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파키스탄의 카슈미르 분쟁 이해하기:
영국 제국주의의 분할이 낳은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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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두 핵보유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이 카슈미르를 두고 무장 충돌을 벌여 전면전 직전까지 치달았다. 이후 휴전이 합의됐지만 상황은 여전히 매우 불안정하다.
카슈미르 지역이 겪는 고통의 근원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영국 제국의 종식과 인도 아대륙 분할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편집자 조셉 추나라가 그 고통의 기원과 카슈미르를 두고 벌어지는 강대국들 간 갈등에 관해 설명한다. 이 글은 인도의 극우 총리 나렌드라 모디가 카슈미르의 제한적 자치권을 박탈한 2019년에 쓰였다.
카슈미르는 지구상에서 가장 군사화돼 있는 지역이다. 50만 명으로 추정되는 규모의 인도 보안 기구가 거주자 700만 명을 통제한다.
인도의 지배에 맞선 항쟁에서 지금까지 약 8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2016년 이후로는 “군중 통제”를 위해 납 구슬로 채워진 산탄을 발포하는데, 고의로 민간인 시위대를 실명시키려는 것이다. 다수가 무슬림인 거주자들 사이에서는 고문·강간·납치를 당한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러니 인도의 힌두 국수주의 총리 나렌드라 모디가 카슈미르 사람들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인도 헌법 제370조의 효력을 정지시켰을 때, 카슈미르 사람들이 그 의도를 믿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인도 헌법 제370조는 카슈미르에 제한적 자치권을 보장하는 조항인데, 모디는 그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동시에 카슈미르 지역의 통신을 일절 차단하고 지역 정치인들을 구금했다.
또, 카슈미르 사람들의 토지 소유를 보호하는 헌법 제35조 A항[타지역 인도인들의 카슈미르 토지 구입을 제한한다 ─ 역자]을 폐기한 것도 중대한 조치다. 모디의 정당 인도국민당(BJP)의 오랜 목표 하나는 인구 다수가 무슬림인 카슈미르 지방에 힌두교도가 정착하는 것을 부추겨 그 지역의 인구 구성을 변화시키고 인도 기업들이 그 지역에 촉수를 뻗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카슈미르가 겪는 고통은 1947년 인도 아대륙 분할의 유산이다. 영국 통치자들은 영국 제국에 맞선 저항을 약화시키려고 이간질해서 각개격파하는 전략을 오랫동안 구사해 왔다. 제2차세계대전 기간에 인도 독립 운동을 이끈 정당인 인도국민회의가 “영국은 인도를 떠나라” 운동을 벌이자, 영국은 영국의 제2차세계대전 수행을 지지하던 무슬림동맹에 더 많이 의지하게 됐다. 그 결과 전후 협상에서 무슬림이 다수인 별도의 독립국을 달라는 무슬림동맹의 요구에 힘이 실렸다.
독립이 다가오자 점점 보수화하던 인도국민회의 지도자들은 분할에 동의했다. 그러지 않으면 영국에 맞서 종단 간 분열을 뛰어넘은 대중 항쟁이 일어나 인도국민회의가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까 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분할을 위한 국경이 그어진 후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서는 안 되는’ 곳에 있게 됐다. 패닉과 종단 간 폭력이 벌어져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피란민이 됐다. 그렇게 탄생한 파키스탄은 강력한 지주들과 거상들이 지배하게 됐다. 인도에서는 인도국민회의가 국가의 운영권을 잡았다. 인도국민회의는 비종교적 정당을 표방했지만 실천에서는 얼마든지 힌두 국수주의에 영합할 태세가 돼 있었다.
분할 당시 잠무 카슈미르(이것이 정식 명칭이다)는 힌두교도 군주가 통치하고 있었지만, 인구의 다수는 무슬림이었다. 1947년 분할 당시 그곳의 앞날은 불투명했다. 카슈미르 군주가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서 우유부단하게 굴자 파키스탄 게릴라가 국경을 넘어왔고, 그들을 쫓아내려고 인도군이 카슈미르를 침공했다. 결국 카슈미르는 실질 통제선에 따라 분할됐고, 유엔은 카슈미르의 앞날을 주민투표로 정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아직도 주민투표는 실시되지 않았다.
