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포식하는 자본주의》, 《좌파의 길》(낸시 프레이저 지음):
좌파 개혁주의 강령을 펴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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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하는 페미니즘》, 《99% 페미니즘 선언》(공저), 《좌파의 길》 등의 저자로서,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이자 비판이론가인 낸시 프레이저의 책 《포식하는 자본주의》(프시케의 숲)가 최근 출간됐다. 이 책은 낸시 프레이저와 또 다른 비판이론가 라엘 예기가 자본주의에 대해 나눈 대화록이다. 장석준 정의당 정책연구소 전 소장이 번역했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2023년에 출간된 《좌파의 길》(서해문집, 장석준 옮김)과 거의 같다. 원서는 《좌파의 길》보다 이른 2018년에 출간됐다. 《좌파의 길》은 국내 좌파들 사이에서도 널리 읽혔다.
그럼에도 역자는 《좌파의 길》이 압축적으로 서술된 것과 달리 《포식하는 자본주의》에서는 프레이저 주장이 더 상세하게 펼쳐진다는 점을 특징으로 꼽았다. 즉, 그 “해설서라 할 만한”(역자) 책인 셈이다.
“확장된 자본주의”
이 책은 2010년대 중반 신자유주의 헤게모니가 흔들리고, 그에 맞서 좌/우 포퓰리즘이 대안으로 떠오르던 시기에 쓰였다. 저자는 책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우리를 둘러싼 격동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 오늘날 우리가 물려받은 특정한 형태의 자본주의 사회가 봉착한 위기로 해설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책의 대부분은 위기의 근원인 자본주의를 분석·비판하는 데 할애한다. 거기서 프레이저는 “확장된 자본주의론”을 제시한다.
그 주된 논지는 이렇다. 자본주의는 단지 경제 시스템이 아닌 제도화된 사회질서다. 자본주의는 경제 영역과 비경제적 영역을 인위적으로 분할하고(생산/재생산, 착취/수탈, 사회/자연, 경제/공적권력), 경제 영역은 비경제적 영역에 의존하면서도 책임을 회피함으로써(“무임승차”) 내적으로 끊임없는 불안정을 만들어 낸다. 이에 따르면 계급투쟁만큼이나 영역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계투쟁”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좌파의 길》에서 그는 이것을 제 살을 깎아먹는 “식인 자본주의”라고 규정했다.
프레이저는 “확장된 자본주의론”을 제시함으로써 재생산 위기, 생태 위기, 민주주의 위기, 인종차별주의의 근원을 자본주의로 지목하고, 각 영역에서 벌어지는 투쟁(인종 차별, 성차별, 생태 위기에 맞선 투쟁 등)을 통합하고자 한다.
그는 특정 차별 등 단일 쟁점에만 매몰되거나 법률에만 집중하는 자유주의적 해법들을 옳게 반대한다. 특히 그는 “진보적 신자유주의” 세력(미국 민주당, 혹은 민주당에 의존하는 사회운동)을 트럼프 등장의 주된 책임자로 지목하며 격렬하게 비판한다. “자본주의의 강고한 수탈/착취, 재생산/생산 결합체에 도전해야 하죠.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프로젝트든, 성차별주의에 반대하는 프로젝트든, 모두 더 심층적인 급진주의를 요구해요.”(210쪽)
중심을 거부
그러나 프레이저가 말하는 “급진주의”는 계급투쟁의 결정적 중요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는 현 시대 주요 위기의 원인이 자본주의라고 옳게 지적하지만, “확장된 자본주의”를 주장함으로써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로 나아가는 “길의 중간 정차역”인 진보적 포퓰리즘(민중전선주의)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프레이저는 자신의 “확장된 자본주의론”을 설파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를 경제 결정론으로 취급하고, 계급투쟁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강조를 (계급투쟁을 임금 투쟁쯤으로 협소하게 축소하고는) 다른 사회적 투쟁에 대한 경시로 오해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런 이해는 근거가 박약하다.
첫째,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를 단지 경제 시스템으로만 보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과 직결된 관계뿐 아니라 그렇지 않은 관계도 존재하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토대와 상부구조를 구분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많은 제도는, 예컨대 프레이저가 ‘비경제 영역’으로 분류한 국가도 단지 상부구조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토대의 일부이기도 하다.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개념이 출현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일부 있었던 것이다.
둘째, 스탈린주의 같은 왜곡된 마르크스주의는 경제적 변화가 기계적으로 상부구조에 반영돼 정치·이데올로기·법률·사회적 질서의 변화를 결정한다고 본다. 마르크스 자신은 경제 결정론을 편 바 없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특정 사회의 생산관계가 다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극하고 제약한다(규정하고 한계를 정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 말이, 상부구조에 속하는 영역들이 고유한 특성이 없다거나 경제의 작동과 충돌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프레이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생산 영역)가 차지하는 궁극적 중요성을 간과함으로써 사회 변화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일관되게 설명하지 못한다.
이 책 ‘2장 자본주의를 역사화한다’에서 프레이저는 자신이 제시한 네 가지 자본주의의 분할의 양상이 역사적으로 변화해 왔음을 보여 주지만, 변화의 동력에 대해서는 얼버무린다. 단지 위기의 심화와 그에 대한 사회적 행위자들의 대응이라는 일반화된 패턴의 묘사(설명이라기보다는)가 제시될 뿐이다.
