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는 어떻게 표현의 자유를 제멋대로 이용해 먹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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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표현의 자유만큼 우파의 위선을 잘 보여 주는 이슈는 거의 없다.
윤석열의 쿠데타를 옹호하는 극우는 탄핵 반대가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대학과 지역에서의 맞불 집회는 자신들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물론 형식적으로 보자면 표현의 자유는 법적 권리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라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자유를 짓밟으려 한 국가 최고 권력자의 군사 쿠데타를 지지하는 집단 행동을 뜻한다면, 표현의 자유는 아무런 숭고한 가치가 없는 것일 테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표현의 자유가 중요한 정치적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권력자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말할 권리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석열은 계엄을 통해 정치적 반대파를 숙정(“일거에 척결”)하고 대중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려 했다. 대중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려 한 것이다.
만약 12월 3일 밤 수천 명의 대중이 국회로 모여들어 계엄에 결사 반대하는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지 않았다면, 윤석열은 대중의 표현의 자유를 산산이 파괴했을 것이다.
그래서 보수적인 헌법재판소조차 계엄 포고령은 “모든 국민의 정치적·표현의 자유를 전면적·포괄적으로 박탈”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표현의 자유도 계급적으로 불평등
미국 트럼프 정부도 자신이 표현의 자유의 수호자인 양 행세한다.
미국 부통령 JD 밴스는 최근 유럽을 순회하며 유럽 지도자들이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극우들)을 침묵시키기 위해 법률을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심지어 그는 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유럽의 법률이 러시아나 중국보다 큰 위협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트럼프 정부는 실제로 뭘 하고 있나? 트럼프 정부는 소셜 미디어에서 팔레스타인 지지를 표현했다는 이유로 시민들을 체포하고 추방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심지어 트럼프 정부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정책들을 폐기하겠다며 정부 웹사이트에서 “트랜스젠더,” “평등,” 심지어 “장애인” 같은 단어들을 삭제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트럼프 정부의 행태가 전통적인 자본주의 가치에서 이탈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극우 정부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연결 고리(민주주의 권리의 핵심 요소인 표현의 자유)를 해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 할지라도, 실제로 그 자유를 행사할 수단을 대다수 사람들에게 제공한 적은 결코 없다. 오히려 지배계급은 항상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제한하려 해왔다.
예를 들어 언론의 자유를 생각해 보자. 누구나 언론사를 만들고 다양한 의견을 낼 자유가 있다지만, 그러려면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다. 방송사나 대형 언론사를 만들거나 소유할 자유를 실제로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부유층뿐이다.
소규모 온라인 언론사가 늘어났다고 하지만, 기사의 노출 빈도는 주류 언론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 네이버나 다음의 뉴스 포털 사이트는 대형 언론사들의 뉴스가 지배한다.
언론과 출판 수단의 소유 구조가 계급적이기 때문에, 그 구조의 가장 상층에 있는 자들은 무엇이 주요한 의제로 논의돼야 하는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독재 정권 때 정부가 보도지침 따위로 언론 보도를 통제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서구에서도 초기 신문의 역사를 보면 신문사 소유주가 직접 평기자들의 글에 개입해 자신들의 이익을 반영하게 했다.
오늘날의 언론 소유주들은 더 은밀한 방식으로 그런 일을 한다. 그들은 자신들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편집자(데스크)와 기자들을 승진시킨다. 기자들의 처우와 승진은 언론 소유주와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정부, 광고주들의 반응으로부터도 영향을 받는다.
파시즘, 혐오 표현, 노플랫폼
기업주와 정부 고위층의 입장을 반영한 글들이 우선되고, 데스크는 평기자가 그런 기조에 어긋나는 기사를 가져오면 가차 없이 폐기시킨다.
지난해 뉴욕타임스 컬럼니스트를 그만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은 편집부의 부당한 간섭이 그 원인 중 하나였다고 털어놓았다. 평범한 기자들에게 가해지는 압력은 더욱 클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 표현의 자유는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사실 지배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하도록 허용한 적이 결코 없다. 국가는 특정 주제를 ‘금기’로 규정한다. 한국 국가는 혁명이나 체제 전복 같은 것은 논의하지도 못하도록 국가보안법을 유지시켜 왔다.
