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캘리니코스 논평:
미국을 수렁에 빠뜨린 전쟁광 럼즈펠드 사망
〈노동자 연대〉 구독
[ ] 안의 말은 번역자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첨가한 말이다.
“도널드 럼즈펠드는 패배하지 않는다.” 제임스 만은 조지 W 부시의 전쟁 내각을 다룬 책 《벌컨의 부상》[국역: 《불칸집단의 패권형성사》(박영률출판사)]에서 이것이 “공화당 내에서 수십 년간 암암리에 퍼진 속설”이라고 했다.
6월 29일 사망한 도널드 럼즈펠드는 1960년대 말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보좌관을 지냈다. 닉슨의 대화를 담은 워터게이트 도청 기록을 보면, 닉슨과 그의 냉혹한 보좌관 존 얼리크만과 H R 홀더먼이 럼즈펠드를 야심 있지만 신뢰할 수 없는 책략꾼으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럼즈펠드는 1974년 8월 닉슨이 물러난 후 그러한 평가를 입증했다. 후임 대통령 제럴드 포드는 럼즈펠드를 백악관 비서실장으로 임명했다가, 이후 그 자리에 럼즈펠드의 제자이자 오른팔이었던 딕 체니를 앉히고 럼즈펠드는 국방장관에 임명했다. 이들은 소련과의 데탕트[긴장 완화]를 추진하던 당시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의 대외 정책을 체계적으로 방해했다.
럼즈펠드와 체니는 소장 관료들과 함께 미국이 베트남에서 당한 수치스런 패배를 뒤집고자 했다. 이들은 1970년대 후반에 전개된 신냉전의 기틀을 닦았다.
럼즈펠드는 대권 욕심을 품고 이를 무심결에 드러내기도 했지만 아무 소득도 거두지 못하자 재계로 진출해 떼돈을 벌었다.
럼즈펠드는 로널드 레이건의 중동 특사를 지냈다. 이 직책에 있을 때 럼즈펠드는 1983년 12월 바그다드로 날아가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만났다.
럼즈펠드는 후세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이라크처럼 세계와 중동에서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미국은 이라크를 이란에 대항하는 균형추로 삼고자 했다. 레이건과 럼즈펠드는 후세인이 이란과, 이라크 내 쿠르드족을 상대로 화학 무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첩보를 무시했다.
이란이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소련이 몰락한 이후 후세인의 야심이 미국의 중동 패권을 위협하게 되고 나서야 후세인의 범죄는 도마에 올랐다. 럼즈펠드는 신보수주의[네오콘] 압력 단체에 동참했다. 이 단체는 1991년 당시 대통령 조지 H W 부시가 연합군을 이끌고 1991년 제1차 걸프전에서 이라크를 패배시킨 후 후세인을 권좌에서 끌어내리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고 주장했다.
10년이 지나고 조지 H W 부시의 아들 조지 W 부시가 대통령이 된 후에야 럼즈펠드는 이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를 얻었다.
럼즈펠드의 오랜 친구이자 이제 아들 부시의 부통령이 된 체니는 럼즈펠드를 국방장관직에 앉히는 데 힘을 실어 줬다.
그러고 얼마 후인 2001년 9월 11일 뉴욕과 워싱턴 DC가 공격당했다. 9·11 공격은 이라크와 아무 상관도 없었지만 럼즈펠드는 보좌관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UBL[오사마 빈 라덴 ─ 캘리니코스]만이 아니라 S.H.[사담 후세인 ─ 캘리니코스]도 동시에 칠 만한 일인지 판단할 것.”
이라크를 공격 목표로 삼는 근거가 된 전략을 가장 명확히 정식화한 사람은 럼즈펠드의 국방부 차관이 된 울포위츠였다.
울포위츠는 “신흥 강국”, 특히 중국의 부상이 미국 제국주의의 세계적 패권을 위협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이라크를 점령하고 친서방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면, 미국의 주요 경쟁국들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핵심 지역인 중동에서 미국의 지배를 확고히 다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럼즈펠드는 이 전략을 실행에 옮겼다. 럼즈펠드는 약자에 대한 오만함에서 나오는 매력으로 미디어 스타가 됐다. 만은 2004년에 럼즈펠드를 “미국의 노련한 전쟁 장관”이라고 불렀다.
반면, 럼즈펠드 사망 후 《애틀랜틱 먼슬리》의 조지 패커는 이렇게 썼다. “럼즈펠드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국방장관이었다.” 럼즈펠드의 중대한 실수는, 축소된 인원이지만 민간 기업들과의 연계 속에서 지원받는 중무장한 원정군을 보내면 이라크라는 가난하지만 거대하고 복잡한 나라를 점령하고 지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재래식 전쟁에서 후세인의 군대를 패배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럼즈펠드와 그의 장군들은 이라크 전역에서 벌어진 무장 저항에 속수무책이었다.
무차별적 화력 사용도, 아부그라이브 감옥의 고문도 효과가 없었다. 종파 간 갈등도 부추겨 봤지만 통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2006년 11월 부시는 럼즈펠드를 경질해야 했다. 2011년에는 미국이 후원하는 이라크 정권이 이라크 주둔 미군에 철군을 강요했다.
젊은 시절 럼즈펠드는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가 낳은 문제와 씨름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더 심각한 패배의 기획자였다. 럼즈펠드와 그가 떠받든 제국 모두 커다란 패배를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