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와 민족 해방 운동: 특히 팔레스타인 독립 투쟁과 관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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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지지자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연대하는 국제 운동의 일부로서 활동하는 데에 요즈음 여념이 없다. 본지는 거의 매일 이와 관련된 기사를 웹사이트에 올리고 있다.
기본적으로 본지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은 반제국주의 민족 해방 운동, 특히 식민지 독립 운동이다. 이스라엘의 식민주의와 미국 제국주의의 억압으로부터 풀려나 자체의 독립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하마스 자신도 세계 종교인 이슬람교에 근거한 정당인데도 민족 해방, 식민지 독립 운동을 표방해 왔다.

물론 특정 종교, 가령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결합된 국가는 국민을 종교간
레닌과 트로츠키 주도하의 코민테른
그들은 이런 입장을
나중에 스탈린주의자들, 즉 공산당들과 일부 트로츠키 정설주의자들은 제3세계 민족 해방 운동을 놓고 이 공식을 폐기하고 그 대신 기회주의적으로 무비판적 지지를 하며 반미 진영을 구축하려 애썼다.
예를 들어,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
미국 SWP는 1979년 니카라과 혁명에 대해서도 기회주의적인 입장이었다. 니카라과 혁명은 독재자 소모사와 미국의 영향력을 타도한 민족 해방 혁명이었지만 사회주의적 노동자 혁명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미국 SWP는 그 혁명과 산디니스타를
기회주의자들에게
그래서 이참에 이 공식이 무슨 뜻인지 한 번 짚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 같다.
무조건적 지지의 의미
그 이유는 그 민족 해방 운동이 제국주의나 식민주의에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만일 그 민족 운동이 제국주의나 식민주의에 맞서지 않고 오히려 제국주의나 식민주의에 의존한다면 어찌 되는가?
이와 관련해, 필자가 몇 주 전 시온주의 민족 서사의 허구성을 들춰 내는 발제를 할 때 어떤 분이 한 질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유대인이 이스라엘을 건국한 것은 민족 자결권의 행사가 아니었느냐는 질문을 했다. 당시에 필자는 그 질문을 놓쳐 답변하지 못했는데 이 자리를 빌려 답변하겠다.

그런 민족 자결을 마르크스주의자는 지지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에 이스라엘 건국을 추진하던 부류의 유대인은 시온주의자로 그들은 제국주의
1999년 나토의 세르비아 공격 때 코소보주 알바니아인들의 자결권도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는 지지하지 않았다. 그 이유도 코소보주 알바니아인들이 당시에 나토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크라이나도 러시아 제국주의로부터 민족 자결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미국 등 나토의 지지를 받아 대리 전쟁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민족
우크라이나 전쟁 개전 전에 우크라이나의 일부였던 크림반도 주민의 다수가 러시아로의 병합을 지지했는데, 그런
북한의 무력 시위도 지지할 수 없다. 2000년대에는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북한의 자결권을 당연히 옹호해야 했지만, 이제 북한의 핵무기를 포함한 무력 시위는 중국과 러시아의 제국주의에 결합돼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와 결탁한 민족 자주화 움직임은 제국주의를 강화하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가 지지해서는 안 된다.
물론 국힘과 민주당, 자유주의자들
괜한 사족일지도 모르지만, 마르크스주의자는 억압 민족의 자결권도 지지해서는 안 된다. 가령 중국이 대만을 강제로 합칠 자결권을 지지할 수 없다. 오늘날 중국은 더는 1949년 혁명 전처럼 반식민지 또는 종속국이 아니다. 중국은 제국주의 국가이며, 특히 그 국가의 핵심을 이루는 한족은 피억압 민족이 아니다. 한족은 위구르족이나 티베트인 등 소수민족을 억압하는 억압 민족이다.
