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주의의 고차원적 형태, 민중전선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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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대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노동자 계급의 다수는 중도 친자본주의적 민중주의자(포퓰리스트)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 말고 다른 도리가 없다고 느낄 것이다. 물론 소수 노동자들은 더 멀리 내다보고 심상정 정의당 후보에게 투표할 것이다.
1934년 10월 이래로 각국 공산당은, 어느 정당이 공산주의에 조금이라도 유화적이기만 하면 설사 자본주의를 한사코 지키겠다는 입장일지라도 그 당들에 투표 행위 이상의 종합적이고 무비판적인 지지를 제공해 왔다.
최일붕 노동자연대 운영위원이 자본주의적 정치 세력과 전략적 연대를 하는 노선의 위험성을 역사적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이 글은 그가 오래전에 쓴 것을 손보아 내놓는 것이다.
1924년 소련에서는 ‘일국사회주의’론을 추구하는 스탈린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소련 일국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이룩한다는 일국사회주의론은 소련 내에서는 망상이었지만, 국제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기회주의 노선을 수반했다: 소련은 다른 나라의 혁명을 지지하기보다는 소련 한 나라 안에서 계급 없는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이를 위해 다른 나라 공산당들은 소련의 국경수비대 구실을 한다. 후진적인 식민지·반(半)식민지 사회에서도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은 포기해야 한다. 심지어 선진국에서조차 노동자 권력이 아니라 반파시즘 또는 반독점 민중 연합이 대안이다.
1925년 3월 국제공산당(이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는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노선에 따라 이전의 좌경 모험주의 노선을 폐기하고 매우 노골적인 우경 기회주의 노선으로 돌아서기로 했다.
‘일국사회주의’론의 진정한 주창자 니콜라이 부하린이 새 정책들을 집행하기에 안성맞춤인 인물로 떠올랐다.(그 직전 시기 코민테른의 지도자는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였다.)
1926년 영국 총파업
스탈린과 부하린의 코민테른은 1926년 영국 총파업에 직면했다. 총파업이 정점에 도달하자 영국 노동조합총협의회(이하 TUC)는 더 나아가기를 원하는 투쟁적 현장조합원들에게 등을 돌렸다. 그런데도 코민테른은 영·소노조위원회를 통해 TUC를 지지했고, 영국공산당(CPGB)에도 그렇게 하기를 강요했다. 이를 위해 코민테른은 TUC에 대한 착각을 영국 공산당에 조장했고, 그럼으로써 결국 공산당을 정치적으로 마비시켰다. 그리하여 1926년 총파업에 대처하는 공산당의 구호는 “모든 권력을 TUC 총평의회[지도부]로!”였다. 결국 총파업은 패배로 끝났다.
그러다가 1927년 영국 정부가 소련과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그러자 TUC는 자신의 친구 소련을 걷어차 버렸다. 정말로 손해 본 측은 영국 노동자 계급이었다. 그들은 방향감각을 잃었고, 크게 사기 저하됐고, 사회주의를 깊이 불신하게 됐다. 바로 이때의 경험이 그 뒤 영국에서 개혁주의가 만연하게 된 결정적 요인이었다.
1925~27년 중국 노동자 혁명
1925~28년 시기 코민테른이 채택한 우경 기회주의 노선이 최악의 재앙을 가져다준 곳은 뭐니 뭐니 해도 중국이었다. 당시 중국은 영국과 일본의 반(半)식민지였다. 중국의 중부 지역은 가장 막강한 친영 군벌인 우페이푸(吳佩孚)가 지배하고 있었고, 북부 지역은 그다음으로 강력한 친일 군벌 장쭤린(張作霖)이 지배하고 있었다.
남부 지역은 이들보다 약체인 장제스(蔣介石)와 왕징웨이(汪精衛)의 친소 국민당이 지배하고 있었다.(그밖에도 여러 군소 군벌들이 군웅할거 하고 있었다.)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은 중국을 통일하려면 무기가 필요했는데, 바로 소련이 군사 원조를 제공했다.
일국사회주의 노선에 따라 소련도 우방이 필요했으므로, 군사고문단까지 보내며 국민당을 지지했다. 뿐만 아니라, 창당한 지 2년밖에 안 된 중국 공산당을 국민당에 입당시켰다. 이를 정당화하려고 스탈린·부하린의 코민테른은 국민당이 부르주아(친자본주의) 정당이 아니라 노동자·농민·지식인·중소규모 자본가 등의 ‘4계급 블록’이라는 민중주의적 개념을 고안해 냈다.
