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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내란 청산과 극우 팔레스타인·중동 이재명 정부 이주민·난민 긴 글

아펙 정상회의를 계기로 돌아보는:
트럼프와 김정은이 지난번에 만났을 때

이달 말 경주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트럼프가 김정은을 다시 만나게 될까?

10월 15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하 존칭 생략)은 “미국과 북한은 이미 대화할 준비가 돼 있는 것 같다”며 낙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또한 그는 트럼프가 노벨 평화상을 받지 못해 “다행”이라고 말했다. 수상 불발로 트럼프에게 한반도 평화를 위해 더 노력할 동기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트럼프 정부의 관세 공세 등을 우려하면서도 트럼프만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돌파구를 낼 수 있다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트럼프와 김정은이 다시 만나서 가시적이고 지속적인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이를 예상하기 위해 트럼프 1기의 경험을 복기하는 게 도움이 된다.

2017년 전쟁 위기

트럼프 1기 당시 북·미 관계는 2017년의 아찔한 위기부터 거쳤다.

2017년에 집권한 트럼프가 무역 전쟁을 추진하는 등 대중국 적대를 본격화하자 제국주의 강대국들 간 쟁투는 전보다 격화됐다. 특히 인도-태평양 일대에서 불안정이 커졌다.

그 영향으로 한반도에서도 긴장이 고조됐다. 트럼프 정부는 북한에 “최대한의 압박”을 가하는 정책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는 바로 반작용을 낳았다. 북한이 중장거리 미사일을 잇달아 시험 발사하고 수소폭탄 실험까지 감행해 버린 것이다.

2017년 내내 트럼프는 북한을 위협하는 말을 쏟아 냈다. 그해 9월 유엔 총회에서 트럼프는 “북한을 철저히 파괴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협박은 단지 말에 그치지 않았다. 트럼프의 유엔 연설 직후 미국 공군의 전략폭격기 B-1B 랜서가 북한 코앞의 동해 국제 공역까지 비행했다. 그리고 트럼프 정부는 이른바 ‘코피 작전’이라는 대북 선제공격 계획까지 구상하고 있었다.

2017년 트럼프는 “화염과 분노”를 거론하며 북한을 위협했다 ⓒ출처 미 국방부

심지어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허버트 맥매스터는 트럼프가 회의 중에 “북한군이 열병식을 할 때 북한군 전체를 제거하면 어떨까” 하고 말했다고 후에 폭로했다.

이렇게 분위기가 험악해진 가운데 누군가의 오판이나 우발적 사건으로 돌발 상황이 펼쳐질지 모를 일이었다.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로 널리 알려진 언론인 밥 우드워드는 당시 미국 국방장관 제임스 매티스가 워싱턴 대성당에 자주 기도하러 갔다고 썼다. 트럼프의 명령이 “너무 무작위적이고 충동적”이어서 매티스의 근심이 컸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 전쟁은 미국한테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이란의 부상을 억제하기 위한 핵협정 파기 추진 등 중동의 화급한 문제들을 우선 처리해야 하는 처지였다.

또한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이 막대한 피해를 볼 것이고, 무엇보다 자칫 중국과의 직접 충돌이 벌어질 수 있었다. 한반도 긴장을 일단 관리할 필요가 점차 커진 것이다.

싱가포르 만남에서 하노이 노딜로

그런데 이듬해 트럼프가 김정은을 만나기로 결정하면서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었다.

흔히 문재인 정부의 적극적인 중재 외교가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북한 측에 만남을 먼저 타진한 쪽은 트럼프였다. 2017년 12월 제프리 펠트먼 유엔 수석특사가 평양에 가서 김정은과 만나고 싶다는 트럼프의 메시지를 비공개로 전달했다. 그 메시지를 받고 나서 북한 정부가 평창 올림픽에 대표단을 보냈다.

그렇게 6월 싱가포르에서 첫 정상회담이 열리며 트럼프와 김정은은 손을 맞잡았다.

북·미 협상장 바깥에서 벌어지는 제국주의간 경쟁이 지난번 만남을 ‘노딜’로 이끌었다 ⓒ출처 Kevin Lim/THE STRAITS TIMES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정상회담이었지만, 그것으로 실질적으로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북·미가 합의한 공동성명에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약속이 하나도 담기지 않았다.

당시 트럼프는 북한에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았다고 입버릇처럼 자랑했다. 그럼에도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더는 하지 않게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서명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공동성명의 해석을 두고 미국과 북한 양측 사이에 이견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비핵화와 평화 체제 실현 간의 순서와 구체적 이행 방식 등을 놓고 양측이 동상이몽이었음이 금방 드러났다. 그래서 싱가포르 회담 후 후속 실무 협상은 순조롭지 못했다.

트럼프하에서도 미국의 대북 정책은 인도-태평양에서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것, 특히 중국을 봉쇄하는 것과 긴밀히 연동돼야 했다. 이 점에서 북핵 ‘위협’은 일본·한국 같은 동맹국들을 미국에 더 밀착시키는 데에 유용한 쟁점이었다.