하마스를 ‘서슴없이’, ‘거리낌 없이’, ‘어정쩡하지 않고 온전히’ 지지하기
무릇 민족 해방 운동은 민족주의자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는 그 민족이 억압 민족이 아니고 제국주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한에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종교를 불문하고, 인종을 불문하고, 또 정치를 불문하고 이스라엘 국가와 시온주의 정착자들에 의해 억압받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과 그 후원자인 미국 등 서방에 맞서 싸우고자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저항을 무조건 지지한다. 특히, 그들의 정치가 주로 사회주의가 아니라 하마스라는 이슬람주의 정당으로 대표되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국제적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일각에서는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으로 시작된 팔레스타인 투쟁을 지지해야 할지 몰라 처음에 크게 망설였다. 무조건적 지지 입장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마스가 아무리 2017년에 강령을 개정했어도 여전히 이슬람 국가를 지향할 것이고, 유대인 혐오적일 것이고, 성차별적일 것인 데다, 여전히 성소수자 혐오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하마스 지지가 별로 내키지 않았다.
특히, 민간인 납치와 인질 억류가 그들에게 큰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하마스의 이스라엘 민간인 인질 삼기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하마스는 이스라엘과 반식민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식민지 정착민이나 그 유관자 또는 그런 혐의자를 억류하고 조사하며 인질로 잡아 두는 것은 전쟁 포로
비록 전쟁 포로를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것이 모든 종류의 해방 투사다운 면모이겠지만, 알제리의 정신과 의사이자 반식민주의 운동가 프란츠 파농
그런 일이 없이 반식민주의 저항이 실행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딱한 도덕주의자에 불과하다. 1916년 아일랜드의 부활절 봉기를 실패한
한편, 하마스 지지 회피자들은
그러나 곧 이스라엘의 무지막지한 반격이 시작됐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지나치다고 생각하게 됐고, 무조건적 지지 회피자들은 무언가 행동하지 않으면 주도권을 더 급진적 경향들에 빼앗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묘수가 그들에게 떠올랐다. 하마스에 대해 말하지 않고 그저 이스라엘의 공격만 반대한다는.
그러자 평화주의 경향의 세력들이 대거 가세할 여지가 생겨났다. 평화주의는 전쟁과 폭력이 언제나 잘못된 것이라는 견해다. 평화주의자들이 이스라엘의 전쟁 노력을 반대하는 데에 동참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평화주의의 약점이 한국에서 언뜻, 일찍이 드러났다. 대표적인 개혁주의 정당들이 국회의 양비론적 결의안을 지지했던 것이다. 그 결의안을 읽어 보면 하마스의 무장 저항 비난에 좀 더 무게가 실렸음을 알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이스라엘이 일방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폭탄과 기아와 질병으로 대량 학살하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평화주의의 정치적 약점이 더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무비판적이지는 않다
어떤 민족 해방 투쟁
특히, 오늘날 피억압 민족의 해방 투쟁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1980년대까지 20세기 중엽에 중국, 쿠바, 베트남, 이란, 니카라과 등지의 혁명들보다 훨씬 어려운 조건에 처해 있다. 특히, 세계 경제 위기와 함께 제국주의 열강의 지정학적 경쟁과 갈등이 심각해 이들이 피억압 민족의 국가적 자주성을 자기네 이해관계에 맞춰 제약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타협적인 민족 해방 운동의 입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오슬로협정과 파타, 2국가안 등이 어떻게 귀결됐는지가 이를 잘 보여 준다. 역사가이자 저명한 반제국주의 활동가 타리크 알리는 2009년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의 연설에서 오슬로협정을
그러므로 팔레스타인 민족 해방 운동은 유대인과 아랍인, 무슬림과 그리스도인이 함께 살며 평등권을 누리는 비종교적
이런 혁명적 전망에 비춰 볼 때 우리의 하마스 비판은 그들의 종교가 아니라 개혁주의
사실 하마스는 2국가안에 잠시 경도된 적도 있고, 파타와 타협적으로 협상하는 모습도 보인 적이 있다.
비종파적인 단일 민주 팔레스타인 독립국 수립은 시온주의 국가의 강제적 해체를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핵심적으로 토지 소유 문제 때문이다. 정착자들이 강탈한 토지를 순순히 돌려줄 리가 없다.
게다가 미국과 서구의 제국주의가 시온주의 국가를 순순히 내려놓을 리도 만무하다.
결국 트로츠키가 말한 연속혁명
이런
이스라엘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수행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순전히 군사적 수단만으로 이스라엘에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해방될 수 있는 것은 2011~2013년 이집트 혁명에서 언뜻 그 단초가 보였다. 지금의 팔레스타인 저항이 다시 아랍 세계에 불씨를 던지기를 바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