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국가안보전략(NSS)을 둘러싼 주요 쟁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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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5일 트럼프 정부의 국가안보전략(NSS)이 발표되자, 정의길 〈한겨레〉 국제부 선임기자 등 일각에서는 트럼프가 ‘고립주의’를 선호하면서 중국과의 대결(인도-태평양 전략을 통한 중국 팽창 봉쇄)에서 후퇴하고 서반구(아메리카 대륙)에 집중하려 한다고 해설했다.
그러나 여전히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자신의 동맹 체계 바깥에서 성장한 최대 경쟁자인 중국의 도전을 물리치려 한다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중국과의 대결에서 후퇴?
물론 이번 NSS는 변화를 보여 주는 측면이 있다.
그 배경에는 미국이 아시아에서 대중 봉쇄에 실패한 현실이 있다. 이제 미·중은 단지 아시아가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다. 오바마 정부가 ‘아시아로의 중심축 전환’을 선언하던 때와는 전제(아시아·태평양에서의 대중 봉쇄로 중국의 영향력 팽창을 막고 고립·좌절시킬 수 있다는)가 달라진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후퇴하기는커녕 오랜 자신의 뒷마당인 서반구를 포함해 세계 곳곳에서 중국을 밀어내는 ‘투쟁’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트럼프의 NSS는 아시아에서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준다. NSS가 발표되기 전에는 트럼프가 제2도련선으로 후퇴할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있었다. 하지만 NSS는 제1도련선 안에서 우위를 유지할 것임을 천명했다.
따라서 트럼프가 중국을 경제적으로만 견제하려 한다는 것도 오해다. 국가 간의 경제적 경쟁이 군사적 경쟁과 얽히는 것이 바로 제국주의의 역학이다.
그리고 트럼프는 미국의 동맹국들, 특히 일본과 한국이 거기서 더 능동적인 구실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남북 관계 개선의 기회?
12월 10일 김어준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미·중 양측이 한반도 비핵화를 단념한 상황이니 이를 북미 대화로 잘 연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은 트럼프의 ‘러브콜’에 응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해 왔다. 트럼프가 위협을 지속해 왔기 때문이다. 10월 26일 한미 양측은 “참수 작전” 전력이 대거 동원된 합동 공중 훈련을 진행했다.
12월 7일 케빈 김 주한 미국대사대리는 이재명이 ‘북한 비핵화’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것에 견제구를 날리기도 했다.
이런 점들 때문에 좌파 언론 〈민중의 소리〉는 미국이 북한 비핵화를 포기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면서도, 북핵에 대한 미·중·러의 변화에 주목하는 사설을 냈다. 다른 좌파 언론 〈민플러스〉는 트럼프가 북한 핵을 인정하기도 어렵지만, NSS에서 북한 비핵화를 언급하면 생길 파장을 우려해 언급을 피했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이런 관측들은 모두 북핵을 한반도 주변 정세를 규정하는 핵심 요인으로 보는 문제가 있다. 북핵은 미·일 지배자들에게 제국주의의 유용한 명분일 뿐이다.
지난 시대에 북·미 대화가 성과 없이 끝났던 것은, 미국에게 북핵 문제가 주변 동맹국들을 결집시키는 데서 매우 유용한 쟁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북한은 중국·러시아와의 밀착을 강화해 왔다.
그리고 이제 트럼프는 세계 어디서든 중국과 대결하겠다고 하고 있고, 동맹국들에 이를 위한 더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미·중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도, 피트 헤그세스에게서 “모범 동맹국”이라는 칭찬까지 들을 만큼 미국의 요구에 적극 호응하는 식으로 이러한 변화에 대처해 왔다.
〈민플러스〉는 이재명 정부의 친미 노선이 위성락 등 일부 외교부 인사 탓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를 경질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그가 문제인 것은 맞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역사적으로 한국 자본주의는 미국 제국주의에 긴밀하게 협력하며 성장해 왔고, 동시에 한국 국가도 미국 주도 질서의 버팀대 구실을 해 왔다.
역대 민주당 정부들은 말과 달리 실천에서는 여기에 발 맞춰 왔다. 남북 화해·협력을 추진하려 하면서도, 한국 국가의 대외 정책이 비교적 연속적이고 안정적일 수 있도록 한미동맹 강화 요구 등에 응해 온 것이다. 그리고 이재명 정부도 그런 역할을 수행하려 하고 있다. 위성락이 사라져도 그의 자리를 채우는 다른 국가 관료는 위성락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자강’을 지지해야 하는가?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은 NSS에 나타난 트럼프의 요구가 약탈적임을 강조하며 이재명 정부의 한미 동맹 강화를 비판한다. 참여연대도 NSS 관련 논평에서 이재명 정부가 주권과 진정한 국익을 추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국익’에 입각한 논리로는 이재명 정부의 친제국주의 노선에 효과적으로 맞서기가 어렵다.
동맹국이 부담을 더 져야 한다는 트럼프의 압박에 직면해, 이재명 정부는 이 압박을 한국 자본주의에 이로운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핵잠수함 보유를 승인 받고 핵연료 재처리 권한 등을 얻어 내려 애쓰는 것이 그런 사례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핵무기, 탄도미사일 등을 개발하는 데서 미국의 규제를 받아 온 역사가 있다. 이재명 정부는 이번 기회에 한국 지배자들의 숙원을 이뤄 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재무장을 추진하고 있는 일본, 독일 등에도 해당하는 얘기다.
주권과 국익에 대한 강조는 18~19세기 자본주의의 발전과 국민(민족)국가들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것이다. 현실에서 이는 강대국들이 식민 지배를 강화하고, 국경과 이민자들을 더 강경하게 통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 운동이 지향한 것도 주권을 가진 민족국가였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민족주의도 바로 그런 사례였다.
그러나 이제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나 종속국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 13위권의 경제력과 5위권의 군사력을 가진 국가다. 이런 국가에서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와 자국의 군국주의화에 맞선 일관되고 효과적인 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다.
‘진정한 다극 질서’는 진보적인가?
트럼프의 NSS는 세계 곳곳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잠식되고 국제 질서의 다극화 경향이 강화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일부 좌파들은 이런 다극화 경향을 진보로 여기며 환영한다. 중국, 러시아 등이 중심이 된 비서방 국제 네트워크들이 미국을 견제할 균형추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이런 진영 논리를 지지하는 좌파들은 또한 미국의 쇠락을 돌이킬 수 없는 추세라고 일면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종종 있다.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군사적·경제적으로 세계 1위 국가이다. 그리고 상처 입은 야수일수록 더 위험하다. 미국은 결코 순순히 패권을 내려놓지 않을 것이고 위험한 모험을 벌일 수 있다.
물론 트럼프가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벌이는 조정과 모험은 그저 트럼프의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미국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부추긴, 각국의 군국주의화가 낳을 긴장을 제어하기도 더 어려워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다극적인 상황이 20세기 전반부에 양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