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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에서 ‘성별 정체성’ 제외하자는 일부 분리주의 페미니스트들

트랜스젠더를 배척하는 일부 분리주의 페미니스트들이 ‘WHRC(여성인권캠페인) 한국지부’를 만들고, 차별금지법에서 ‘성별 정체성’을 제외하라는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

8월 21일에는 온라인에서 “차별금지법 성별정체성 항목 포함에 반대하는 여성 총궐기”라는 거창한 이름의 모임을 개최한다. 여기에는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입학 반대 활동가”도 발제자 중 하나로 참가한다.

WHRC는 실라 제프리스 등 트랜스젠더를 배척하는 페미니스트들이 2019년에 만든 단체로, “‘성별 정체성’ 혹은 ‘젠더 정체성’이 각국 법안과 국제 규약에 포함되어 여성 인권을 위협하는 사태에 대항하는 국제적인 여성운동 조직”임을 표방한다.

이들은 차별금지법에 ‘성별 정체성’이 포함되면 “여성 전용 공간과 서비스, 그리고 스포츠를 지키려는 시도가 ‘차별 행위’로 인식”되고, “해로운 호르몬 처치 및 ‘성전환’ 수술이라는 신체 훼손을 받게끔 유도”해서 문제라고 주장한다. 트랜스젠더의 권리와 여성의 권리가 충돌한다고 보는 것이다.

트랜스젠더를 배척하는 페미니스트들 캠페인 ⓒ출처 WHRC 한국지부 페이스북

트랜스젠더가 천대받는 사회에서 일부 페미니스트도 트랜스젠더를 배척하는 것은 매우 유감이다.

한국 페미니즘 내에서 이런 주장이 다수는 아니다. 페미니스트의 다수는 트랜스젠더를 옹호한다. 그러나 지배자들과 우파가 트랜스젠더 혐오와 성별 이분법을 지지하는 상황에서 이들의 주장은 숙명여대 신입생의 입학 좌절과 변희수 하사의 비극처럼 트랜스젠더 차별의 현실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트랜스젠더가 여성 스포츠를 위협하나

최근에는 특히 국제적으로 트랜스젠더의 스포츠 참여 문제가 쟁점이 됐다. WHRC은 도쿄 올림픽에 트랜스젠더 여성 로렐 허버드가 여성부에 출전한 것을 문제삼았다. 이것이 여성을 “불공정하게 불리한 위치에 놓아”서 “여성에 대한 차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올해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였던 여성의당 김진아 씨도 로렐 허버드의 출전이 “뉴질랜드의 차별금지법 때문”이었다며, 차별금지법에서 ‘성 정체성’ 항목이 재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공화당 의원들은 각 주에서 트랜스젠더 청소년이 자신의 성별에 따라 스포츠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과 달리, 트랜스젠더가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게 된 2004년 이래로 트랜스젠더 여성이 메달을 딴 적은 없다. 로렐 허버드도 이번 올림픽에서 ‘완주 실패’했다. (온갖 혐오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경기를 치른 허버드에게 박수를 보낸다.) 트랜스젠더가 겪는 온갖 차별과 성전환의 어려움을 생각한다면, 트랜스젠더가 올림픽 같은 엘리트 스포츠에 출전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보통 트랜스젠더 여성이 여성으로 태어난 선수보다 유리하다고 여겨지지만, 이를 증명하는 뚜렷한 증거는 없다. 관련 연구가 부족할 뿐 아니라, 기존의 연구들도 표본이나 연구 방법에서 여러 문제가 제기됐다.

그럼에도 명백한 것은 트랜스젠더가 아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트랜스젠더도 운동 능력에 개인차가 크다는 점이다. 물리학자이자 올림픽위원회(IOC) 고문인 조안나 하퍼는 ‘트랜스젠더 선수가 시스젠더 선수(타고난 성과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에 비해 갖는 장점이나 단점을 파악하는 건 간단하지 않고, [있다고 해도] 개인마다, 스포츠 종목마다 다를 수 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트랜스젠더 여성의 생리적 특성에 유독 초점을 맞춰 스포츠의 공정성을 시비하는 것은 차별적이다. 경기에서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작용하는 신체적 조건(예컨대 농구나 배구에서 키)은 보통 그 선수가 가진 ‘공정한’ 역량으로 수용된다.

또, 경기에는 훨씬 광범한 요인이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빈곤이 신장과 근력에 미치는 영향, 그 나라의 공공시설이나 지원 정도, 교육 격차 등. 이번 도쿄 올림픽에 참가한 나라 206곳 중 113곳은 메달을 한 개도 따지 못했다. 반면, 미국, 중국, 일본, 영국, 러시아 5개 나라가 전체 메달의 약 40퍼센트(395개)를 가져갔다. 자본주의 하에서 스포츠는 애초에 공정한 경쟁의 장이 아니다.

