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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파업과 시위에 밀려 양보한 중국 정부
노동자들이 본격적으로 나설 차례다

9월 2일 동맹휴업을 하고 시위에 나선 홍콩 학생들 ⓒ출처 Studio Incendo(플리커)

중국과 홍콩 당국이 홍콩 송환법 반대 운동을 갈수록 강경하게 탄압했지만, 운동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홍콩 운동은 석 달 넘게 이어졌고 송환법 철회 말고도 요구가 더 확대됐다. 시위 참가자 다수는 행정장관 캐리 람의 사퇴도 원한다.

9월 4일 캐리 람은 송환법을 공식 철회하겠다고 발표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중국 정부는 캐리 람이 한발 물러서게 하려는 듯하다. 물론 시위대 요구(경찰 폭력 조사, 송환법 철회, 연행자 석방·사면, 시위의 폭동 규정 철회, 직선제 실시) 중 극히 일부만 수용함으로써, 운동의 분열을 꾀하며 시간을 벌다가 다시 반격하려는 심산일 것이다.

운동의 온건한 지도부인 민간인권전선은 일단 모든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투쟁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정부와 시위대 간에 긴장이 높아지고 있었다. 8월 29일 중국 신화통신은 홍콩에 진입하는 중국군 장갑차와 군용트럭 사진을 공개했다. 홍콩 경찰은 8월 31일 집회와 행진을 불허했다. 30일에는 운동의 주요 인사들이 경찰에 체포됐다. 민간인권전선은 결국 집회를 취소했다.

그럼에도 8월 31일 많은 홍콩 민중이 거리로 나와 시위와 행진을 벌였다. 경찰 공격에 저항하기 위한 바리케이드가 거리에 등장했다.

경찰은 물대포·최루탄 등을 동원해 시위대를 공격했다. 실탄 경고 사격까지 했다. 경찰 특공대가 최루액을 뿌리며 시위 참가자들을 마구 폭행하고 연행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9월 1일 시위대가 공항 도로와 철도를 봉쇄하면서 항공편이 대거 취소됐다.

홍콩 시민들은 강경한 탄압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8월 25일 홍콩 시위 ⓒ출처 Studio Incendo(플리커)

정부의 위협과 폭력은 시위대에게 한 가지 명확한 교훈을 줬다. 9월 2일 홍콩 데모시스토(2014년 우산운동 출신자들이 만든 정당) 부의장은 이렇게 말했다. “정부의 대응은 우리에게 평화 시위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 줬다. 학생들은 수위 높은 시위를 고려하게 됐다. 그래서 동맹휴업을 하는 것이다. 동맹휴업은 투쟁을 지속하겠다는 결의의 표현이다.”(《타임》 9월 2일치 기사)

노동자 파업

9월 2일부터 홍콩 대학생과 중고등학생들이 동맹휴업에 돌입했다. 200여 학교에서 1만여 명이 동맹휴업에 참가했다. 일부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인간띠를 이루어 학교 일대를 에워쌌다.

노동자들도 집단행동에 나섰다. 9월 2~3일 건설·교통·관광 등 20여 개 부문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였다. 프린스오브웨일스 병원과 퀸메리 병원에서는 노동자들이 송환법 반대 운동을 지지해 연좌 농성을 벌였다.

홍콩 권력자들은 투쟁의 기세에 당혹감과 위기감을 느낀 듯하다. 9월 2일 로이터 통신은 캐리 람과 기업인들의 비공개 회동 녹취를 입수해 폭로했다. 그 회동에서 캐리 람은 자신이 “행정장관으로서 용서받을 수 없는 대혼란”을 초래했다고 인정했다.

캐리 람은 시위로 인한 압박감도 토로했다. 요즘에는 외출도 어렵다면서,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면 “검은 티셔츠와 마스크를 쓴 군중이 나를 맞이할 것이다” 하고 말했다. 기회만 된다면 사과하고 사퇴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캐리 람은 이렇게도 말했다. “행정장관으로서 중국 정부와 홍콩 시민이라는 두 주인을 섬겨야 하기에 정치적 운신의 폭이 거의 없다.” 중국이 홍콩 시위를 “주권과 안보” 문제로 보고 있어 본질적으로 강경한 태도를 굽히지 않는다고도 했다.

운동의 심화·확대

따라서 홍콩 시위대가 송환법 철회 말고도 다른 요구들을 쟁취하려면 운동이 심화·확대돼야 한다.

중국 관영 언론들은 홍콩 시위를 서방이 조종하는 “색깔 혁명”이라고 비난하며 중국이 참을 만큼 참았다고 위협한다.

이런 비난과 위협에는 홍콩 시위가 본토 민중과 연결될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따라서 홍콩 운동이 노동계급을 비롯한 본토 민중에게 연대를 호소하는 게 중요하다. 중국에서 성장하는 노동자 투쟁을 감안하면 이것은 전혀 비현실적 과제가 아니다.

게다가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홍콩으로 이주한 본토 사람은 100만 명이 넘는다. 인구가 750만 명 남짓인 홍콩에서 이것은 굉장한 규모다.

