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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슈미르 분쟁의 기원

인도와 파키스탄은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2002년에도 하마터면 핵전쟁이 날 뻔했다. 카슈미르 지역은 바로 양측이 일촉즉발의 대치를 벌여 온 곳이다. 이 글은 2002년에 쓰였지만, 현재의 갈등을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을 설명한다. [ ]안의 말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노동자 연대〉 편집부가 넣은 것이다. 

1947년 영국 지배계급은 인도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영국의 이간질을 통한 각개격파 전술에 따라, 독립 이후 인도 아대륙은 두 독립 국가, 즉 인도(세속적이라 여겨지는)와 파키스탄(무슬림들의 고향)으로 분열했다. 파키스탄은 1000마일이나 되는 인도 영토가 가운데 끼어 서쪽 날개와 동쪽 날개로 나뉜 괴상한 모습이었다. 이 상태는 1971년까지 지속되다가, 1971년 격동과 전쟁의 한가운데서 동파키스탄이 떨어져 나와 방글라데시가 됐다.

인도 아대륙의 분할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 인도 아대륙의 분할은 무함마드 알리 진나가 이끌던 무슬림연맹이 1940년부터 주장한 소위 ‘두 국가’론에 근거한 것이다. 두 국가론은 무슬림과 힌두교도를 서로 별개의 민족으로 본다. 인도 아대륙은 테러가 벌어지던 와중에 분할됐다. 분할 과정에서 벌어진 상호 살육으로 100만 명이 죽었고, 수백만 명이 새로 생긴 국경선의 이쪽이나 저쪽으로 이주해야 했다.

그러면 카슈미르는 어떻게 됐을까? 카슈미르는 호수가 여기저기에 있는 아름다운 계곡으로 인도 북쪽에 위치해 있다.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중국과 맞닿아 있고 옛 소련과는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에 있다. 카슈미르는 역사적으로 이곳을 통치하는 세력의 방벽 구실을 해 왔다. 인구의 대다수는 무슬림 농민들로, 힌두교 도그라 왕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 농민들은 대체로 파키스탄에 속하기를 원하지 않는 무슬림들이었다. 카슈미르 독립군 지도자는 셰이크 압둘라였다. 압둘라는 카슈미르인 다수의 생활수준을 개선하기 위해 토지개혁을 하고자 한 세속적 사회주의자였다. 압둘라는 인기가 좋은 인물이었는데, 진나의 파키스탄에 반대했다. 지주와 군부가 지배하는 파키스탄이 토지개혁 등 사회적·정치적 개혁을 방해하지 않을까 하는 옳은 걱정을 했다. 한편, 분할 과정에서 펀자브 지역에서는 힌두교도, 무슬림, 시크교도들이 서로 살육을 벌였고, 무슬림연맹은 카슈미르에서 근거지를 마련하지 못했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됐어야 할까?

인도 아대륙 분단으로 탄생한 두 국가에게 카슈미르는 이데올로기적 문제를 제기했다. 카슈미르의 무슬림들이 파키스탄에 편입되기를 원하지 않으면, 진나의 두 국가론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또한 무슬림이 대다수인 주가 인도에서 버텨 내지 못한다면 인도 국민회의 지도자 네루의 세속적 인도 국가 전망도 의미가 없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이데올로기적 문제가 아니었다. 새 국가들에게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영토의 확보, 카슈미르로 통하는 주요 산간 도로 통로에 대한 통제력 장악도 중요했다. 중국은 1962년 인도와 벌인 전쟁으로 카슈미르 동부 산들의 통제력을 확보해 아직까지 보유하고 있다. 당시 카슈미르의 지배자인 번왕은 이 나라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결정할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독립 후 두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결국 파키스탄 군대의 명령을 받은 부족민들이 카슈미르 북부를 침략했다. 그래서 왕은 서둘러 인도에 편입하기로 했고, 인도 군대는 파키스탄군을 저지하기 위함이라며 ‘합법적으로’ 카슈미르 지역에 들어올 수 있었다.

네루는 비민주적인 힌두계 왕이 내린 카슈미르의 인도 편입 결정을 ‘훗날’ 카슈미르인들이 다시 결정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훗날’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카슈미르는 조차지로 간주됐다. 카슈미르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한 인도 헌법 370조는 이때에 생겨난 것으로, 오늘날 힌두교 국수주의 정당인 인도국민당(BJP)은 이 조항을 몹시 싫어한다. [현 인도 총리 모디의 소속 정당이 바로 인도국민당이다.]