오늘날 카슈미르는 세 핵무장 국가인 인도·파키스탄·중국이 분할 지배하고 있다. 북서부의 아자드(“자유”) 카슈미르는 파키스탄이 지배한다. 인구 다수가 무슬림이지만 힌두교도·불교도도 적잖은 잠무 카슈미르는 인도가 지배한다. 인구 밀도가 낮은 북동부의 작은 지역 두 곳은 중국이 지배한다.
인도 언론은 카슈미르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파키스탄이 후원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의 테러로 묘사한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카슈미르 사람들은 그런 방식의 이슬람주의 운동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카슈미르 지역의 이슬람은 주로 신비주의적인 수피즘의 일종이었다. 더구나 1947년 이후 카슈미르 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셰이크 압둘라는 인도를 비종교적 국가로 만들겠다는 인도국민회의의 목표에 공공연히 호감을 표했다. 압둘라는 카슈미르가 독립하는 방안도 고려했지만, 자신의 급진적 토지 개혁 계획을 파키스탄이 가로막을까 봐 우려했다.
이슬람주의 무장 단체들이 등장할 기회를 열어 준 것은 인도의 탄압이었다. 그렇게 등장한 무장 단체의 많은 수를 파키스탄이 후원한다. 그러나 이는 카슈미르 사람들의 자유를 진정으로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이해타산적인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토록 억압적인 파키스탄 국가가 과연 “자유”의 편을 자처할 자격이 있을까.
카슈미르 언론인 힐랄 브핫트는 2011년 출판된 에세이 모음집 《카슈미르: 자유를 옹호하다》에서 1987년 무슬림연합전선이라는 선거 연합에서 활동한 경험을 회고했다. 당시 인도는 무슬림연합전선의 부상을 막으려고 그 선거를 조작했고, 이를 계기로 브핫트와 그의 동료들은 무장 반군과 가까워졌다.
같은 책에서 인도인 저술가 아룬다티 로이는 2008년 [잠무 카슈미르에서 열린 ─ 역자] 파키스탄 지지 시위에 참가한 어느 여성에게 파키스탄의 지배를 받으면 자유를 더 많이 누릴 거라고 진심으로 믿느냐고 물었던 일을 전했다. 그 여성은 이렇게 답했다. “지금은 대체 무슨 자유가 있는데요? 인도군에게 강간당할 자유?”
카슈미르의 진정한 해방은 갈 길이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1947년 독립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인도를 통치한 인도국민회의의 실패는 모디와 인도국민당이 부상할 기회를 열었다. 모디의 부상은 힌두 국수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모디는 구자라트주(州) 총리를 지내던 2002년 당시 그곳에서 벌어진 무슬림 대학살 사건에 연루돼 있다는 의혹이 팽배하다.
한편, 미국은 한때 파키스탄과 동맹했지만 냉전 종식 이후 인도와 더 가까이 지냈다. 인도가 중국을 견제하는 데서 더 효과적인 균형추라고 봤기 때문이다. 10억 명이 넘는 인도 인구의 구매력도 탐냈을 것이다. 2019년 8월 도널드 트럼프는 카슈미르 문제가 인도·파키스탄 “양자가 해결할 문제”라고 선언했다. 당시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도 비슷한 말을 되뇌었다.
카슈미르 문제의 유일하게 의미 있는 해법은 자결권을 보장하는 것뿐이다. 즉, 앞날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 외세에 간섭받지 않을 자유, 소수 종교 신도의 보호를 보장하는 것뿐이다. 그러려면 1947년의 해로운 유산을 청산해야 한다. 카슈미르 사람들의 저항은 파키스탄과 인도 모두에서 노동자들이 국수주의적이고 제 이득만 챙기는 부패한 자국 정권들에 맞서 다시 투쟁을 벌일 때에만 힘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