이처럼 협상 테이블 바깥의 제국주의간 경쟁이 북·미 대화를 지배했다. 싱가포르 회담 이후에도 트럼프 정부는 한미연합훈련을 지속했고 대북 제재도 야금야금 강화했다. “최대한의 압박” 정책은 전혀 중단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트럼프는 2018~2019년에 김정은과 친서 27통을 주고받으며 그와의 “브로맨스”를 과시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편지에서 트럼프의 초점은 김정은에게 비핵화 의무를 상기시키는 데에 가 있었다. 트럼프는 양국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자기 쪽에서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거의 거론하지 않았다.”(시그프리드 헤커, 《핵의 변곡점》(창비))

김정은은 북한이 양보하는 만큼 한미연합훈련 중단, 평화협정, 제재 완화를 반대급부로 얻기를 원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트럼프 정부는 “최종적이고 완전하며 검증 가능한 비핵화”부터 돼야 한다며 북한이 수용할 수 없는 요구를 고집했다.

양측의 이견과 긴장은 결국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정상회담의 ‘노딜’로 이어졌다.

하노이 정상회담의 실패는 존 볼턴이나 폼페이오 같은 자들의 훼방 탓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문재인도 지난해에 낸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에서 같은 주장을 폈다.

그러나 하노이에서 영변 핵시설 폐쇄와 대북 제재 완화를 맞바꾸자는 김정은의 타협안을 거부한 것은 트럼프 자신이었다. 그는 김정은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양보를 직접 강요하다가 회담을 파탄 냈다.

그래서 “김정은은 상처 입고 화가 난 채로 평양에 돌아왔다”(시그프리드 헤커). 이후 북·미 대화는 더는 진전되지 못했다.

트럼프는 자신의 1기 재임 중에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중단시켰음을 성과로 내세운다. 그러나 김정은의 판단은 다를 것이다. 2019년 8월 김정은은 마지막으로 “끝없는 비통함을 토로”하는 편지를 트럼프에게 보냈다. “각하께서 우리의 관계를 오직 당신에게만 득이 되는 디딤돌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면, 나를 주기만 하고 아무런 반대급부도 받지 못하는 바보처럼 보이도록 만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트럼프는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면서 김정은을 다시 만나겠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혀 왔다.

하지만 그 만남이 어찌어찌 성사돼도, 항구적이고 확실한 성과로 이어지기는 매우 어렵다. 앞서 언급했듯이 세계 제국주의 체제의 불안정성이 협상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고 북 ‘비핵화’ 문제는 미국의 동맹국들을 미국 주위로 결집시키는 유용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북·미 간에 새로운 대화가 시작돼 일시적인 이완이 있더라도, 협상은 매우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과정이 될 것이다. 한반도를 중국과 두는 거대한 체스의 일부로 생각하는 미국 제국주의자들이 온갖 트집을 잡아 협상 판을 흔들 수 있다. 무엇보다 미중 간 쟁투 때문에 머지않아 불안정은 다시 고조될 것이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만남이 굉장한 해결책이 될 것처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 식 공상일 뿐이다.

문재인 정부가 나섰다면 달랐을까?

정동영은 하노이 노딜 전에 문재인 정부가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재개로 남북 관계를 더 진전시켜야 했다고 말했다. 남북 관계 개선으로 북·미 관계를 “견인”했다면 하노이 회담의 결과도 다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문재인 정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마찬가지로, 남북 관계에 대해 진보적인 구상을 밝히면서도 대북 제재 이행 등에서 미국과 보조를 맞추거나 국내 우파들과 타협하는 모순된 행보를 취해 왔다.

당시 많은 좌파가 종전선언 체결 등 북·미 대화로 한반도 평화가 보장될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동안, 문재인 정부는 트럼프 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한 협조를 실천하고 있었다. 그리고 F-35 전투기, 글로벌 호크 도입 등 역대급 군비 증강으로 북한을 자극했다.

문재인 정부는 글로벌 호크 도입 등 군비를 역대급으로 늘리는 위선을 범했다 ⓒ출처 전 주한미국 대사 트위터

그래서 2019년 8월 북한이 남북 평화 경제를 제안한 문재인 정부를 향해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라고 맹비난하며 “남조선과 더는 상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이후 지금까지 남북 간 공식 대화는 단절된 상태여서, 이재명 정부도 대화를 재개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

한국 국가는 서방 제국주의 국제 질서의 버팀대의 하나이고 그 질서 안에서 한국 지배계급은 미국 제국주의와의 협력을 바탕으로 성장해 왔다. 그래서 역대 민주당 정부들도 남북 화해·협력을 추진하려 하면서도 한국 국가의 대외 정책이 비교적 연속적이고 안정적일 수 있도록 한미동맹 강화 요구 등에 타협해 온 것이다.

“페이스 메이커”를 자처한 이재명 정부도 그런 한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등 일각에서는 위성락, 조현 등 정부 내 ‘동맹파’ 인사들이 너무 친미적이어서 문제라고 옳게 비판한다. 그렇지만 행정부 상층의 몇몇 자리를 교체한다 해도 한국 국가의 구조와 본질적 성격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그 속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그의 팀은 한국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충실해야 하는 직무를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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