[카슈미르를 침공한] 파키스탄 군대는 인도군 때문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으며, 1949년에 유엔의 중재로 휴전이 맺어졌다. 오늘날 인도령 카슈미르와 파키스탄령 카슈미르로 나눈 ‘통제선’은 카슈미르의 지배권을 두고 인도와 파키스탄이 벌인 전쟁 끝에 생겨난 휴전선이다. (그 뒤로도 인도와 파키스탄은 전쟁을 두 차례 더 벌였다.) 인도 아대륙의 분할 뒤 40년 동안 파키스탄에 편입되는 것을 지지하는 카슈미르인은 거의 없었다. 1951년 [카슈미르] 선거에서 셰이크 압둘라의 국가협의회가 의석을 모두 차지하고, 친파키스탄 후보들은 한 명도 당선하지 못했다. 그러나 인도 국가는 군대를 철수할 생각도, 카슈미르 주민들이 스스로 미래를 결정하도록 허용할 뜻도 없음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군대가 시위대에 발포하다

1953년 인도 중앙정부는 셰이크 압둘라를 몰아내 구속할 공작을 벌였다. 그러나 셰이크는 그 전에 폭넓은 토지개혁 법안을 제정해, 카슈미르 지주들의 권력을 파괴하고 카슈미르인들만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했다. 인도국민당은 이 토지개혁 법안을 증오하고 있다.

압둘라의 구속은 20일간의 총파업을 촉발했다. 총파업이 벌어지는 동안 인도 군대는 계속 시위대에 총을 쏴 1000여 명을 죽였다. 6년 뒤 압둘라가 석방됐을 때, 100만 명이 거리에 나와 그를 환영했다. 압둘라가 중국을 방문한 뒤 다시 구속되자 총파업과 시위가 벌어졌고, 체포와 탄압이 뒤따랐다. 그리고 인도에 대한 분노도 커져 갔다. 파키스탄은 1965년에 이런 상황을 이용해 두 번째 전쟁을 일으켰고, 봉기가 일어나길 기대했다. 그러나 이것은 카슈미르 정서를 잘못 파악한 것이었다. 카슈미르에서 벌어진 운동은 비민주적인 파키스탄에 편입되고자 하는 염원 때문에 벌어진 게 아니었다.

1972년에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심라 협정이 체결되고 휴전선이 새로 그어졌다. 양측이 휴전선을 존중하기로 합의하면서 카슈미르 분할은 기정사실이 됐다. 셰이크 압둘라가 석방돼, 1977년 선거에서 압도적 지지로 총리로 재선출됐다. 그러나 이때의 압둘라는 인도와 화해할 태세가 돼 있었다. 셰이크 압둘라 정권은 갈수록 부패해졌으며, 1982년 그가 죽고 난 뒤 그의 아들 파룩이 손쉽게 집권했다. 점점 많은 카슈미르인들이 정권의 부패로 좌절감을 느꼈으며, 일자리 부족 — 특히 교육받은 카슈미르인들의 일자리 부족 문제가 심각했다 — 과 압둘라 정권의 권위주의는 그 좌절감을 키웠다. 동시에 카슈미르의 ‘특별한 지위’는 체계적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1980년대 동안 인도 정부는 카슈미르에 점점 더 많이 개입해, 선출된 정부를 해산시키고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강경 반무슬림 성향의 인물을 카슈미르 총리에 앉혔다. 1987년의 선거 조작은 깊은 실망감을 자아냈다. 인도에 맞선 거대한 반란은 1989년에 다시 시작됐다.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통제선도 무너뜨릴 수 있다.” 반란에 참여한 사람의 말이었다. 그러나 인도와 파키스탄은 카슈미르의 재통합을 원하지 않았다. 소련과 중국은 카슈미르의 독립 운동이 성공해 자국 내 소수민족에게 영향을 미칠까 봐 두려워했다.

1990년 인도 군대가 스리나가르에서 시위대 100명을 학살하자, 반란은 카슈미르 계곡의 모든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약 40만 명이 행진했고, 그다음에는 100만 명이 행진했다. 그 가운데 40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 카슈미르의 젊은 세대는 투쟁하기로 결심하고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좌절감의 반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1979~1989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소련에 대항해 무기와 지원병을 제공할 준비가 돼 있었지만 전쟁이 끝나 버린 상황의 반영이기도 했다. 그래서 체 게바라에 고무돼 카슈미르 독립을 위해 싸우던 게릴라들과 나란히, 파키스탄에 편입되기를 바라며 투쟁하는 이슬람 게릴라 그룹도 있었다. 파키스탄 정부는 정보기관 ISI를 통해 여러 단체에, 특히 라쉬카르 이 카이야바(Lashkar-i-Tayyaba)와 하르카툴 무자헤딘(Harkatul Mujahadeen)에 돈과 무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젊은 카슈미르인들을 파키스탄과 지하드 단체의 품으로 몰아넣은 것은 인도 군대의 탄압이었다.

