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와 민족해방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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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스라엘에 맞선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이 분출하고 여기에 연대하는 시위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다.
고전적 제국주의 시대에 흔했던 식민 지배는 오늘날 드물어졌지만, 억압받는 민족과 해방을 위한 이들의 투쟁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스라엘이라는 식민지 정착민 국가에 맞서 싸우는 팔레스타인인들, 중국에 의해 탄압받는 소수 민족(티베트인들과 위구르족 등)이 중요한 사례다. 터키·이란·이라크·시리아 등으로 찢겨 천대와 탄압을 받는 쿠르드족도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 세계 모든 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배자들이 종교나 인종, 민족, 국적에 따라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려 하는 것에 맞서서 말이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의 혁명만이 “인민들 사이의 민족적 차이와 적대”를 종식시킬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혁명가들은 억압받는 민족들의 투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런 투쟁보다는 계급 투쟁에 더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당대에 일어난 민족 운동에 결코 초연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1848년 유럽을 휩쓴 혁명에 헌신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당시 일어난 민족 운동의 승리가 전체 혁명 운동에 도움이 되느냐를 잣대로 그런 운동들에 대한 태도를 정했다. 또, 마르크스는 당시 영국 노동계급이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아일랜드의 독립을 지지해야 스스로도 전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체제에 맞선 더 큰 투쟁의 맥락 속에서 민족 운동을 바라보는 관점은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민족해방 투쟁에 대한 입장을 정립하는 데에서 중요한 단초가 된다.
민족의 등장
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관점을 살펴보기 전에 우선 민족과 민족(국민) 국가가 무엇인지를 유물론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인류가 민족으로 나뉘어 있고 민족이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균일한 집단이라는 것은 가장 중요한 지배 이데올로기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단군 신화’를 포함해 민족마다 그 민족의 오랜 기원에 관한 신화들이 있다. 그러나 민족과 민족(국민)국가는 비교적 최근의 발명품이며, 유럽에서 자본주의와 함께 등장했다.
자본주의 이전의 계급 사회도 국가를 통해 조직됐지만 그 모습은 오늘날과 매우 달랐다. 지리적으로 넓은 범위 내에서 단일한 또는 두세 가지 언어를 공통으로 사용하는 인구 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보통 아예 언어가 달랐고, 일정 지역을 벗어나면 언어의 차이로 의사소통이 금세 어려워졌다. 동일한 법과 조세, 제도가 적용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중세 말, 몇몇 도시가 교역 중심지가 되고 여러 지역 사람들 간의 교류와 접촉이 늘면서 공통된 방언을 쓰는 네트워크가 생겨났다. 국가 운영자들은 그 공통 언어를 쓰는 게 조세와 행정 등에 유용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편, 신흥 부르주아지들은 이런 네트워크가 발전하고 국가와 손잡는 것이 안정적인 영업을 하고, ‘외국’ 경쟁자를 물리치고, 시장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처음에는 얼마간 자생적으로 진행된 이런 과정은 머지않아 의식적 목표가 됐다. 특정 방언이 국가의 공식 언어로 선포되고, 일정한 지역의 지배자들과 피지배자들을 ‘민족’이나 ‘국민’으로 묶는 이데올로기들이 개발됐다. 이 과정이 다소 자의적일 때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지배자들과 피지배자들을 결속시키는 끈을 만들어 내고 자본주의적 착취와 축적을 뒷받침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국익’ 이데올로기가 출현했다. 민족 또는 국민이 한 배를 탄 운명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들 사이에 계급적 차이 등은 있겠지만 국익은 그런 것에 우선하며, 국가는 전체 국민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미디어나 교육, 법·제도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주입됐고, 하나의 상식이 됐다.
한편, 자본주의적 국민국가가 발전하면서 국민국가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졌다. 몇몇 국가들은 제국주의 열강으로 성장해 국경 바깥 지역을 점령하고 거기 살던 사람들을 종속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제국주의 강대국의 지배를 받았고, 그들의 공통된 언어·전통·문화는 천대받거나 아예 불법이 되기도 했다. 이런 억압에 대한 대응으로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민족주의가 나타났다. 식민 조선에서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민족주의가 형성됐다.
이런 민족주의 운동을 이끈 자들은 중간계급일 때가 많았다. 이들은 대자본가처럼 옛 지배계급이나 제국주의 지배자들에게 양보나 떡고물을 얻어 낼 수 없었고, 사회의 후진성과 민족 억압으로 출세 기회도 막혀 있었다. 이들은 자기 민족 나름의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독자적 국민국가 건설을 해결책으로 봤다.
민족 억압으로 고통받는 농민과 신생 노동계급은 언제나 이런 운동의 동맹자였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농민·노동자 대중의 투쟁은 기존 착취자뿐 아니라 새로운 착취자에 맞선 투쟁으로도 번지기 쉬웠다는 점이다. 그래서 민족주의 운동 지도자들은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이들의 투쟁을 억제하려 했다. 심지어 그러다가 민족적 대의에서 이탈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자결권
이런 점 때문에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민족주의 운동들을 미심쩍어 했다. 폴란드 출신의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도 그랬다.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자들이 폴란드 독립을 슬로건으로 채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당시 폴란드는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룩셈부르크가 폴란드인들이 받는 억압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본의 국제적 경쟁이 심화하는 시대에 민족 독립 요구는 무의미하다고 봤다. 오히려 그런 요구는 폴란드 노동자들과 러시아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는 데에 일조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여기에 반대하고, 모든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 요구를 지지했다.
