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물연대 2003년 5월 파업 20주년:
화물 운송 노동자들이 통쾌하게 승리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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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 운송 노동자들이 지난해 벌인 두 차례 파업은 정치적, 경제적 파장을 일으키며 정국을 흔들었다.
화물 운송 노동자들은 윤석열 정부와 사용자들, 보수 언론들의 십자포화 속에서도 생계를 포기하고 8일간(6월), 16일간(11~12월) 용기있게 싸웠다.
한 해에 두 차례, 열 흘 넘게 파업을 벌인 것은 화물 운송 노동자들이 역사의 전면에 처음 등장한 2003년 이후 20여 년만이었다. 그만큼 생계비 위기가 심각하고, 절박했기 때문이다.
여러 우파 언론들도 지난해 파업 당시 2003년 화물연대 파업을 언급하며, ‘닮은 꼴’로 비교했다. 그러나 이들의 관심사는 노동자들의 저항과 승리가 아니었다.
친사용자 우파 언론들은 ‘친노동’을 표방한 노무현 정부가 ‘엄정한 법과 원칙’으로 화물연대 파업에 대응했다며 윤석열 정부에 강경 대처를 주문하고, 이를 옹호했다.
실제로 윤석열은 노무현이 만든 ‘업무개시명령’을 처음으로 휘둘렀다.
그러나, 당시 투쟁에 대해 저들이 말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는 훨씬 중요하다. 승리의 경험에서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물류가 멈췄다
2003년 5월 화물연대 파업은 화물 운송 노동자들의 위력을 제대로 보여 줬고, 지배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면서 통쾌하게 승리했다.
화물연대 노동자들은 거의 완승을 거뒀다. 노동자들은 경유값, 고속도로 통행료 인하와 지입제 폐지, 특수고용노동자 산재 보험 가입, 노동자성 인정 같은 주요 요구들을 모조리 쟁취했다.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는 유명한 구호가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됐다. 또, 이때부터 지배자들은 ‘물류 대란’의 현실 가능성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당시 화물연대는 갓 탄생한 신생 조직이었다. 2002년 10월 27일 부산대학교 신축회관에서 조합원 1780명이 모여 민주노총 운송하역노조 화물연대가 출범했다. 화물연대는 파죽지세로 조합원이 늘었다. 2002년 12월에 6000여 명이었던 조합원은 파업이 시작된 5월에는 2만 명이 됐다. 당시 정호희 화물연대 사무처장은 “매일 100여 명씩 화물차 운전자들이 조합에 가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화물 운송 노동자들의 처지와 조건이 끔찍했기 때문이다. 당시 투쟁을 기록한 영상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에너지 세제 개편과 부과되지 않아야 할 특별소비세로 인해 경유 가격이 무려 40퍼센트 육박 하는 살인적인 조건에서 비현실적인 운임으로 생계 압박을 당하는 화물 노동자.
“수익성에만 급급한 고속도로 휴게소의 차별 대우, 쉴 곳이 턱없이 부족하여 휴식 없이 죽음의 장거리 운행을 강요 당하고, 갓길에서 주차하여 수면을 취해야만 하는 화물 노동자.
“생활의 최소 기본인 세면·세족마저 할 곳 없어, 휴게소 화장실에서 타 여행객들의 눈치보며 그나마 해결해야만 하는 현실에 있는 화물노동자.
“과적 단속과 처벌에 대한 잘못된 제도로 운전자에게 이중으로 처벌하고, 과적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 보이지 않는 과적을 강요당하는 사회의 현실 속에 대부분 전과자로 전락해 버린 화물 노동자.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하루 4시간 좁은 차안에서 새우잠을 자고, 다단계 알선으로 착취당해도 말 한마디 못하며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우리.
“우리는 왜 이렇게 인간답지 않은 삶을 참고 살아야만 하는가.”
투쟁으로 조직화
파업 시작 닷새 전에는 화물연대 포항지부 박상준 조합원이 늘어가는 부채에 대한 부담으로 농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다. 그는 “늘어나는 빚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렵다. 화물연대 투쟁을 반드시 승리해달라”는 말을 남겼다. “잘못된 각종 화물차 제도가 낳은 제도적 살인”이었다.
화물 운송 노동자들의 불만과 분노는 광범했다. 그럼에도 5월 파업은 어느날 갑자기 이뤄진 게 아니다.
이제 막 화물연대로 조직된 화물 운송 노동자들은 각자의 현장에서 집단적 투쟁을 벌이며 자신감과 연대 의식, 조직 확대 등의 성과를 조금씩 쌓아 나갔다.
2002년 11월 옥산휴게소 화물차 차별 대우에 맞서 화물차 200여 대가 휴게소를 완전 점거했다. 휴게소장은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해야 했다.
2003년 1월 포항 천일 정기화물과 포항 세아제강 투쟁은 강력한 연대로 4시간 30분 만에 초고속으로 승리했다.
2003년 2월 대산석유화학단지에서는 삼성·현대·엘지 등 재벌 정유회사들을 상대로 600여 대 화물차를 동원해 투쟁했고, 승리했다.
2003년 4월 30일에는 과천 종합청사에 조합원 1만 명이 참가해 경유 가격 인하와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며 1박 2일 집회를 열었다.
연이은 집회와 투쟁 승리는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화물 노동자들에게 집단적 조직과 저항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부산항·포스코 봉쇄
2003년 5월 2일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 첫 대규모 파업이 시작됐다. 주로 포스코 철강 제품을 운송하는 포항지부 노동자들이 운송료 인상과 노조 탄압 중단을 요구하며 운송 거부(파업)에 들어갔다. 곧이어 창원·마산 등 경남지부, 광양지부, 부산지부 노동자들도 연이어 파업에 나섰다.
