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캘리니코스 논평:
프랑스의 사상가 프레데리크 로르동이 파업을 찬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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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프랑스의 파업 물결과 대중 시위는 1970년대 이래 선진 자본주의 경제가 직면한 가장 큰 사회·정치 위기다. 그 투쟁은 사회철학자 프레데리크 로르동의 저작에서 이론적 표현으로 나타났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웹사이트에 개설된 로르동의 블로그에는 현 위기에 관한 탁월한 논평이 실려 있다. 〈소셜리스트 워커〉가 그것의 영역본을 보도한 바 있다. 로르동은 흠잡을 데 없는 표현을 구사하는 재능이 있다.
로르동은 이렇게 썼다. “마크롱은 다른 것을 인정한 적이 결코 없다. 마크롱은 오직 자신하고만 대화한다. 그에게 외부 세계는 없다.” 또, 이렇게 지적했다. “여기서 실패 요인은 인터신디칼(노동조합 간 조정 회의)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기다리기만 했고, 모든 대안을 거부하며 그 외에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았다.”
이것은 바로 영국 철도해운운송노조(RMT)와 대학노조(UCU) 지도자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그들은 애초에 실패가 예정된 자기 제한적 투쟁 전략에 끈질기게 매달리며 투쟁을 접으려고 애쓰고 있다.
로르동은 코뮈니슴을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보고 지지한다. 그러나 로르동은 통상적으로 일컫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프랑스의 비판 사회학 전통에 더 가깝다. 그 전통의 가장 저명한 대표자는 피에르 부르디외였다.
그러나 로르동에게 가장 큰 사상적 영향을 미친 인물은 17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이다. 로르동은 《자본주의, 욕망, 예속: 마르크스와 스피노자》(2010)라는 책을 썼다. 거기서 로르동은 마르크스의 논의를 스피노자로 보충해서, 어떻게 자본가들이 그들의 이윤을 창출하는 노동에 노동자들을 “자원”하게 만드는지를 설명하려 한다. 그러면서 로르동은 여러 흥미로운 통찰을 제시하지만, 사실 이런 종합은 이론적으로는 그다지 결실을 맺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 2023년의 시점에서 보면 그 책은 다소 비관적이다. 예컨대 로르동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노동자에게 희생을 무한정 강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정한 세력 균형, 특히 저항의 현 상태, 더 정확히는 저항의 부재 때문이다.”
반란에 휩싸인 사회
그러나 이제 로르동은 사회가 반란에 휩싸여 있다고 환호한다. “지배 질서가 와해되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일은 아름답다. 작지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권력자들을 떠받쳐 주던 체념에 젖은 고립과 원자화된 상태를 끝장낸다.”
무엇이 그에게 영향을 준 것일까? 2007~2009년 세계 금융 위기의 파괴적인 효과가 결국 그에게 영향을 준 듯하다. 그리고 지배계급이 그 위기를 촉발한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고수하거나 심지어 더 심화시키려고 벌인 헛되고 파괴적인 노력이 함께 영향을 미친 듯하다.
로르동은 이렇게 썼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특히 2017년 이래 하나의 사회 모델이 총체적으로 실패했다. 그들은 이 나라를 파괴했다. 노동총연맹(CGT)이나 인터신디칼이 아니라 —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 오직 그들 혼자서 그렇게 했다. 유능한 자들이 나라를 망쳤다. 나라는 총체적 혼란에 빠져 있다.
“이것이 후기 자본주의에 내재한 (수많은 모순 중) 한 가지 모순이다. 부르주아지의 무능이 그 자체로 역사적 힘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자본주의의 ‘창조적 파괴’를 찬양한)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의 말을 살짝 바꾸면 알 수 있다. 바로 파괴적인 파괴다. 거기에 적절한 명칭을 붙이자면 “매킨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마크롱 정부는 팬데믹 대응을 비롯한 온갖 정부 업무를 매킨지 등의 컨설팅 회사들에 외주한 바 있다 — 역자]
흥미로운 지적이다. 필자가 사는 영국에서도 사람들이 비슷한 지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파괴적인 파괴”를 그저 [전 총리] 보리스 존슨과 브렉시트 탓으로 돌릴 때가 많다. 그러나 로르동은 영국에서 보수당이 일으킨 난장판이 더 광범하고 체계적인 문제의 징후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나는 그것이 자본주의의 자체 재생 능력이 제구실하지 못하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본다.
2023년의 격렬한 투쟁은 로르동의 코뮈니슴에 훨씬 더 구체적인 계급적 내용을 부여한다.
“생산에 대한 생산자들의 결정권이라는 슬로건은 호소력이 있으며, 그와 직접 연관된 노동계급을 넘어 훨씬 더 광범한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다. ⋯ 정당성, 따라서 결정권은 오로지 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있다.
“완전한 무지에도 불구하고 남의 노동을 조직하겠다고 나서는 자들 — 컨설턴트와 기획가들 — 은 기생충일 뿐이다. 그들을 몰아내야 한다.”
프랑스의 투쟁 앞에 놓인 길은 전혀 곧고 평탄하게 뻗어 있지 않다. 그러나 벌써부터 이 반란이 재능 있는 한 좌파 지식인의 사고를 명료하게 만들고, 그 지식인으로 하여금 투쟁의 논리를 탁월하게 표현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 실로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