국가는 그러한 법을 통해 부유층의 특권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억압해온 긴 역사가 있다. 그 역사는 1792년 영국 태생 미국인 급진 민주주의자 토머스 페인의 재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 국가는 토머스 페인의 유명한 소책자 《인권》(박홍규 역, 필맥 간, 2004)을 반역적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고, 법원은 페인에게 사형 선고를 했다. 그 소책자는 부당한 정부에 맞서 혁명을 일으킬 권리를 옹호했다.
좌파는 국가의 표현 자유 억압에 반대해야 한다. 또한 표현의 자유를 제약당하는 노동계급의 개인과 조직들의 자유를 위해 앞장서 싸워야 한다. 비록 한계가 많더라도,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 하에서 부분적으로 허용된 민주적 권리를 옹호하고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모두에게 무제한적인 표현의 자유를 지지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특히 파시스트들이 표현의 자유를 누리도록 지지할 수는 없다. 파시스트가 언론에 ‘정상적’ 세력처럼 등장하지 못하도록 막고, 가능하다면 물리적으로까지 그들의 표현 행위를 막아야 할 것이다. 좌파 단체와 노동단체를 깡그리 분쇄하겠다는 파시스트들의 표현 자유는 순전한 속임수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말과 행동 사이에는 내재적 연관성이 있다.
예컨대 지난여름 영국 곳곳에서 파시스트들은 이주민·난민을 공격하는 인종차별주의 폭동을 일으켰다. 그런 행동은 주류 언론이 파시스트들의 주장과 논점들을 증폭시킨 덕분에 가능해졌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이주민들과 난민들의 생명이 위협받았다. 우리에게는 이주민과 난민의 생존권이 파시스트의 ‘선동권’보다 더 중요하다.
노플랫폼(표현의 자유 불허) 전술은 파시즘이라는 특별한 반동적 정치 운동에 맞서기 위해 발전된 전술이다. 파시즘은 보통의 권위주의적 정부와 달리 노동계급의 민주적 권리와 기층 대중의 조직을 모조리 분쇄하려 드는 극도로 반동적인 대중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플랫폼 전술이 필요하다고 해서 소수의 결연한 혁명가들이 물리적으로 (가령 각목을 들고) 파시스트와 한판 붙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 전술이 성공하려면 우리 편이 파시스트를 누를 수 있을 만큼 대규모로 동원돼야 한다. 파시즘에 반대하는 대중을 최대한 동원해 파시스트들의 사기를 죽이고, 그런 정치적 효과를 통해 파시스트의 핵심부와 주변 지지층을 갈라놓는 게 목적이다.
극우에 맞선 맞불 집회도 이와 같은 정치적 효과를 낸다. 파시스트가 아닌 극우에 언제나 노플랫폼을 구사하는 것은 과도한 공격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맞대결은 극우를 키워 줄 뿐이라며 맞대결을 피하는 것으로는 그들을 약화시킬 수 없다.
전술을 구사할 때에는 힘의 균형을 정확하게 따져 봐야 한다. 때로 우리 편이 압도적으로 크다면 극우가 집회나 행진조차 못하게 막을 수도 있다.
그렇지 못하다면 사람들의 규모와 자신감에 비춰 봤을 때 물리적으로 그들을 아예 몰아내는 것은 현실적 목표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 정확히 따져서 가능한 수준에서 효과적인 반대를 조직해야 한다.
국가의 힘에 의존해 극우와 파시스트의 입을 막는 것은 결코 현명한 전술이 아니다. 국가는 결코 계급 간 중립적이지 않다. ‘혐오 표현’을 처벌한다는 유럽의 법들은 가끔은 극우를 겨냥하기도 하지만, 훨씬 더 많은 경우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대를 유대인 혐오자들로 몰아 탄압하는데 쓰이고 있다.
국가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노동계급 대중의 표현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방법(맞불, 대규모 집회, 파업 등)에 힘을 쏟아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상들의 경쟁’에서 우수한 주장이 승리하는 식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관념론적인 인상을 갖지 않는다.
사회주의자들과 좌파들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에 맞서 싸워 온 오랜 전통이 있다. 우리는 급진적인 사상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사회 변화를 위한 운동을 건설하는 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사상 자체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사상은 물질적 힘과 결합될 때에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갖게 된다. 그 힘은 바로 노동계급 대중의 투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