파업 대열은 날이 갈수록 전국으로, 전 품목으로 더욱 확산돼 갔다. 충청 서부, 울산뿐 아니라 경인 내륙 컨테이너 기지의 노동자들이 동조 파업을 했다. 의왕 내륙 컨테이너 기지 파업은 수도권 물류 운송까지 마비시킬 참이었다.
화물 운송 노동자들은 매우 단호하고, 강력하게 투쟁했다. 부산항, 포스코와 포항철강공단의 진출입이 봉쇄됐고, 고속도로 화물차 통행도 막아섰다. 고속도로 저속 운행 등 ‘준법 투쟁’도 동원됐다.
각 공장에는 재고가 쌓이고, 항만에는 운반되지 못한 컨테이너가 쌓여갔다. 포스코, INI스틸 같은 철강 업체들뿐 아니라 철강을 원자재로 사용하는 자동차, 선박 등 전체 산업으로 피해가 확대됐다. 항만이 봉쇄되면서 전기 기기, 기계류등 수출입에도 큰 차질이 빚어졌다. 지배자들은 주요 공장들의 조업 중단을 걱정해야 했다. 정부는 ‘동북아 물류 중심 국가’ 비전에 차질을 빚을까 걱정했다.
화물연대 파업은 하루에만 1500억 원 가량의 손실을 냈다. 이것은 화물 운송 노동자들이 사회가 굴러가는데 얼마나 큰 기여를 하는지 새삼 깨닫게 했다. 또, 물류를 멈추면 이윤에 막대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힘과 잠재력이 있음도 보여 줬다.
이때 화물 운송 노동자들은 자신의 잠재력과 힘을 최대로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제 막 집권한 노무현은 “노동자의 벗, 서민의 친구”라며 개혁적 이미지로 포장됐지만, 파업에 대한 대응은 역대 정부와 다르지 않았다. 노무현은 “질서 유지”, “엄정한 법과 원칙” 운운하며 파업을 비난했다.
노무현 정부 초기 민정수석이었던 문재인은 2011년에 쓴 책 《운명》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화물연대가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부산항 수출입을 막아 주장을 관철하려는 방식에 화를 많이 냈다. 내게 단호한 대응을 지시했고, 군(軍) 대체인력 투입도 적극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정부는 철도 수송으로 대체하겠다며 파업 파괴 계획도 내놓았다. 하지만, 이것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철도노조가 “위험한 일을 절대로 맡을 수 없다”며 대체 수송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노동자 연대가 빛을 발했다.
지난해 연말 철도노조 집행부가 파업을 철회해 화물 운송 노동자들의 파업에 찬물을 끼얹은 것과 사뭇 달랐다.
현장 노동자들의 단호함도 화물연대 파업 승리의 주요한 요인이었다. 현장 노동자들은 “협상 후 파업”이라는 노조 지도부의 안을 두 번이나 거부했다. 특히 부산지부 현장 노동자들이 그랬다.
언론들은 “화물연대 노동자들이 통제가 안 되[는]” 현상을 우려했지만, 오히려 현장 노동자들의 단호함과 자신감, 자기 규율은 파업 승리에 핵심이었다.
사상 초유 화물 운송 노동자들의 파업에 직면한 노무현 정부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업무개시명령
다시 문재인의 기록을 보자.
“결국 화물연대 파업은 합의 타결됐다. 말이 합의 타결이지 사실은 정부가 두 손 든 것이었다.
“화물연대로선 대성공을 거뒀다. 사회적 지위도 높아지고, 조합원도 크게 늘었다.”
파업은 화물 운송 노동자들의 ‘대성공’으로 일단락됐다.
하지만, 정부와 사용자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뒷통수를 쳤다. 화물연대는 다시 8월 말에 파업을 벌였다. 5월에 허를 찔린 정부와 사용자들은 더욱 강경하게 나와 파업을 제압했다.
다음해인 2004년 노무현 정부는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을 개정해 화물 노동자에게 강제로 ‘업무개시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보복을 했다. 노무현 정부가 만든 칼을 20년 뒤 윤석열이 휘둘렀다.
비록 2003년 5월 화물 운송 노동자들의 승리가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그 파업은 화물 운송 노동자들이 어떻게 싸워야 승리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줬다.
무엇보다 화물 운송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힘과 잠재력을 발휘했다. 봉쇄와 점거, 대체 수송 저지 같은 이윤에 타격을 가하는 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화물 노동자들은 그 힘을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단호했다. 현장 노동자들은 이런 투쟁에서 오는 파급력과 효과를 보면서 자신감을 얻었고, 실질적인 노동자 연대도 가능했다.
또, 개혁적 정부와 정당에 기대지 않고, 노동자들이 독립적으로 강력한 투쟁을 벌이는 것이 노동자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다는 점도 보여 줬다. 투쟁을 하지 않고 이제 막 들어선 노무현 정부에 기대고만 있었다면, 별 성과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해 화물 운송 노동자들은 두 차례 파업에 나섰지만 아쉽게도 성과를 얻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윤석열 정부와 사용자들은 경제 위기 고통을 노동자들에게 전가시키고 있다. 운송료 삭감 시도가 이미 시작됐다.
화물 운송 노동자들은 2003년 5월 파업 직전 몇 개월간 이미 현장에서 운송료 삭감 등에 맞서는 집단적 저항과 투쟁을 벌이며 조직과 자신감을 성장시켰다. 지금도 그런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민주당과 국회 일정에 의존하려고만 하지 말고 현장의 자력 투쟁을 더 중시해야 한다. 이를 위해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힘과 잠재력을 발휘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