 그 외의 일탈을 용납하지 않는 경직된 부르주아 가족 개념은 19세기 영국에서 도입됐다. 당시 영국 지배계급은 순종적이고 건강하고 교육받은 노동자를 원하지만 그 비용을 지불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 여성이 가정 내에서 무상으로 일하도록 했다. 여성들은 유순하고 타인을 배려하고 집에 있는 걸 좋아하고 감정적이어야 하는 반면, 남성들은 강하고 외향적이고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런 가족 형태는 특정한 사회적 윤리를 동반했다. 그에 따르면 동성애 등 젠더 규정에 맞지 않는 다양한
따라서 트랜스젠더 차별과 여성차별은 서로 상극이긴커녕 동일한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한 것이고 우리는 모두 함께 그 뿌리에 도전해야 한다. 파괴적으로 강요되는 성 역할을 극복하고, 더 부담 없이 의료 제도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각자의 몸에 대한 자율성을 쟁취하는 것 등은 우리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다.
노동조합 운동은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자신의 해방 운동의 중요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논쟁이 필요한 곳에선 논쟁을 해야 한다. 이는 다른 많은 운동들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것이다.
트랜스젠더를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나 이 문제에 잘못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발언권을 아예 빼앗기보단 그들의 주장을 논박하고 도전해야 한다. 논쟁에 건설적으로 참여하길 거부하는 사람들은 운동에 해악을 끼치는 것이다.
단 1명이 공격받을지라도 우리 모두가 공격받는 것이다. 억압받는 한 집단이 전진하면 모두의 투쟁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트랜스젠더의 권리가 여성에게 피해를 준다는 주장은 증거가 없다. 반면 트랜스젠더들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해 피해를 입는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