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소름끼치는 경고가 다시 돋보이는 이유
〈노동자 연대〉 구독
1964년 1월 29일 세상에 처음 공개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를 다시 떠올리고 소개하게 된 계기는 일론 머스크가 제공했다.
세계 제일의 부자가 미 대통령 취임식 행사에서 온 세상을 향해 나치 경례를 보여 줬다. 각도가 ‘하일 히틀러’보다 낮다는 반박이 있지만 ‘영도자(Führer)’의 경례는 추종자의 경례보다 흔히 낮았다.
머스크는 나치 경례임을 부인하지만 파시스트들이 취하는 ‘이중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미국뿐 아니라 영국·독일·한국의 극우를 고무해 온 행적을 중요하게 본다면, 나치 경례임이 분명해 보인다.
파시스트들이 “개 호루라기 정치”(핵심 지지층만 잘 알도록 의도된 은밀한 정치 메시지 전달)에 능숙하긴 하지만, 그보다 더 노골적이다. 전 세계 파시스트들은 머스크가 보내는 인사에 고무될 것이다.
한국의 극우도 그럴 것이다. 머스크가 오른팔을 뻗기 전날, 이미 그들은 서부지법에서 트럼프와 머스크의 사진을 들고 폭동에 나섰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이와 견줄 만한 장면은 영화 끝부분에 나온다.
블랙 코미디
스트레인지러브 박사는 미 대통령의 과학 고문이자, 골수 나치다. 박사는 자신의 오른팔이 발작처럼 시전하는 나치 경례를 억누르지 못한다. “Mein Führer”(나치 수괴를 높여 부르는 독일어 표현)란 단어도 입 밖으로 거듭 튀어나온다.
영화 내내 휠체어에 앉아 있던 그가 갑자기 일어나 걸으면서 대통령에게 영화의 마지막 대사를 소리친다. “총통 각하(Mein Führer), 제가 [다시] 걸을 수 있습니다!”
2025년 다시 보는 이 장면은 마치 파시즘의 재림을 경고하는 듯해서 더 섬뜩하다. (원래는 영화가 삶을 모방하지만) 현실이 영화를 모방하는 듯하다.
스트레인지러브 박사와 미국 대통령, 영국 공군 대령 역까지 1인 3역을 연기한 피터 셀레스는 즉흥 연기를 많이 했고 큐브릭 감독이 외려 대본을 수정했다.
피터 셀레스는 실존 인물 베르너 폰 브라운을 스트레인지러브 박사의 모델로 삼았다고 했다.
베르너 폰 브라운은 미국 정부가 신분을 세탁해 준 1600명의 나치 과학자, 기술자 중에서도 거물이었다. “이번에는 이기는 편에 서고 싶었”던 그는 히틀러의 V2 로켓 개발자에서 미군의 탄도 미사일 설계자로 변신했다.
그는 케네디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고, NASA(미국항공우주국)를 이끌면서 널리 유명해졌다. 달 착륙을 성공시킨 그의 일생일대 꿈은 화성 착륙이었다.
베르너 폰 브라운이 쓴 SF 소설 《화성 프로젝트》(1949) 속에서 미국은 옛 소련(이하 소련)과 중국을 핵 공격으로 제압하고 화성 개척에 나서는데 화성의 통치자는 “일론”(!)이라 불린다.
영화의 원제목은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또는 나는 어떻게 걱정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는가〉다. 이 영화에는 당대의 중요한 정치적 쟁점들이 있다.
1960년대 초반은 핵전쟁에 대한 위험과 공포가 절정에 달했던 때다.
1961년 7월 25일 케네디 대통령은 TV 연설로 미국인들에게 수소폭탄 전쟁에 대비해 가정에 대피소를 설치하라고 했다. 《가족 낙진 대피소》라는 소책자가 2200만 부나 배포됐다. 〈타임〉은 통조림과 탄약을 가득 채운 가정용 대피소를 소개했고 〈라이프〉는 케네디 대통령이 쓴 서문과 함께 방사능 낙진 방호복을 선보였다.
“쿠바 미사일 위기”로 1962년 10월 16일~28일 미국과 소련은 핵전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
미 전략공군사령부의 기밀해제 기록에 따르면, 1961년부터 핵폭탄을 가득 실은 미군 B-52 폭격기 12대가 상시 대기 중이었고 소련과 가까운 알래스카와 그린란드를 따라 24시간 공중 비행을 유지했다. 이를 위해 B-52가 공중 급유하는 모습이 이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 장면이다.
1968년 1월 21일 B-52가 그린란드에 추락해 방사능이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런 사고들이 1950~1968년 최소 32건 발생했고 분실된 핵탄두 6기는 끝내 찾지 못했다. 핵 폭격기의 24시간 공중비행 작전은 1968년에 종료됐다. 1968년은 세계적 반란의 해였다.
1968년 초반까지 민주당 소속의 린든 B. 존슨 정부는 북베트남에 대한 전술핵무기 사용을 획책했다. 공화당 소속의 리처드 닉슨 정부도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의 제안으로) 1969년 봄과 가을에 핵 공격을 검토했다가 결국 포기했다. 강력하게 부상한 반전 시위 때문이었다. 닉슨은 회고록에서 전 세계적 분노가 자신의 공격 계획을 훼손했다고 암시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헨리 키신저의 《핵무기와 외교정책》은 물론이고 관련 서적을 50권 이상 읽었고 12명의 전문가들과 대화하면서 핵전쟁에 대한 지식과 상황 이해를 높였지만, 알수록 핵전쟁(억제)이론이 정신 나간 소리 같았고, 결국 애초 계획과 다르게 블랙 코미디를 만들기로 했다.