단순히 경제적 측면으로만 자결권 문제를 바라본 룩셈부르크와 달리, 레닌의 관점은 정치적이었다. 즉, 민족 자결권 지지가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에 미칠 영향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억압 민족과 피억압 민족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를 세심하게 구분했다.
여기에는 우선,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을 지지하지 않고서는 억압 민족 노동자들이 지닌 반동적 관념에 도전할 수 없다는 원칙의 문제가 있었다.
또, 전술·전략적 차원도 있었다. 억압 민족 노동자들은 자결권 요구를 지지함으로써 피억압 민족 노동자들에게 자신이 같은 편임을 보여 줄 수 있다. 그러면 피억압 민족 노동자들은 자기 민족의 자본가, 중간계급 지도자들의 악선전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고, 단지 제국주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투쟁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
자결권 지지가 곧 무조건 분리·독립 지지와 같은 것은 아니다. 억압 국가 내에서 자결권 지지는 반동적 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우는 한 방편일 수 있지만, 동시에 피억압 국가의 사회주의자들은 구체적 상황에 따라 실제로 분리하는 것을 반대할 수도 있다. 마치 이혼권이 부부에게 같이 살지를 말지를 자유롭게 결정하도록 열어 두듯이 말이다.
그러나 중간계급이나 자본가가 주도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피억압 민족의 운동이 국제 노동계급 투쟁에 도움이 되는 상황이 있었다. 식민 지배에 맞선 반란이 식민 모국을 약화시키고 식민 모국에서의 반란을 촉진할 수 있었다. 그런 경우 억압 민족 노동자들은 어떤 세력이 주도하는가와 별개로 그 운동을 지지해야 한다고 레닌은 역설했다.
룩셈부르크가 폴란드 내에서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민족주의와 투쟁을 벌인 것은 어떤 면에서는 옳았지만, 억압 민족에 속한 러시아 노동자들에게까지 폴란드 해방을 지지하지 말라고 한 것은 일면적이었던 것이다.
한편, 레닌은 피억압 민족의 사회주의자들에게는 그런 해방 운동의 일부가 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주도권
그러나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더 나아가려면, 동시에 혁명가들이 그 운동을 이끄는 자본가나 중간계급에게서 정치적으로 독립적이어야 한다고도 레닌은 경고했다. 이들을 정치적으로 비판할 수 있어야 하고, 노동계급이 투쟁의 주도권을 쥐게 할 수 있는 독자적인 전술·전략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주의 운동 지도자들이 질색할 방법이겠지만, 대중 파업이나 군대 내에서 사병 반란을 고무하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일 수 있다.
트로츠키는 레닌의 접근 방식을 더욱 발전시켜 연속혁명론으로 완성시켰다. 후진국의 민족 해방 투쟁은, 노동계급이 주도권을 장악해 끝내 노동자 권력 획득과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키고 그것을 국제적으로 확산시킬 때에만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이 연속혁명론의 핵심이다.
두 혁명가에게 민족해방 투쟁은 국제 노동계급 투쟁이라는 시각에서 평가돼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다른 인민에 대한 억압을 낳거나 제국주의를 강화시킬 민족주의 운동에 반대했다. 제1차세계대전이라는 구체적 상황에서 영국·프랑스·러시아 제국주의에 대항해 독일 제국주의와 손잡은 폴란드 민족 운동이 그런 사례였다. 중동에서 서방 제국주의의 경비견 노릇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도 또 다른 사례일 것이다.
식민지의 반란이 제국주의 질서에 타격을 주고 더 큰 반란을 촉발할 것이라는 레닌의 전망은 이후 사건에서 옳음이 입증됐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식민지 해방은 전 세계에서 혁명의 물결을 고무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혁명이 국제적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혁명 러시아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로 변질됐다. 스탈린은 민족해방 투쟁들을 소련 체제를 지키는 데에 이용하려 들었고, 종종 노동계급이 그런 투쟁에서 정치적 독립성과 주도력을 갖지 못하게 했다. 그 결과 많은 투쟁들이 좌절되거나 민족해방을 성취하긴 했어도 새로운 종류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물론, 그 후에도 민족해방 투쟁은 지배자들에게 종종 중대한 위협을 안겨 주곤 했다. 1960년대 베트남 민족해방 전쟁이 바로 그런 사례일 것이다. 이 전쟁은 미국 지배자들에게 심각한 정치 위기를 안겨 줬고 세계적인 대중 반란을 촉발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 또한 중동 전체의 제국주의 질서를 뒤흔들 잠재력이 있다.
오늘날 민족 문제는 더 복잡해진 측면이 있다. 민족 억압의 유산이 아직 남아 있는 가운데 일부 민족(국민) 국가들은 그 위상이 변하기도 했다.(한국이 대표적인 사례다.) 문제가 단순히 ‘억압 민족 대 피억압 민족’의 구도로 제기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민족 문제에 관한 레닌의 통찰은 이런 복잡한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게 해 주는 나침반을 제공해 준다. 그것은 제국주의를 강화하는 행동에는 반대하고, 그 체제를 약화시키는 모든 이들의 투쟁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