1925년 5월 30일 영국이 지배하는 상하이(上海)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해 12명을 살해했다. 이에 항의하는 총파업이 상하이에서 일어나 거의 40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했다. 6월 11일 한커우(漢口)에서 영국 군대가 시위대에 발포해 8명이 살해당했고, 6월 23일 광둥(廣東)에서 영·프 군대가 시위대 52명을 살해했다. 총파업은 더욱 확산돼 홍콩으로까지 번졌다. 1924년에는 1천 명밖에 안 되던 공산당은 이제 3만 당원 규모로 늘어났다.
국민당은 민족주의 정당이었으므로 5월 30일의 반영 항의 시위를 지지했다. 그러나 국민당은 또한 부르주아 정당이었으므로, 총파업을 처음에는 미온적으로 대하다가 이내 커다란 적대감을 드러냈다. 1926년 3월 광둥에서 장제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그 지역 공산당 지도자들과 파업위원회 주도 노동자들을 구속했다.
그런데도 스탈린·부하린의 코민테른은 국민당을 탈당하지 말고 묵종하라고 중국 공산당에 명령했다. 한술 더 떠 코민테른은 국민당의 코민테른 가입을 승인했다!
장제스는 소련의 스탈린주의 관료가 추구하고 있는 게 뭔지 매우 잘 알고 있었으므로, 더 자신만만해져 1927년 3월 쿠데타 조짐을 다시 보이며 세간의 여론을 떠봤다.
그럼에도 코민테른은 저항하지 말라고 명령해 중국 공산당을 무장 해제시킨 채로 놔뒀다.
1927년 4월 12일 드디어 장제스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번의 쿠데타는 1926년 3월의 광둥 쿠데타와 달리 대량 학살이었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데다가 국민당에 발이 묶인 공산당은 꼼짝없이 당했다. 그리고 혁명적 노동자들과 함께 피바다에 빠져 버렸다.
그런데도 코민테른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이번에는 왕징웨이 쪽에 붙었다. 왕징웨이는 국민당 좌파이므로 장제스 같은 우파와는 다르다는 것이 정당화 논리였다. 그러나 왕징웨이도 우한(武漢) 시에 정부를 세운 뒤 곧 공산당을 배신하고는 친일파로 변신해 버렸다.
영국에서처럼 중국에서도 1927년의 참패 경험은 그 뒤 중국 노동자 계급의 수동성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1934년 10월 이후 민중전선
1933년 1월 독일에서 히틀러가 승리했다. 그 뒤 일년 남짓 동안에도 소련과 독일 공산당은 사회민주당이 ‘사회 파시즘’이라는 입장을 계속 고수하며 나치 독재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향하는 독일의 전진을 가속시키고 있다”고 강변했다. ‘사회 파시즘’은 ‘사회주의적 파시즘’의 준말로, 사회민주주의가 파시즘의 변형일 뿐이라는 뜻의 용어였다. 이 황당무계한 말은 1928~34년 기간 코민테른의 초좌파적 종파주의 노선을 대표했다.
그러나 1934년 10월 코민테른은 1백80도 선회해 1925~28년의 ‘사회 애국주의’ 노선으로 되돌아가는 우경화를 시작했다. 사실, 이런 우경화의 위험은 1928~34년의 초좌파적 종파주의 기간에도 나타난 바 있다. 독일 공산당은 파시스트들의 이데올로기적 외피를 훔쳐 입어 보려는 파렴치한 시도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니라 독일의 ‘민족해방’을 요구하며 독일 ‘국민’의 혁명을 말하기 시작했다.(L Trotsky, “Against National Communism,” The Struggle Against Fascism in Germany, pp.93-114.)
1934년 10월 이후 코민테른의 민중전선 정책은 계급 협력이라는 본질 면에서 1925~28년 노선(위에서 설명됨)의 재연이었다. 민중전선은 파시즘에 대항해 부르주아(친자본주의) 정치 세력까지 포함한 모든 ‘민주’ 세력의 대연합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당과 동맹하는 정책은 노동자 계급이 반동에 저항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마비시킨다.