스포츠 대회는 여성 차별적이기도 하다. 예컨대 올해 노르웨이 여자 비치핸드볼팀이 규정대로 비키니 하의를 입지 않고 바지를 입어서 징계를 받았다. 스포츠 업계의 광고주와 스폰서들이 비키니를 선호하기 때문에 그런 황당한 규정이 유지되고 있다. 언론은 종종 여성 선수의 실력보다 외모에 더 집중하곤 한다. 스포츠계 내부의 위계와 성비위 문제도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트랜스젠더가 여성 스포츠를 위협한다는 주장은, 여성 차별 개선은커녕 스포츠에서 정말 중요한 불평등 문제를 가리는 효과만 낸다.

트랜스젠더와 여성의 권리는 대립하지 않는다

WHCR 한국지부는 ‘성별 정체성’ 인정이 여성의 권리를 침해할 뿐 아니라, ‘여성 화장실, 탈의실, 여탕 등 여성 전용 공간을 위험에 빠뜨린다’고도 말한다. 그들은 일부 사례를 과장하거나 왜곡해서 두려움을 부추긴다.

하지만 정작 트랜스젠더가 겪는 끔찍한 폭력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트랜스젠더 여성이야말로 안전한 여성 전용 시설이 정말 필요한 사람들이다. 여성을 공격할 목적으로 트랜스젠더인 체하며 여성 전용 공간에 들어가려는 범죄자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이런 경우를 우려해 트랜스젠더 전체를 배척하자는 것은 비약이다. 안전하고 더 좋은 공공장소와 서비스는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다.

성별 정체성 문제가 문제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사회에서 온갖 차별과 편견을 마주하면서도 살아가고 있는 트랜스젠더의 존재 자체가 그 방증이다. 문제가 아니라면, 그토록 많은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대해 고심하고, 일부가 만만찮은 비용과 위험을 감수하면서 성전환을 하겠는가.

그래서 트랜스젠더 배제적 페미니스트들의 주장과 달리, 트랜스젠더에게 호르몬 치료와 성전환 수술 같은 적절한 의료 조처는 해롭기는커녕 권리가 돼야 한다. 이런 지원을 못 받는 것이야말로 심각한 피해를 낳는다.

트랜스젠더 배척론자들은 ‘트랜스젠더 여성은 남성으로 태어났으니 남성’이고(생물학적 결정론), 남성의 본성은 여성을 공격하고 차별한다고 전제한다.

하지만 여성 차별의 원인은 남성의 본성 때문이 아니다. 여성 차별이 인류 역사 내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류 역사 대부분(98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무계급 사회에서 여성은 차별받지 않았고 남성과 평등한 관계였다. 여성 차별은 계급 사회가 등장하면서 생겨난 가족제도에서 비롯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여성 차별도 자본주의의 구조와 작동 원리 때문에 생겨나고 유지돼 왔다. (관련 기사: 본지 178호, ‘여성 차별과 해방’)

그렇기에 트랜스젠더 차별과 여성 차별은 연결돼 있다. 자본주의 사회 지배자들과 우파는 가족(과 그 안에서 여성의 헌신)을 이상화하며 이에 어긋나는 존재들을 차별하고 ‘위험’하다고 낙인찍는다. 가족제도의 안정적 유지가 노동력 재생산의 안정성에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배자들은 끊임없이 고정된 성 역할을 부추기고, 이분법적 성별 규범 틀에 사람들을 욱여넣으려 한다. 이 때문에 트랜스젠더는 물론, 시스젠더도 고통받는다.

생물학적 결정론과 트랜스젠더 배척은 여성 차별을 정당화하는 우파 주장의 거울 이미지일 뿐이다. 만약 생물학적 차이가 여성 차별을 낳는다면, 여성 해방을 위한 투쟁은 해도 소용 없을 것이다. 이들은 “성평등에 거스르는 사상을 바탕으로 성평등 운동을 하는 모순을 품고 있는 것이다.”(본지 269호, ‘급진적 페미니즘과 분리적 페미니즘, 어떻게 볼 것인가?’)

이처럼 자본주의 체제와 계급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 남 대 여 구도로 사회를 보면, 의도와 달리 우파에게 이용되기 쉽다. 차별금지법에서 ‘성별 정체성’을 제외하라는 배척주의자들의 캠페인은 차별금지법뿐 아니라 낙태권 등 여성의 권리를 공격하는 우파에게 명분만 줄 뿐이다.

진정한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천대받는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여성과 성소수자 차별의 근원인 자본주의와 그 수혜자인 지배계급에 표적을 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