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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 〈존 오브 인터레스트〉:
나치의 아우슈비츠 학살을 새롭게 다룬 영화

지난해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과 올해 아카데미 장편국제영화상을 수상한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개봉했다.

영화는 홀로코스트의 대명사가 된 나치의 절멸 수용소,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의 소장 루돌프 회스와 그 가족의 1944년을 그리고 있다.

‘The zone of interest’(요주의 구역)는 나치가 강제 수용소 지역을 일컫는 용어다.

영화는 오프닝에서 제목을 오래 유지하면서 으스스한 음악을 들려주고, 이내 수영복 차림으로 강변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한 가족을 보여 준다. 이때부터 우리는 나치 친위대(SS) 루돌프 회스의 가정을 관찰하게 된다.

아우슈비츠 담장 밖 나치 친위대 루돌프 회스의 평화로운 가정 모습 ⓒ출처 TCO(주)더콘텐츠온

그들의 집은 아우슈비츠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온실과 작은 수영장, 라일락과 장미가 흐드러진 정원, 주인을 따르는 개와 시중드는 하인들(점령지인 폴란드 주민들)까지 마치 잘 꾸며진 부르주아 가정과 같다.

하지만 담 너머 불협화음들이 끝없이 넘어온다.

기차의 굉음이 들린다. 실제로 기차가 마치 학살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처럼 아우슈비츠 안마당까지 유대인과 로마인 등을 실어 날랐다.

소각장 기계음도 들리는 듯하다. 실제로 아우슈비츠는 시신들을 밤낮으로 불태웠다. 나중에는 가스실을 거치지 않고 사람들을 불태웠다.

총소리, 개 짖는 소리, 비명인지 울음인지 예사롭지 않은 웅성거림, 위협하고 명령하는 날카로운 소리 모두 불길하다.

창문 너머 밤하늘마저 소각로 불길에 시뻘겋게 물든다.

존더코만도(시체를 치우는 등의 일을 하는 수감자)는 그 재를 가져다가 정원에 거름을 준다.

회스의 아내는 수감자들의 물품을 ‘쇼핑’하고 그들의 치약 튜브에서 다이아몬드를 발견한 얘기를 꺼낸다. 어머니에게는 자신이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라 불린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딸의 성공을 대견해 하고 자신의 예전 유대인 고용주도 담 너머에 있을지 모른다며, “볼셰비키 문제 때문”일 거라고 말한다.

요주의 구역

루돌프 회스는 엔지니어링 기업가들과 도면을 보면서 시신을 태울 소각로를 상의하고 화학기업체 연합인 이게파르벤과의 오찬 일정을 확인한다.

이게파르벤은 아우슈비츠 강제 노동으로 제품을 생산했고 아우슈비츠에 독가스(살충제 치클론B)를 공급했다. 이게파르벤의 일원이었던 바이엘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에 고엽제를 공급했던 몬산토를 인수해 현재 세계 최대 농화학·종자·제약 기업이 됐다.

영화 안팎에서 발견하는 이런 “악” 중에서 “평범”하거나 “진부”한 것은 하나도 없다.

영화에는 또 다른 실제 역사가 있다. 한밤중에 자전거를 타고 아우슈비츠 주변을 돌면서 굶주린 수감자들을 위해 작업장에 사과를 숨겨 준 12세 폴란드인 소녀의 실화다. 소녀는 저항군이었다. 영화 속 자전거와 드레스는 소녀가 실제로 썼던 것들이다.

소녀는 수감자 조셉 울프가 작곡한 ‘햇살’이란 제목의 악보를 발견하고 피아노로 연주한다.

인공 조명을 자제하고 자연광을 사용한 이 영화는 어둠 속 장면을 위해 열 감지 카메라를 썼다. 그래서 오직 소녀만 완전한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집 안 장면은 배우와 카메라들만 놓고 감독과 스태프들 없이 촬영을 진행했다. 배우가 연기에 집중하고 관객이 영화에 거리감을 유지하게 의도한 것이다.

이런 스타일은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극작가이자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1930년대에 시작한 연극 스타일(소외 효과: 거리 두기와 낯설게 하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영화는 또한 우리에게 검거나 붉은 색의 빈 화면을 몇 분씩이나 바라보게 만든다.

이것도 1960년대와 1970년대 전투적 좌파 감독들이 브레히트를 계승해 사용한 장치였다. 그들은 관객이 영화적 환상에 빠져들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다만, 이 영화에서 이런 시도가 모두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이스라엘

8년 전에도 1944년의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를 다룬 영화 〈사울의 아들〉이 똑같이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과 아카데미 장편국제영화상을 수상했다.

〈사울의 아들〉은 수감자들의 실제 봉기를 다뤘다. 그러나 이 영화의 라즐로 네메스 감독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지난 3월 아카데미 수상 소감에 대해 얼토당토않게도 “반유대주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비판했다.

사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수상 소감은 다소 모호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지지자라면 분명히 알아들을 말을 했다. ‘점령자들[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를 납치했다’는 말이었다.

그러자 이 영화의 총괄 제작자를 비롯한 할리우드의 이스라엘 지지자들이 달려들어 그를 물어뜯었다. 이후 낸 골딘을 비롯한 예술계의 이스라엘 반대 진영이 그를 방어했다.

두 감독의 최근 입장과 행보를 떠나 〈사울의 아들〉과 〈존 오브 인터레스트〉 둘 다 저항의 용기를 북돋을 수 있는 영화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와 나치와 홀로코스트의 관계,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루돌프 회스의 상관으로 언급되는 아돌프 아이히만 등 전후 나치 전범들과 관련해 이스라엘, 미국, 독일 등이 보여 준 극단적 위선까지 진실을 더 깊이 알아보는 작은 발판이 될 수도 있다.

더 넓은 일반화도 가능하다. 이 세계에서 소수의 억압자·착취자가 누리는 행복과 번영이란, 마치 벽 하나 너머 다수의 피억압자·피착취자들이 겪는 고통과 죽음을 담보로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사람들의 삶과 생명을 무가치하게 여기며 이윤과 지배를 추구하는 자들이 야기하는 사실상의 대량 학살들이 자본주의 세계의 만성적인 특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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