민중전선은 공동전선과 전혀 다른 것이다. 공동전선은 코민테른 제3차와 제4차 대회(각각 1921년과 1922년)에서 레닌과 트로츠키가 발의한 정책이고, 1930년대 초 트로츠키가 독일 반파시즘 운동의 전술로서 다시금 강조한 것이다.
공동전선은 노동자 계급 정당들의 부분적 행동 통일을 위한 전술인 반면, 민중전선은 부르주아 정당까지도 포함하는 종합적인 계급 협력 전략이다.
공동전선은 구체적인 특정 목표를 위해 함께 싸운다는 실용적 합의에 바탕을 두는 반면, 민중전선은 자본주의 정부 수립 강령을 바탕으로 활동한다.
공동전선의 전제 조건은 혁명적 조직의 완전한 정치적 독립성과 비판의 자유인 반면, 민중전선 속의 공산당은 동맹한 다른 정당들을 비판하지 않는다(또는 못한다).
마지막으로, 공동전선은 혁명적 당이 계속 다른 활동을 하면서 병행하는, 당 활동의 한 갈래일 뿐인 반면, 민중전선은 스탈린주의 정당에게 총체적 전략이다.
1936년 프랑스와 스페인
이제 민중전선이 어떻게 끝나고 말았는지 알아보자. 프랑스에서는 1934년 봄부터 공산당과 사회당 및 급진당 사이에 민중전선 활동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급진당은 당명과 달리 자유주의적 정당이었다. 다만 당원의 대다수가 중간계급 성원들이었다.
1935~36년의 노동자 운동 고양에 힘입어 프랑스 민중전선은 1936년 5월 선거에서 승리해 새 정부를 구성했다. 그러자 6월 총파업과 대대적 공장 점거 운동이 일어났다. 프랑스에서는 파리 코뮌 이래 최대 규모의 노동자 운동이었다. 이 대규모 노동쟁의는 민중전선 정부의 지향을 넘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민중전선 정부의 수반인 사회당 지도자 레옹 블룸과 공산당은 어떻게든 이 투쟁을 규제해 질서를 회복하려 했다. 공산당 지도자 모리스 토레스는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민중전선은 혁명이 아닙니다. 파업을 시작했으면 끝낼 줄도 알아야 합니다.”
공산당과 사회당의 계급 협력 방침 때문에 방향감각을 잃은 노동자들은 사기 저하돼 업무에 복귀했다. 환멸과 냉소에 빠진 프랑스 노동자 계급은 결국 1940년 나치의 점령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게 된다. 이 사태의 책임은 노동자 계급의 전위를 자처한 공산당이 져야 한다.
스페인에서는 1931년 왕정을 타도한 혁명이 계속 전진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파고(波高) 위에 올라탄 민중전선이 1936년 2월 선거에서 이겨 새 정부를 구성했다. 민중전선은 공산당과 사회당과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이하 POUM: ‘품’이라고 읽음)이라는 노동자 정당들과 두 개의 부르주아 정당들 사이에 구축됐다.
그해 7월 파시스트인 프랑코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내전이 시작됐다. 노동자들은 즉각 대응해 주요 도시, 특히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 권력을 창출했다. 파시스트들은 곳곳에서 격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스페인 사회가 선진 자본주의가 아니고 또 파시즘의 위협이 당면하고 있으므로, 눈앞에서 전진하고 있던 노동자 혁명을 퇴각하게 하고, 후진해서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부터 완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단계혁명론이 혁명 상황에서는 반혁명적임을 보여 주는 산 증거가 중국에 이어 스페인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당시 스페인의 최대 노동자 정당은 전국노동조합총연맹(이하 CNT)였다. 이 아나키즘적 신디컬리스트 조직은 지역별로 민중전선 정부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는 민중전선 정부가 노동자 혁명을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돌려놓아 ‘정상화’시키려는 것에 CNT가 협력한다는 것을 뜻했다.
코민테른의 논리는 간단했다. 프랑코부터 퇴치하고, 그다음에야 비로소 노동자 혁명에 착수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코를 격퇴할 수 있는 힘은 바로 눈앞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노동자 권력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민중전선 정부가 억눌렀으니 프랑코를 도대체 어떻게 격퇴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스탈린주의자들은 소련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혈 숙청을 스페인에서도 재현했다. 스페인 스탈린주의자들의 물리적 마녀사냥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넘어 POUM과 CNT의 당원들까지 겨냥했다.
