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지원에 우선순위 둔 2021년 예산안과 뉴딜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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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정부가 2021년 예산안을 발표했다. 지난해보다 43조 5000억 원(8.5퍼센트) 증가한 556조 원이다.
내년에도 코로나19 위기가 지속될 것으로 예측되는 상황에서 노동자·서민 지원이 절실하다. 특히 실업과 고용 불안정, 임금 등 소득 감소, 돌봄 공백 등으로 고통이 크다.그러나 정부가 내놓은 예산안은 이런 고통을 덜어 주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정부는 보건·복지·고용 분야에 200조 원을 배분했다고 생색을 낸다. 특히 일자리 관련 예산을 늘렸다고 한다. 우파들은 복지에 너무 많은 돈을 쓰고 이 때문에 재정 적자가 급증한다며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복지 지출이 11퍼센트 정도(2018년)로 OECD 회원국 중 꼴찌라는 점을 감안하면, 복지 예산은 많기는커녕 너무 부족한 게 진실이다.
자세히 보면, 내년에 늘어날 복지 예산 20조 원 가운데 12조 원가량은 법률에 따라 지출액이 자동으로 늘어나는 의무지출이다. 예를 들어 5조 원가량은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 자연증가분인 것이다.
정부가 4대 중점 투자 중 하나로 내세운 고용·사회안전망 분야도 큰 개선이 없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6대 급여(생계·의료·주거·교육 급여 등) 예산은 1조 3000억 원 증가에 그쳤고, 급여액 산정 기준인 기준중위소득 증가율은 오히려 낮아졌다.
고용안전망 분야에서도 정부는 일자리 200만 개를 지키고 새로 창출하겠다면서 고작 8조 원을 배정했다. 그중에서도 정부가 직접 창출하는 일자리 예산은 2500억 원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지난해 예산에서 노인 일자리 13만 개 창출에 8500억 원을 배정한 것과 비교해 보면, 내년에 만들 일자리가 매우 적거나 저질일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일자리 예산은 지난해보다 5조 원이 늘어난 건데, 그 중 가장 큰 부분은 실업 급여로 1조 8000억 원 증가했다. 경기 침체와 코로나19 확산으로 실업 대란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결코 많은 금액이 아니다. 특수고용노동자 등 사회보험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예산은 지난해보다 줄었다.
출산율 저하를 이유로 내년 신규 초·중등 교원 수도 축소된다. 교육 부문 예산은 12대 대표 분야 중에서 유일하게 2.2퍼센트 줄었다.
공공의료 확충 예산도 감염병 대응 필요에 견줘 매우 적다. 관련 분야인“K-방역” 예산은 2조 원이 채 안 되고,이 중에서도 공공의료 인프라 예산은 6000억 원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산업화”(의료기기 연구·개발, 바이오-ICT 융합 촉진 등)와 “세계화”(K-방역 홍보)에 배정됐다. 다시 말해, 의료 영리화와 방역 성과 치장하기에 치우쳐 있다.
돌봄 지원 예산도 찔끔 증가에 그쳤다. 시간제 아이돌봄 예산은 1550억 원으로 고작 146억 원 늘리고는, 아이돌봄 노동자 수를 두 배로 늘리고 이용 가구도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초등돌봄 예산도 130억 원 증가에 그쳤는데 이용 인원은 5만 명이나 확대하겠다고 한다. 늘어나는 아이 한 명당 고작 26만 원을 지원하는 셈인데, 이미저임금과 불안정한 노동조건으로 오랫동안 시달려 온 돌봄·보육 노동자들이 더욱 어려운 처지를 강요당할 가능성이 크다.
기업 전폭 지원과 ‘뉴딜펀드’
반면, 기업주를 지원하는 예산과 정책은 두드러지게 늘어났다.12대 대표 분야 중에서 예산 증가폭이 가장 큰 분야는 23퍼센트나 늘어난 산업·중소기업·에너지 분야다.(복지 예산은 10퍼센트 증가)
예산안에서 가장 강조된 한국판 뉴딜에는 21조 3000억 원이 배정됐는데, 노후한 공공 건물 리모델링 등 무늬만 ‘그린’인 몇 가지를 제외하면 대체로 신산업 육성과 기업 투자 활성화를 위한 지원 계획이다.
정부는 한국판 뉴딜의 일부인 디지털 뉴딜을 통해 청년 일자리 36만 개를 창출하겠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 일자리의 실상은 인공지능 개발을 위해 데이터를 입력하는 등 단순 업무를 하는 저임금 일자리에 불과하다.
이와 별도로 민간(기업) 투자 지원 예산도 있는데, 여기에는 지난해보다 30퍼센트 이상(10조 원) 늘어난 40조 원이 배정됐다. 이 돈 대부분은 기업 융자 지원에 사용되고 일부는 ‘뉴딜 펀드’ 조성의 마중물로 사용된다.
뉴딜 펀드는 기업들의 투자 지원을 위해 정부가 띄운 ‘돈 끌어모으기 프로젝트’다. 정부재정 수조 원에산업은행 등 정책금융기관과 민간 대형 은행이 출자하고, 투자자를 끌어모아 총 170조 원에 이르는 대규모 펀드를 조성한다는 계획이다.그리고 정부가 투여한 재정으로 투자자들에게 원금과 3퍼센트 수익률 보장, 세제 감면 혜택을 준다고 한다. 세금으로 원금을 보장하니 여윳돈이 많은 부자일수록 이 펀드 투자로 이득을 볼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모은 돈은 ‘뉴딜 기업’들에게 투자 자금을 지원하거나 특별 저리 대출을 공급하는 데 쓰인다. 정부는 뉴딜 펀드를 활성화하기 위해 ‘뉴딜 기업’들에게 인허가 기준 등 규제 완화를 약속하고 있다.
재정의 우선순위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예산안 발표 이후 “확대 재정에 따른 증세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정부는 내년 국세 수입 중 법인세가 9조 원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다시 말해 부자 증세는 안 하겠다는 뜻이다.
정부는 늘어나는 국가 채무를 “과감한 지출 구조조정”으로 충당하겠다며 내년 공무원 임금 인상률을 0.9퍼센트로 결정했다. 실질임금 삭감이다. 게다가 공공부문 116곳의 운영 경비를 5퍼센트 이상 감액하겠다고 한다. 기업 지원을 하느라 발생한 재정 적자를 공공부문 노동자들에게 떠넘기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53조 원에 이르는 군사비는 줄일 생각이 없다. 국방예산은 지난 3년 동안 10조 원 가까이 가파르게 증가했는데, 증가 속도가 박근혜 정부 때보다 두 배나 빠르다. 정부는 향후 5년간 무려 301조 원을 투입해 사상 최대 규모의 군비 증강에 나선다는 계획(“2021~2025년 국방중기계획”)도 발표한 바 있다.
9월 7일 문재인은 재정 상의 어려움 때문에 2차 재난지원금 선별 지급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재정이 정말로 없는 게 아니라 재정의 우선순위다.
장기화하는 경제 위기와 감염병 위기 속에서 평범한 다수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부의 친기업적 우선순위에 도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