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스 등 팔레스타인 저항 조직들의 무장 투쟁을 이해하기:
폭력이 나쁘다고 다들 말하지만 폭력이 사라지지 않고 폭력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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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국의 혁명적 좌파 잡지 《소셜리스트 리뷰》 335호(2009년 4월호)에 실린 기사로, 저자 팻 스택은 폭력을 추상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구체적 맥락 속에서 봐야 함을 지적한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 보듯이, 정치인들과 언론들은 폭력 문제를 위선적으로 다루며 억압받는 자들의 저항을 비난하는데, 이 글은 이에 휘둘리지 않는 명료한 견해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사회주의자 대부분은 본능적으로 폭력에 반대할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전쟁부터 일상의 괴롭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경우에 폭력 사용을 싫어한다.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전쟁 반대 운동이나 각종 차별 반대 투쟁을 통해서 사회주의 정치에 이르렀다.
그러나 본지[《소셜리스트 리뷰》] 독자들은 알겠지만, 본지는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지지한다.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 영감을 주는 인류 역사 속 운동들을 모범으로 여긴다.
더욱이 본지는 여러 민족 해방 투쟁을 지지해 왔는데, 이 투쟁들에는 대체로 무장 저항이 수반됐다.
이런 입장은 모순이 아닐까?
우리는 이것이 모순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폭력은 추상적으로 판단돼서는 안 되고, 구체적 맥락 속에서 검토돼야 한다.
자본주의는 폭력적인 체제이다. 자본주의는 부를 소유·지배하는 자들이 부를 실제로 생산하는 사람들을 착취함으로써 부유해지는 체제이다. 그리고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완전 무장한 대규모 물리력을 구축한다. 자본주의는 전쟁을 일으키고, 저항을 분쇄하고, 사람들을 고문하고, 장애인으로 만들고, 죽인다. 그리고 인류를 절멸시킬 수 있는 무기를 개발한다.
그 과정에서 자본주의는 그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 중 일부의 잔혹성을 부추긴다. 끔찍한 폭력 범죄와 언뜻 보기에 무차별적으로 자행되는 폭력 행위는 흔히 자본주의의 왜곡된 가치와 자본주의가 양산하는 박탈감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심지어 이 체제는 일부 사람들이 다른 일부 사람들에게 잔인하게 굴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자본주의는 합리적인 이유가 전혀 없는 적개심이 자라나게 한다. 피부색·인종·종교·섹슈얼리티·젠더가 동원돼, 사람들이 자기들을 착취하고 천대하는 자들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반목하게 한다.
더 끔찍한 것은, 이 모든 일이 어마어마한 위선과 함께 자행된다는 점이다. 지도자들, 정치인들, 언론들은 소리 높여 폭력 행위, 범죄, 테러리즘을 비난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비난하는 사람들은 꿈도 못 꿀 정도로 막대한 규모의 폭력을 그들 자신은 자행하고 지원한다.
그들이 이럴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가 강제력과 거짓말을 모두 동원해 지배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대체로 자신들의 세계관이 유일하게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국가가 가하는 폭력은 정당하다고 여겨진다. 반면, 국가에 맞서는 폭력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낙인찍힌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보도만 봐도 그렇다. 언론이 이스라엘의 행위에 일부 유감을 표할 때조차 행간에 깔린 메시지는 따로 있다. ‘이 대결에서 지지해야 할 측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에는 민주적인 의회가 있다, 이스라엘군은 제복을 입고 있다, 이스라엘은 정규군이 있고 정규군의 병법을 쓴다 ─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지킬 권리”가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해서는 어떤가? ‘팔레스타인인들은 국가도 없는 꾀죄죄한 자들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테러리스트처럼 생겼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정규군이 있지도 않고 저항 운동의 방법을 쓴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전쟁으로 격퇴해야 하는 테러리스트 세계”의 일부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인들이 겪는 엄청난 부정의와 수모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유도한다. 그저 한편에는 “합법적이고 정당한” 세력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렇지 않은 세력이 있다고만 이해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프리카국민회의(ANC)의 지도자였던 넬슨 만델라[2013년 사망 ─ 역자]는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이 호감을 표하는 정치인일 것이다. 그러나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이 “테러리스트” ANC 지도자들보다 남아공의 인종차별적 지배자들을 더 친근하게 여긴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그런데 만델라의 투쟁은 옳았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저항할 권리가 있나?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무장 저항은 정당한가?
이 세 질문 모두에 대답은 ‘그렇다’여야 한다. 이 말이 곧 특정 행동이나 전술, 혹은 그 근저에 깔린 전략을 지지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게 아니라 억압과 착취에 맞서 저항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고, 국가가 무장력과 군대를 독점할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함의가 있다. 우리 중 대부분은 정치 활동을 하면서 평화주의자들과 함께 행진하고 공동행동을 벌이고, 그들과 많은 목표를 공유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평화주의적 저항의 영웅적인 역사에 존경을 보낸다. 징집, 전투, 살인을 거부하려면 많은 경우 커다란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해야 한다.
자본주의 정치인이나 언론과는 달리, 평화주의자들은 위선적이지 않다. 그들의 신념은 일관된다. 우리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평화주의자들을 존경하고 존중하지만, 근본적 문제에서 그들과는 이견이 있다. 우리는 노예가 스스로를 해방하기 위해 선택하는 폭력과 노예 소유주의 폭력 사이에 심대한 차이가 있다고 본다.
역사를 통틀어, 가장 심대한 변화는 천대받던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더 감내하기를 거부하고 기존 질서와 그 지배자들을 타도하는 저항을 통해 벌어졌다. 흔히 이런 저항에는 폭력이 수반됐다. 억압자들에게서 권력을 빼앗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막대한 무기가 동원돼 부자와 권력자들이 국내에서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가장 부강한 국가들이 더 작고 가난한 국가들을 단속하고, 부와 자본주의를 지속시키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 사람들과 자본주의 체제는 투표로 쫓아낼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부·특권을 대중 투표에 졌다고 절대로 순순히 내어 주지 않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타도돼야 한다. 그런 타도는 폭력을 수반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폭력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을 것이다. 폭력을 사용하고 폭력으로 위협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특권을 가진 소수가 다수의 이익을 거슬러 부와 권력을 거머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방법을 동원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할 것이다.
반면, 사회주의 혁명은 사회의 다수가 자력으로 착취와 천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다수의 혁명적 운동은 특권적 소수에게 잔인한 방법을 쓰지 않아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다. 혁명의 목적은 세계에서 전쟁과 대량살상 무기를 일소하는 것일 뿐 아니라, 사람들이 빈곤과 소외에 시달려서 서로에게 가하게 되는 일상의 폭력도 일소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참혹함을 제거하고 나면 비로소 우리는 평화주의의 세계에서 삶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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