프랑코를 물리치려면 노동자 권력이 노동자들의 혁명적 투쟁을 고무하고, 농민에게 토지를 주고, 모로코 독립을 허용했어야 했다. 그러나 혁명가들이 부르주아 정당들도 포함된 민중전선 속에서 손발이 묶여 버렸으니, 노동자 권력은 확장될 수도, 계속 존속할 수도 없었다. 1937년 6월 이후 프랑코의 승리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트로츠키의 비판
트로츠키는 민중전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민중전선을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을 위해 프롤레타리아를 배신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트로츠키는 아나키즘적 신디컬리스트 조직 CNT와 중간주의적(혁명적 입장과 개혁주의 입장 사이에서 동요하는) 조직 POUM도 민중전선에 참여했음을 주목했다. 이를 보며 그는 민중전선을 프롤레타리아 계급 전략의 일종이라고 봤다. 그러므로 단순히 폭로만 할 것이 아니라 이론적 논박이 필요하다고 봤다.
트로츠키가 다룬 첫 번째 이론적 논점은 민중전선이 멘셰비즘의 변형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1930년대 공산당과 사회당을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 사이 러시아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에 비유했다. 1917년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카데트(입헌민주당)를 포함한 상시적 동맹을 형성하고 임시정부라는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반면, 볼셰비키는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소비에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볼셰비키는 임시정부에 타협하지 않았다. 볼셰비키의 요구는 임시정부라는 민중전선을 결국에는 분쇄하는 것, 카데트와의 동맹을 파괴하는 것, 그리고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민중전선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 아니라, 반파시즘 투쟁의 효과적 무기도 전혀 되지 못하는 도구이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지적했다.
“민중전선 이론가들은 산수의 가장 기초인 덧셈을 넘어서지 못한다. ‘공산당+사회당+아나키스트+자유주의자 〉 그 각각의 단순한 합’이라는 부등식이 그들 지혜의 전부다. 그러나 산수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역학도 필요하다. 힘의 합성을 뜻하는 평행사변형에서 합성되는 힘들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면 합력(合力)은 그만큼 짧아진다. 정치적 동맹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려 한다면 합력은 영(零)이 될 수도 있다.”
“때때로 공통의 정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노동자 계급 정치조직들의 동맹이 꼭 필요할 때가 있다. 특정 상황에서 그런 블록은 프롤레타리아의 이해관계와 엇비슷한 이해관계를 갖는 천대받는 프티부르주아 대중을 끌어당길 수 있다. 그런 블록의 연합된 힘은 각 구성 부분 힘들의 단순한 합계보다 훨씬 더 클 수 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정치 연합은 그 기본 이해관계가 1백80도 반대인 두 계급 사이의 동맹이므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 세력을 마비시키는 데에만 이바지할 뿐이다.”
“내전에서는 적나라한 강압이 효과를 거의 못 거두므로 내전의 두 당사자들에게 최고의 자기 절제심이 필요하다. 그런데 노동자와 농민은 자신의 해방을 위해 싸울 때만 승리를 확신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를 부르주아지의 지도에 예속시키는 것은 미리부터 패배를 확신시키는 것이 된다.”
트로츠키가 다룬 두 번째 이론적 논점은 후진국 노동자 계급이 농민이나 도시 프티부르주아지와 동맹하는 문제였다. 그는 자본주의적 정당과의 동맹으로는 노동자 계급이 프티부르주아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정당이 선거에서 주로 프티부르주아지로부터 표를 끌어모으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와 도시·농촌 중간계급의 동맹은 그들의 전통적 의회 내 대변체[즉, 자본주의적 정당]와 비타협적으로 싸울 때만 실현될 수 있다. 농민을 노동자 편으로 끌어당기려면 농민을 급진당 정치인들로부터 떼어내야 한다.”
프티부르주아지는 극단주의에 놀라 뒤로 나가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가장 강력하고 가장 결연한 지도를 제공하는 사회세력에 끌린다. 그러므로 중간계급을 견인하려면 노동자 계급이 파시스트들보다 강력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노동자 계급이 자신의 힘에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투쟁을 약화시키는 것은 중간계급을 반동 편에 넘겨주는 것이다.
