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증보
성소수자 내치는 교황청의 '동성 결합 강복 금지' 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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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3월 18일 발행한 ‘동성결혼 축복 금지 — 성소수자 내치는 교황청’을 개정증보한 것이다.
교황청이 ‘동성 결합 강복(신의 복을 내림) 안 된다’는 교령을 발표한 이후, 가톨릭 내부에서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난 3월 15일, 교황청 최고교리기구인 신앙교리성은 “동성 간 결합에 대한 강복은 (교회법상)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 죄를 축복할 수 없는 만큼, 동성 간 결합을 축복할 수 없다” 하고 말했다. 이는 동성 결합을 지지하는 일부 사제와 교구의 질의에 대한 답변으로,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를 승인했다.
이후 아일랜드, 벨기에, 독일, 오스트리아, 호주, 미국의 몇몇 사제들이 교황청의 교령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3월 29일에는 독일어권의 가톨릭 신학자 278명이 반대 성명서를 발표했고, 미국에서도 신학자 100여 명을 포함해 가톨릭 신자 3000여 명이 프란치스코 교황과 바티칸 지도자들에게 “[성소수자에게] 너무나 많은 고통을 야기하는 교령을 철회할 것을 촉구”했다.
반갑게도 한국에서도 가톨릭 내 진보파인 〈가톨릭프레스〉가 이번 교령에 대한 비판적 기사를 냈다.
“동성애는 이성애와 다를 바 없는 개인의 성적 지향으로 그 자체로 긍정 또는 부정적 판단의 대상은 아니다. 가톨릭교회가 혼인과 출산을 중심으로 한 사회구조 유지에 기여하는 입장에 따라 그러한 교리를 택했다한들, 그에 기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부정하고, 나아가 공동체 안에서 그들을 ‘없애는’ 일원화를 시도하는 것은 ‘가톨릭’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처사인 셈이다[‘가톨릭’에는 ‘공동의’, ‘보편적’이라는 뜻이 있다].”(3월 17일 〈가톨릭프레스〉)
교황청의 ‘동성 결합 강복 금지’ 입장 천명은 성소수자들에게 큰 상처를 주고 가뜩이나 천대받는 이들에게 고통을 더하는 일이다. 교황청은 이 교령이 ‘동성애자 차별’이 아니라고 했지만, 동성 결합을 죄악시 하는 것이 바로 동성애자 차별이고 배제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입장이 ‘교리상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는 율법을 앞세워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천대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인을 강하게 비판했었다. 또한 가톨릭 교리가 이혼이나 피임을 죄로 본다고 해도 현실의 변화한 상황 때문에 오늘날 가톨릭 지도자들은 이에 대해 큰 소리로 비난하지 않는다(못한다).
이번 발표는 오늘날 가톨릭 평신자들의 삶이나 생각과도 맞지 않는다. 현재 29개 나라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됐다. 그중에는 가톨릭의 영향력이 강력한 아일랜드, 이탈리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도 포함돼 있다. 미국·독일 등지에서는 이미 많은 사제들이 동성애자 신자들의 결혼을 축복하고 있다.
2019년 퓨리서치 조사를 보면, 미국 가톨릭 신자 10명 중 6명이 동성결혼을 지지한다. 사실 단지 이번만이 아니라, 서구에서는 급진화 물결이 있었던 1960년대 이후 낙태나 피임 등 여러 쟁점에서 바티칸의 공식 결정과 평신자 사이에 차이가 벌어져 왔다.
많은 사람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번 교령에 서명한 것에 특히 실망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소수자들에 대해 포용적이라고 평가돼 왔다. 2013년에 교황이 동성애자 사제를 향해 “내가 어떻게 그를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답한 것에 많은 성소수자가 위로를 받았다. 지난해 한 다큐멘터리에서는 동성애자의 시민결합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프란치스코 교황은 동성애에 포용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결국에는 동성애는 자연스럽지 않다는 기존 가톨릭 교리를 고수했고 결혼은 남녀의 결합임을 고수했다.
교황이 승인한 이번 교황청의 교령은 교황 자신의 이전 입장(동성애자의 시민결합 지지)에서도 후퇴한 것으로, 가톨릭 보수파의 편협한 입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보수파 주교들은 교회 내 성평등, 동성애, 성직자 성범죄와 같은 쟁점에서 작은 개혁적 언사에도 크게 반발해 왔다.
한편, 이번 교황청의 보수적 입장은 지난 수년간 유럽 등지에서 우익 포퓰리즘이 성장해 온 것의 영향일 수 있다.
일부 유럽 가톨릭은 우익 포퓰리즘 세력과 동맹을 맺으며 생존해 왔다. 예컨대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이 강력한 폴란드에서는 법과정의당(가톨릭을 기반으로 한 극우 포퓰리즘 정당)이 동성결혼 반대와 ‘가톨릭 가치’를 의제로 삼아 집권했다.
교황청의 이번 입장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내세우는 교황의 그간 강조와 정면 충돌하는 것이고, 천대받는 성소수자들을 내치고 보수파에 타협하는 편협한 입장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