그러나 예컨대 재생산이 조직되는 방식은 자본주의 생산의 변화(본질적으로 축적 논리)에 따라 변화해 왔다. 공장제 발전 초기에 노동계급 가족의 해체와 19세기 중반에 다시 재건된 것, 제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 등지에서 전쟁 수행을 위해 이례적으로 재생산을 사회화한 것, 오늘날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가 늘어나면서 가족의 구체적 형태와 관련 정책이 변화하는 것 등이 모두 그렇다. 이런 관점에서 역사를 봐야 더 일관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계급투쟁의 중요성
셋째, 계급투쟁이란 사회적 생산의 토대와 착취 과정을 지배하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상부구조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형태를 이용하는 사람들과, 그들에 맞서 저항하는 사람들 사이의 투쟁이다. 엥겔스가 지적했듯이, 경제투쟁뿐 아니라, 정치투쟁, 이데올로기 투쟁을 포함한다.
이렇게 본다면, 프레이저가 “경계투쟁”의 사례로 언급한 것들이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투쟁에 속함을 우선 짚어야겠다. 아동·노인 돌봄 같은 공공 서비스를 위한 투쟁, 유급 출산·육아 휴가 확대를 위한 투쟁, 이주민·가사도우미·공공부문 피고용자 권리를 위한 투쟁 등.
또한 계급투쟁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강조가 다른 사회적 투쟁에 대한 경시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차별받는 다양한 사람들의 투쟁을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열의 있게 지지해 왔다. 차별이 차별받는 집단에게 정의롭지 못할 뿐 아니라, 노동계급을 내부적으로 분열시켜 그 힘을 약화시킨다는 점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계급투쟁은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예컨대 프레이저가 자본주의의 핵심 특징이자 불의로 묘사한, 자본주의가 비인간 자연을 강탈하는 일, 재생산에 충분한 투자를 하지 않는 것 등의 원인은 바로 자본주의가 이윤 경쟁과 자본 축적에 몰두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로 그 지점에 타격을 가할 투쟁이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야만 한다.
노동계급이 핵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노동자들이 착취당한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이윤의 원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객관적 위치 때문에 노동자들이 그 잠재력을 실제로 사용하면 착취자들과 억압자들에게 도전할 수 있다. 그래서 노동계급은 “보편적 계급”인 것이다.
그러나 프레이저는 수탈(강제로 빼앗음)을 강조함으로써 노동계급의 중요성을 희석시킨다. 그는 자본주의의 착취가 수탈에 의존한다고 본다. 하지만 그 반대다.
수탈을 통해 일부 자본가들이 이득을 보는 일은 자본주의 축적 과정에서 언제나 수반됐던 현상이다. 오늘날에도 인도 등지에서는 신흥 농업자본가들이 자기 지방 농민들의 땅을 강탈하는 일에 혈안이다.
그러나 수탈은 피수탈자를 억압하고 고통으로 내몰지만, 수탈 행위 자체로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거나 자본가 계급 전체가 더 많은 잉여가치를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수탈은 이미 생산된 잉여가치를 (특별한 방식으로) 배분하는 문제다. 따라서 수탈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산돼야 한다. 자본주의하에서 수탈이 존재하더라도(심지어 신자유주의 시대에 강화됐다고 하더라도) 생산 지점에서 착취에 맞선 투쟁이 여전히 중요한 이유다.
진보적 포퓰리즘
프레이저의 “진보적 포퓰리즘”이 오늘날 심화되는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있을까? 진보적 포퓰리즘은 한 줌의 부패한 엘리트를 제외한 나머지 국민/민중/시민사회가 계급을 초월해 단결하자는 전략이다.
프레이저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한 (북미의) 민주당과의 연대는 거부한다. 그러나 피착취층과 “피수탈층”이 주도적으로 “청년, 중간계급, 전문직·관리직 계층의 상당부분”과의 연합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389쪽)
동시에 프레이저는 ‘운동들의 운동’으로는 부족하다고 옳게 지적한다. “[우리는] 사회운동이 화려한 모습으로 분출해 광장을 점거하고 대중의 이목을 끌다가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어요. 스페인의 포데모스만 예외죠.”(329쪽) 그리하여 그가 더 구체적으로 그가 향하는 곳은 좌파 개혁주의 프로젝트이다. 그는 샌더스, 코빈, 멜랑숑, 포데모스, 초기 시리자를 (불완전하다고 단서를 달면서도) 우호적으로 언급한다.
하지만 이 책의 원서가 나온 지 7년 뒤인 2025년 지금, 이들 대부분의 처지는 상당히 꾀죄죄하다.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그리스의 시리자다. 시리자는 긴축 반대 투쟁을 배경으로 2015년 초에 집권했지만, 집권하자마자 지지자들의 긴축 반대 염원을 배신해서 지지를 잃고 영향력이 대폭 축소됐다. 포데모스는 2019년 사회당과의 연정에 참여하면서 카탈루냐의 자결권 옹호를 회피했다. 지난해 총선에서 신민중전선을 구성한 멜랑숑은 선거에서 이민자 문제와 팔레스타인 연대를 부차화했다. 샌더스는 더 나아가 올해 LA 항쟁을 비난했다.
이런 후퇴는 우연이 아니다. 진보적 포퓰리즘 전략이 (설사 말은 매우 급진적으로 하더라도) 자본주의 국가를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를 바꾸는 수단으로 이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국가 기관(의 선출된 공직들)에 진출하는 것을 목표함에 따라 자본주의의 지배적 사상에 대한 순응으로 곧잘 이어지는 선거주의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프레이저가 1917년 러시아 혁명기에 소비에트가 경제와 정치 간 분리를 폐지하려 한 것을 비판하는 대목에서는, 그도 자본주의 국가 해체를 반대하는 개혁주의로 미끄러질 위험을 드러낸다.
그러나 오늘날 심화하는 자본주의 위기의 대안을 건설하고 진정으로 사회주의가 헤게모니를 행사하고자 한다면,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권력이라는 혁명적 길을 고려해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