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좌파 정부 몰락과 극우 재부상의 원인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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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라틴아메리카에서 나쁜 소식이 많이 들려 왔는데, 칠레 대선에 재도전한 극우 안토니오 카스트가 12월 14일 압승한 것도 그중 하나다.
카스트는 2022년 대선에서 현 대통령 가브리엘 보리치에 패했을 때보다 극우 본색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며 당선됐다. 카스트는 트럼프를 본따 ‘국경 장벽’ 설치 등 강경한 이민 통제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고, 1973년 유혈 쿠데타로 집권한 피노체트 군부 독재를 노골적으로 찬양했다.
카스트는 트럼프가 라틴아메리카 극우를 지원하며 개입해 온 데서 득을 봤다. 트럼프는 베네수엘라 마두로 정부를 겁박하며 극우 코리나 마차도를 지원하고, 10월 볼리비아 극우의 대선 승리와 11월 말 온두라스 극우의 대선 도전을 지원했다(극우 당선 유력).
트럼프가 이끄는 미국 극우 운동 마가(MAGA)도 카스트를 지원했다. 미국 보수정치행동회의(CPAC)는 대규모 행사에 카스트를 초대해 연단을 제공했고, 거기 참가한 친(親)마가 기업인들은 카스트와 회동해 지지를 약속했다.
스페인 극우 정당 복스(Vox), 아르헨티나 극우 대통령 밀레이의 정당 ‘자유전진’, 브라질 극우 전 대통령 보우소나루의 지지자들도 카스트 지지를 선언했다.
하지만 카스트가 당선한 핵심 동력은 보리치 정부가 자아낸 환멸이었다.
보리치는 2019년 칠레를 뒤흔든 대중 항쟁에서 드러난 사회개혁 염원 덕분에 부상했다. 당시 칠레에서는 중도좌파 정부의 대중교통 요금 인상에 항의하며 대중 항쟁이 분출했다(관련 기사 본지 303호, ‘100만 시위가 산티아고를 휩쓸다’).
항쟁의 핵심 구호 “30페소가 아니라 30년이 문제다”는 기성 권력층 전반에 대한 항쟁 참가자들의 분노와 사회개혁 염원을 보여 준다.
이 염원을 업고 보리치는 군부 독재 시절 제정된 헌법을 고치고 사회개혁을 하겠다고 공약하며 당선했다.
보리치는 복지를 강화하고 선주민과 성소수자 집단의 인권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보리치는 기성 권력층과의 협상과, 국가 기구를 손상시키지 않고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약속을 실현하려 했다.
보리치는 중도 정당들과의 협상으로 의회에서 최저임금 인상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인상폭은 물가 급등으로 심화되는 서민 생활고를 완화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반면 그 협상을 이끌어내기 위해 보리치는 상당한 후퇴를 했다. 보리치는 경찰 권한을 강화했고, 전임 정부의 긴축 정책을 일부 계승했다. 보리치의 인기는 빠르게 식었고, 사회개혁 염원 대중의 분노와 환멸이 커졌다.
보리치는 대자본가·권력층에 맞설 힘이 있는 거리와 일터의 투쟁을 단속했고, 개헌에 정치적 판돈을 다 걸었다.
개헌에 다 걸기
보리치는 독재 정부하에서 제정된 헌법을 바꿔 칠레 민주주의를 전진시키고, 서민 생활고를 완화할 제도적 발판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애초에 이 개헌 논의는 대중 동원을 해제시키는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보리치를 후보로 내세운 칠레 공산당은 2019년 항쟁에서 주변적 위치에 있었다. 친기업 중도 정당들과 연립 정부를 운영하며 긴축을 추진했던 이력 때문에 대중의 불신을 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쟁으로 당시 정부가 개혁 요구를 일부 수용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리자, 공산당(그리고 사회당)은 이를 운동에 대한 통제력을 얻을 기회로 봤다. 공산당은 지속 가능한 개혁을 하려면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며 대대적인 개헌 운동을 벌이며 항쟁으로 분출한 대중의 에너지를 개헌으로 수렴시켰다.
개헌 문구와 개헌의 법적 절차를 둘러싼 논의가 지루하게 이어지는 동안 대중 저항은 소강됐다.
몇 년 후 보리치에 의해 발의된 개헌안은, 기껏해야 타협적이었다. 개헌안에는 노동자와 선주민들의 기본적 권리를 일부 보장하는 내용이 포함됐지만, 피노체트 정부의 야만적 탄압 기구들과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보존할 근거 조항들도 포함됐다.
그 이유 하나는 개헌안 작성을 주도한 법조인들이 같은 법조계의 일원으로서 그전 헌법 작성자들과 인적·정치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법조계뿐 아니라 칠레에 만연한 적폐다.
독재자 피노체트는 1990년에 물러났지만, 그 퇴진 과정은 범민주파 정당들과 독재 정권의 여당 사이에 이뤄진 “민주주의로의 질서 있는 전환” 합의를 통해 수행됐다.
이후 집권한 범민주파 정당들은 독재 잔당 숙정 없는 “질서를 유지하는 민주화 연합”을 추구했다. 피노체트는 죽기 전까지 단 하나의 유죄 판결도 받지 않았다.
정당 간 합의로 다시 합법화된 공산당·사회당들도 그 과정에 일조했다. 그들은 독재 잔당 청산 문제에 침묵하고 대중의 항의를 자제시켰는데, 독재 잔당 청산을 위한 투쟁으로 사회 질서가 교란되면 중도 정당들과의 개혁 협력(연립정부 수립을 통한)에 차질이 빚어질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산당·사회당의 그런 전략은 그들이 아옌데 하에서 연립정부를 이루고 집권해 있던 1973년에 쿠데타를 막지 못함으로써 이미 실패한 바 있다.(관련해 본지 473호 ‘칠레 피노체트 쿠데타 50년: 영웅적인 노동계급 반란의 패배에서 배울 교훈은 무엇인가?’를 보시오.)
포스트 피노체트 타협의 결과로 피노체트 하에서 권력을 누리던 관료와 기업인들은 전혀 심판받지 않았고, 그 후계자들이 오늘날에도 국가 기구와 사회 상층부를 주름잡고 있다.
그런 자들과 협력하려다 누더기가 된 보리치의 개헌안은 사회개혁 염원 대중에게 실망을 줘, 국민투표에서 큰 표차로 부결됐다. 보리치 정부는 임기 첫해부터 레임덕에 빠졌다.
제헌의회 선거에서 카스트가 이끄는 공화당이 제1당이 돼, 도리어 그들이 제헌의회를 주도했다. 그들은 이민 통제 및 임신중지권 제약 강화를 골자로 하는 반동적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쳤는데, 다행히 근소한 표차로 부결됐다.
개헌안 국민투표 동원을 제외하면, 대중 운동은 보리치 정부 임기 내내 사실상 동원 해제돼 있었다. 생활고에 항의하는 자주적인 대중 운동이 없는 상황에서 대중의 환멸과 사기저하는 심각했다. 바로 이 때문에 극우가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칠레에서 극우 정부에 맞서 대중 저항이 되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와 미국의 노동계급 사람들이 트럼프와 그의 라틴아메리카 동맹자들에 맞서 저항이 크게 벌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