트로츠키가 다룬 세 번째 이론적 논점은 자본가 지배계급의 구조와 관련된다. 스탈린의 코민테른은 파시즘을 “금융자본[또는 독점자본]의 테러 독재”라고 규정했다. 이것은 파시즘이 자본가 계급의 단지 일부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라는 견해에서 나온 명제다. 그리하여 자본의 다른 부분은 프롤레타리아의 반파시즘 동맹 세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광범한 ‘민주대연합’이나 ‘반독점 [민중민주]동맹’ 따위의 이론적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프랑스의 민중전선은 “2백대 가문에 맞서는 국민의 투쟁”을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비판했다. “물론 인구의 95퍼센트, 심지어는 98퍼센트가 금융자본의 착취를 받고 있다. 그런데 이 착취는 위계적으로 조직돼 있다. 착취자-하위 착취자-하위 착취자의 하위 착취자 등등의 식으로 말이다. 이 위계 체계를 통해 최상위 착취자들이 국민의 대다수를 예속시킬 수 있다. 국민이 하나의 계급적 핵심을 중심으로 재편되려면 이데올로기적으로 재편돼야 하는데, 이것은 프롤레타리아가 ‘민중’이나 ‘국민’이나 ‘민족’으로 용해되지 않을 때만 이룰 수 있는 일이다.”
“급진당 정치인들이 프랑스를 지배하는 2백대 가문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는 양 말하는 것은 대중을 파렴치하게 기만하는 행위이다. 그 2백대 가문은 공중에 붕 떠 있는 게 아니라 금융자본 체계의 최고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백대 가문을 타도하려면 경제·정치 체제를 전복해야 한다. 그런데 급진당 정치인 에리오와 달라디에는 플랑댕이나 들라로크[플랑댕과 들라로크는 둘 다 민중전선 정부 등장 앞뒤로 유력했던 주류 우파 정치인들이었다 ― 최일붕] 못지 않게 그 체제의 유지가 득이 된다. 프랑스 공산당의 주장과 달리, 한줌밖에 안 되는 재벌에 맞서는 국민적 투쟁이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이 있어야 한다. 즉, 계급투쟁이 문제이며 이것은 오직 혁명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
하나의 계급 전략으로서 민중전선이 전제로 깔고 있는 이론적 근거를 분쇄하고자 트로츠키가 살펴본 위의 세 가지 이론적 논점들을 종합해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부르주아적 정당과 연합하는 정책은 노동자 계급이 반동에 저항할 수 없게 마비시켜 버린다.
짧은 맺음말
민중전선 정책은 모든 시기, 모든 나라에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소련의 몰락 이후 전 세계적으로 스탈린주의 정당은 대부분 사멸하거나 크게 변신했다. 그러나 한국은 북한의 존재 때문에 사정이 다소 다르다. 비록 자민통계가 과거에 비해 현저히 현장(일터와 캠퍼스) 통제력이 약화됐지만, 일부 대기업과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강력하다.
게다가 다른 좌파가 강력하지도 않다.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 속에서도 겪었지만, 민중주의가 운동 안에서 여전히 강력해, 운동의 적극적 지지자의 다수가 노동자 계급이었는데도 운동이 민주주의 투쟁의 한계를 돌파해 계급투쟁으로 승화되지 못했다.
민중전선은 민중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구축되는 고차원의 정치적 연합이다. 새 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종합적인 개혁주의 전략인 것이다. 특히 자민통계가 기층에서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민중전선, 즉 계급을 초월한 국민 연합은 효과를 낸다.
물론 민중전선은 선거에는 흔히 유용하다. 하지만 설사 부르주아 정당에 대한 투표가 필요할지라도 단지 투표 행위에만 국한하지 않고 전반적인 정치적 동맹으로까지 나아간다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에 제동을 거는 효과를 낸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사회주의자는 다가올 선거에서 투표의 비중을 부차화하고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에 헌신해야 한다.
추천 도서
- 해럴드 R. 아이작, 《중국 혁명의 비극》, 정원섭·김명환 옮김, 숨쉬는책공장, 2016 (688쪽, 19,500원).
- 트로츠키, 레온, 《프랑스 인민전선 비판》, 김명수 옮김, 풀무질, 2001 (350쪽, 12,000원, 절판).
- 트로츠키, 레온, 《스페인 혁명》, 정민규 옮김, 풀무질, 2008 (432쪽, 20,000원, 절판).
- 최일붕, 《공동전선 ― 이론과 실천》, 노동자연대 소책자,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