독립 투쟁

인도 군대는 영국에게서 배운 고전적 폭동 진압 전술들을 활용했다. 인도 중앙정부가 임명한 반(反)무슬림 성향의 카슈미르 총리는 이렇게 선언했다. “오늘날 카슈미르에 사는 무슬림은 모두 전투원이다. … 카슈미르에서 유일한 해결책은 총알뿐이다. 전투원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면 카슈미르 계곡의 정상 상태는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1990년대에 약 60만 명의 병력이 이 지역에 주둔했다. 당시 카슈미르는 인구 대비 군인 비중이 세계에서 가장 높았으며, 카슈미르인 7만 명이 학살당했다. 대량 체포와 실종이 발생했고, 고문과 강간이 횡행했다. 1995년 실시된 《이코노미스트》의 여론조사는 카슈미르 인구의 75퍼센트가 독립 투쟁을 지지한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봉기는 오로지 카슈미르에 집중돼 있었다. 봉기가 시작되자 약 14만 명이나 되는 힌두교도들이 카슈미르에서 도망쳐 나왔다. 부자들은 델리에 있는 자신의 두 번째 집으로 갔지만 그 나머지는 잠무의 열악한 난민수용소로 갔다. 1980년대 말에는 라다크에서 무슬림과 불교도들의 충돌이 일어났다.

게릴라들은 인도 국가를 물리치지 못했고, 카슈미르인들은 지쳐 갔다. 게릴라들은 약탈하고 서로 분열하고 무작위적 폭력 행위를 벌이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과 멀어져 갔다. 2001년 타리크 알리는 〈런던 리뷰 오브 북스〉에 이렇게 썼다. “게릴라 단체들은 서로 죽이고 서구인 관광객을 납치했다. 그리고 카슈미르의 힌두교도들을 수세기 동안 살던 고향에서 내쫓았다. 또 가끔 인도 군인이나 관료들을 해치웠지만, 일부 무슬림을 세속적 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처벌했다.” 오늘날 세속적인 반정부 세력들은 주변적 지위로 내밀리고 있다.

지하드 세력이 운동의 지도력을 장악하면서 힌두교도나 불교도들의 두려움이 커지고 있다. 이들은 파키스탄에 편입되기를 바라는 무슬림들이 카슈미르를 지배하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그리고 인도국민당과 힌두교 중심주의자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런 두려움을 조장하고 있다. 이런 분열이 확산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입장이어야 할까?

“인도도 파키스탄도 아니다.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

사회주의자는 세 가지를 말해야 한다. 첫째, 인도든 파키스탄이든, 그 어느 편도 들어서는 안 된다. 인도 국가의 탄압은 끔찍하고, 그러므로 인도에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카슈미르가 파키스탄에 편입된다고 해서 평화와 자유와 안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파키스탄은 여전히 지주와 군부가 지배하는 나라다. 인도와 파키스탄 두 국가 모두 카슈미르에서 손을 떼야 한다.

둘째, 카슈미르인들에게는 독립 선택권과 불교도와 힌두교도의 권리 보장을 포함해 진정한 자결권이 제공돼야 한다. 파키스탄 국가는 카슈미르의 자결권을 지지한다고 하지만, 단지 말뿐이다. 파키스탄은 카슈미르 독립을 반대하면서 인도나 파키스탄 한쪽에 편입되는 것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파키스탄은 군사 개입을 통해 카슈미르를 병합하기를 원한다.

셋째, 사회주의자는 카슈미르의 빈민과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무슬림이건 힌두교도이건 불교도이건 시크교도이건 상관없이 단결할 필요를 강조해야 한다. 발루치스탄(파키스탄 서부의 주) 사람들은 1970년대에 파키스탄 국가에 맞서 싸울 때 이 점을 잘 이해하고 발전시켰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자결권을 위해 싸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주들과 착취자들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자결권을 위해 싸운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분할의 유산으로, 인도 아대륙 사람들은 종교와 민족을 근거로 분열해 왔다. 이에 대한 대안은 계급투쟁을 통한 단결을 건설함으로써 그런 분열을 박살 내는 것이다.

출처: 《소셜리스트 리뷰》 2002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