홍콩 사회주의자이자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웹사이트의 중국어 편집자인 람치렁은 이렇게 말했다. “본토 민중의 지지를 얻으려 애써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송환법 반대 운동 내에 많다. … 홍콩 주민들, 특히 청년들 사이에서 중국 본토와의 일체감이 줄어들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본토 노동운동과 사회 운동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주장에 귀 기울일 태세가 돼 있다.”

이런 증언은 홍콩 운동이 결코 ‘색깔 혁명’이 아님을 보여 준다.

물론 홍콩 운동 안에는 다른 지향을 내놓는 사람들도 있었다. 데모시스토 사무총장이자 우산운동 스타였던 조슈아 웡은 8월 31일 〈뉴욕 타임스〉 기고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에게 중국을 압박하라고 호소했다. 이런 주장에는 서구식(즉,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이 깔려 있다.

트럼프 같은 서방 지배자들은 송환법 반대 운동의 친구가 아니다. 그들은 홍콩 운동에 영향을 미쳐서 중국과의 제국주의 경쟁에 이용하려 한다. 동시에 이 운동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홍콩 운동은 이와는 다른 지향으로 나아갈 잠재력이 있다. 그 잠재력이 실현되려면 홍콩 노동자들의 계급적 행동이 관건일 것이다. 그리고 중국 본토 노동계급과의 연대를 일관되게 추진해야 한다. 이런 전망을 실천할 진정한 사회주의 정치와 조직이 필요하다.

홍콩 시위는 미국이 배후인 “색깔 혁명”인가?

홍콩 투쟁에 대한 당 지도부의 입장에 의문을 제기하는 민중당 청년 당원들의 토론회

홍콩 운동 내에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운동을 “색깔 혁명”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런 주장을 국내 진보·좌파 일부도 받아들인다. 중국을 미국 제국주의에 대립하는 반제국주의 또는 (심지어) ‘사회주의’ 세력으로 보고, 홍콩 시위를 미·중 갈등의 맥락 속에서 보는 것이다. 예컨대 민중당 정책위는 홍콩 시위를 “미국이 주도하는 외부세력”이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흔들어 보고자” 개입한 일로 치부한다.

그러나 박근혜 퇴진 운동도 서구식 민주주의에 도전하지 않았던 운동이다. 박근혜 탄핵이 확정됐을 때 서구의 주요 다국적기업들은 모두 이 조처를 환영했다. 한국의 진보·좌파들은 그 때문에 박근혜 퇴진 운동을 지지하지 않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물론 미국은 자국의 이해관계를 위해 특정 반정부 운동을 친미적 방향으로 유도하려고 공작한다. 그렇게 해서 일어난 운동을 미국은 “혁명”이라고 떠들어 댔다.

그런 “색깔 혁명”은 대중의 진정한 불만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기 전에 현지 지배계급 일부 분파가 그 불만을 엉뚱한 방향으로 가로채면서 일어난 일들이었다. 이 과정을 미국이 후원해 줬다. 예컨대 2004년 우크라이나에서는 부패한 친러 지배자들과 경쟁하는 똑같이 부패한 친서방 지배자들이 시위를 주도했다(소위 오렌지 혁명). 그 결과는 진보가 아니라 옆으로 게걸음질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홍콩 운동을 이와 같은 것으로 동일시해선 안 된다. 이 운동에 주요한 구실을 맡은 단체와 개인들은 지배계급 내 한 분파가 아니며,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홍콩의 진보적 변화를 위해 싸워 왔다. 그들의 요구 또한 우리가 지지할 만한 것들이다.

특히, 이 운동 참가자의 사회적 구성이 압도적으로 노동계급이다. 대체로 개인으로 참가하고 있지만, 갈수록 노동계급의 집단행동이 두드러지는 것도 주목할 만한 변화다.

민중당 정책위는 이 시위의 배경이 된 홍콩의 빈부격차와 실업 등이 중국 책임이 아니라 “소수의 자본주의 세력들이 [일국양제라는] 특혜를 잘못된 방식으로 독점”한 탓이라고 본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홍콩은 “사회주의”를 (얼토당토않게) 표방하는 중국 지배 관료와 홍콩 자본가들의 합작품이다. 두 사회집단 간에는 적대적인 갈등이 전혀 없다. 오히려 이들은 착취 체제를 유지할 이해관계를 공유한다.

노동계급은 집단적 투쟁의 경험에서 의식과 조직을 발전시킨다. 1980년 광주항쟁 당시 미국 항공모함이 한반도 인근으로 출동하자 거의 모든 광주 시민들은 미국이 전두환을 막기 위해 항공모함을 보냈다고 착각할 만큼 당시에는 미국에 환상을 품었다. 그러나 광주항쟁 경험은 한 세대의 청년·학생들이 미국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실체를 인식하고 급진화하는 계기가 됐다. 1980년대 중엽 이후로는 노동계급도 급진화 물결에 가세했다.

홍콩에서도 이와 유사한 의식 발전을 기대해야 하지 않을까? 이를 위해서라도 홍콩 바깥의 국제 좌파들은 홍콩 운동을 지지하면서 서방 제국주의와 자본가들의 위선을 폭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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