피터 조지의 영국 소설 《멸망까지 2시간》(미국 제목은 《적색 경보》)을 원작으로 삼았지만, 소설에는 스트레인지러브 박사가 없고 영화의 결말도 소설과 정반대다.
영화는 널리 확산된 핵전쟁의 공포감을 그저 반영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당시의 전략 논쟁에 대한 통찰과 반감이 들어 있다.
핵전쟁
1951년 하버드대 교수였던 헨리 키신저는 《선택의 필요성》을 써서 소련과의 “미사일 격차”를 경고했다. 1960년 대선에서 케네디는 미국이 미사일 수량에서 뒤쳐졌다는 날조된 “미사일 격차”를 제기해 국민을 겁박했다.
이 영화에서 국가안보회의(NSC)에 참석한 공군 사령관은 냉전적 사고에 갇힌 확전론자의 면모를 잘 보여 주는데,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 상대 진영과의 “격차”경쟁에 몰두한다.
1950년대 발전한 전쟁억제이론은 ‘상호확증파괴’의 가능성 때문에 서로 핵무기가 있으면 핵무기를 사용하지 못할 거라는 위험천만한 논리였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가정처럼 한쪽의 공격으로 상대편 사령부가 파괴된다면 반격이 가능하지 않다는 딜레마가 있었다. 따라서 자동으로 보복 핵 공격을 실행하는 시스템이 연구됐다.
허먼 칸의 책 《핵전쟁에 관하여》가 이런 논쟁을 제기했고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이것을 블랙 코미디로 옮겨 놓았다. 우파 미래학자 허먼 칸은 스트레인지러브 박사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펜타곤에서 그는 3주도 못 버틸 겁니다. 그는 너무 창의적이거든요.”
영화에서 전략공군사령부의 리퍼 장군은 무단으로 소련에 대한 핵 공격을 명령한다. 워싱턴이 공격당했을 때를 대비해 마련된 보복 조치에 의해 작전 취소에 필요한 암호는 명령권자인 리퍼 장군만 갖는다. 대통령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전화해 위험을 경고하다가 소련이 “멸망의 날 장치”를 구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핵 공격을 받으면 자동으로 작동하는 핵 보복 공격 장치다. 따라서 “방사능 코발트” 낙진이 온 지구를 뒤덮을 것이다.
현실에서 미 공군은 핵 공격 명령이 취소될 수 없다는 영화의 전제를 비난했다. 하지만 이후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이러한 절차는 실제로 놀라울 만큼 느슨했고 나중에서야 강화됐다.
1971년 대니얼 엘스버그는 베트남 전쟁의 명분이 된 통킹만 사건이 조작됐다는 국방부 기밀 문건을 폭로했다. 검찰이 간첩법에 따라 115년 형을 구형했지만 항의 운동의 위세에 밀려 법원은 무죄 판결을 내렸다. 1964년 국방부의 분석가였던 그가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나오면서 동료에게 “이거 다큐멘터린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영화 속 리퍼 장군에게서 당시 사람들은 커티스 르메이 장군을 떠올렸다. 르메이는 1950년대 전략공군사령부를 이끌고 1960년대 공군 참모총장을 지내면서 핵 선제 공격의 이점을 강조했던 자인데 1968년 부통령 후보로도 출마했다.
영화 속 리퍼 장군이 믿는 음모론 역시 낯설지 않다. 공산주의자들이 수돗물에 불소를 넣어 미국인의 “체액”을 오염시킨다는 것이다. 현재 극우들이 퍼뜨리는 “문화적 마르크스주의,” “문화전쟁”론도 이처럼 결론을 정해 놓고 몇 가지 정보를 끼워 맞추는 식이다.
하지만 황당한 극우 음모론 괴담은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조건과 그로 인해 절망/분노하는 (주로 중간계급) 사람들, 이를 이용하는 권세가와 모리배, 국가기관과 전현직 고위 관료·장성, 언론에 의해 힘을 얻을 수 있다.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과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시대가 되면서 핵 공격 시간은 몇 시간에서 몇 분으로 단축됐지만, 핵무기 경쟁은 계속 진행중이다. 미국은 수소폭탄 B61시리즈의 초대형 버전까지 개발중이다. 핵무기의 개선·현대화에 매년 수백억 달러가 지출된다.
극우에 맞선 투쟁
2023년 10월 17일 B-52 폭격기가 서울공항 상공을 비행했고, 국내 공군기지에 최초로 착륙했다. B-52는 다량의 핵무기 탑재와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미군 주력 전략폭격기다. 윤석열 정부와 반중반북·친미친일 극우 모두 환호했을 것이다.
이들은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 질서 강화를 위해 선동하고 행동한다. “사회대개혁”에 반대하는 사회대개악을 원한다(자본주의 강화를 위해서다).
극우의 주류화와 우파에 대한 견인력은 일탈이나 일시적 해프닝이 아니다. 트럼프의 성공은 이를 고무하고 있다(그러니 트럼프의 실패가 중요하다).
최근 이들이 보여 준 단결과 역동성, 성장세는 필연이 아니다. 이들이 실패하게 만들수록 서로 분열하고 약화되고 쇠퇴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법리적 해법·경찰·사법 처리로 극우의 준동을 저지하는, 그런 ‘정상’ 상태는 원래 드물지만 어떤 조건에선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의 투쟁을 확대·상승시켜서 현재와 미래를 모두 대비해야만 한다. 극우를 저지하는 구체적인 목적을 위한 단결된 행동이 필요하다.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년, 92분)는 유튜브(유료)와 애플TV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