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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내란 청산과 극우 팔레스타인·중동 이재명 정부 이주민·난민 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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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해방 문제

약 100년 전, 한 줌의 서방 국가들이 사실상 세계 전체를 분할해 정치적으로 지배했다. 그 국가들은 단지 경제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데 그치지 않았고, 식민 지배 기구들을 통해 세계를 정치적으로 지배했다. 그 기구들이 충성을 바치는 장관과 군주들은 서방 국가들의 수도에 있었다.

영국 정부는 런던에 앉아서 지구의 4분의 1을 포괄하는 제국을 운영했다. ‘해가 지지 않는’ 영국 제국을 비판자들은 ‘피가 마를 날이 없는’ 제국이라고 불렀다. 프랑스는 아프리카 대륙의 거의 절반을 지배했다. 네덜란드는 방대한 동인도 제도(오늘날의 인도네시아)를 지배했다.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트는 콩고를 개인적으로 소유했다. 미국은 필리핀과 푸에르토리코를 식민지로 차지했고, 중앙아메리카와 쿠바에서는 명목상 독립국인 정부들을 지배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을 거듭했다. 빈, 상트페테르부르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제국들[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이 동유럽과 남동부 유럽 대부분을 지배했다. 러시아는 인도·중국 국경에까지 이르는 광활한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다. 중국은 허울뿐인 독립국으로 남았다. 그러나 그전 60년 동안 서방 열강과 일본이 중국의 주요 도시들을 ‘조차지’(식민 지배 세력이 직접 통치하는 치외법권 지역)로 차지했다.

식민 지배의 결과로 현지의 빈농 대중은 그전보다 더 궁핍해졌다. 인도에서 끔찍한 기근이 1760년대(1000만 명 사망), 1860년대(100만 명 사망), 1870년대(50만 명 사망), 1890년대(1000만 명 사망), 1940년대 초(300만 명 사망)에 잇달아 닥쳤고, 1840년대 아일랜드에도 닥쳤다(약 100만 명 사망). 그러나 영국에 의해 밀려난 옛 현지 지배계급의 일부도 식민 지배에 적개심을 품게 됐다. 식민 지배 탓에 이들은 권력에서 배제됐고 모욕적인 인종차별적 학대를 종종 겪어야 했다. 상하이 공원의 악명 높은 한 표지판 문구는 그 실상을 분명히 보여 준다. “개와 중국인 출입 금지.” 여기서 “중국인”은 빈농이나 가난한 노동자뿐 아니라 고위 관리와 부유한 상인까지 가리키는 말이었다.

인도의 주요 상인·지주들은 1750년대 말과 그 이후 영국이 벵골만을 정복할 때 이를 환영했었다. 그러나 환영은 곧 적개심으로 바뀌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영국의 동인도회사 관리들이 노략질을 일삼았고, 모든 인도인들을 ‘깜둥이’라고 경멸하는 백인 식민주의자들의 인종차별이 갈수록 심해졌기 때문이다. 영국에 맞선 위대한 봉기였던 1857년 ‘반란’[세포이 항쟁]은 인도의 전통적 지배 엘리트 출신들이 이끌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집트에서도 전통적 지배계급이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영국의 통치에 맞선 계획을 꾸몄고, 20세기 초엽 중국 지배자들 중 일부는 서방의 지배에 맞서는 ‘의화단의 난’에 동조적이었다.

식민 지배의 결과로, 자신들의 열등한 지위에 갈수록 분개하게 되는 새로운 사회 계층이 생겨났다. 식민지 관리인들은 현지인들을 고용하지 않고서는 거대한 제국을 운영할 수 없었다. 군대의 사병과 하사관을 대부분 현지인들로 충원했고, 정부 기구의 일상적 사무를 현지인들에게 맡겼다. 경제의 가장 수익성 있는 부분을 장악한 서방 기업들도 현지인 점원과 감독관, 현지 무역상들과의 접선책을 필요로 했다. 일반적으로, 제국의 관할 구역이 클수록 거기에 속한 ‘원주민’ 중간계급의 규모도 더 컸다. 이 중간계급은 식민지 지배층 엘리트와 부대끼며 살았고, 교육을 통해 그들의 사상을 받아들였고, 종종 그들의 언어를 제1언어로 삼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자신들의 열등한 지위에서 비롯하는 분노를 완전히 떨쳐 버릴 수는 없었다. 그런 중간계급 중 일부는 반격을 위해 그들 자신의 강령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 계급 사람들이 인도 국민회의, 이집트 와프드당, 중국 국민당, 아일랜드 신페인당의 중핵을 형성했다. 이 단체들의 공통되는 핵심 주장은 식민지에서 억압받는 이들이 ‘민족’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민족으로서 그들 자신의 국가, 행정부, 군대를 갖기 위해 투쟁했고, 많은 경우 그들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 투쟁했다. 이들은 ‘민족 해방’이라는 요구를 내걸고 인구 다수를 동원하려고 했다. 이들은 시위, 세금 납부 거부뿐 아니라 때로는 파업과 무장 봉기도 조직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민족(성)’이라는 개념이 너무도 익숙한 나머지 마치 인간 생활의 변치 않는 일부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민족 개념은 상대적으로 최근에야 역사에 등장했다. 서유럽에서 수백 년 전에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다른 지역에서는 더 최근까지) 군주정과 귀족정이 계급 사회의 주된 형태였다. 대다수 민중은 자신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국가 기구와 거의 아무런 유기적 관계도 맺지 않았다. 실제로 12세기 잉글랜드든, 17세기 무굴 제국이든 왕족이 사용하는 언어(잉글랜드에서는 노르만 프랑스어를, 무굴 제국에서는 페르시아어를 썼다)는 인구 다수가 사용하는 언어와 상당히 달랐고, 그 인구 다수가 사용하는 언어도 여러 방언으로 나뉘어 서로 소통이 안 되는 경우가 흔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마을이나 자신이 종사하는 직종에 소속감을 느낄 수는 있었다. 자기 지역의 사제를 따르거나, 국경을 넘나드는 종교·문화에 느슨한 소속감을 가지거나(예컨대, ‘기독교 세계’나 이슬람), 심지어 특정 지도자에 충성심을 느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특정 ‘민족’에 속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런 사정은 서유럽 일부에서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지역 자본가들이 시장을 자기 세력권하에 두고, 국가에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그들은 특정 방언을 해당 국가의 고유한 ‘민족 언어’로 만들려 했고, 전체 인구를 대상으로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려 했다. 그 결과 1780년대가 되면 잉글랜드·웨일스·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두 ‘영국인’이라는 말을 들었고, 1789~1793년 프랑스 혁명의 지도자들은 ‘프랑스는 단일하고, 나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자본주의 국가들의 등장을 보며 다른 곳의 중간계급들도 이를 모방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때까지도 유럽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던 절대 왕정의 억압에 부딪혔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북아메리카와 아일랜드의 중간계급들은 가장 성공적으로 부상한 자본주의 국가의 억압에 부딪혔다. 이들은 민족 국가 수립 염원을 이루려면 기존 질서에 반기를 들어야만 했다. 1770년대 중엽 북아메리카의 중간계급은 영국의 지배를 거슬러 스스로 민족을 조직해 성공을 거뒀다. 1790년대 아일랜드 중간계급의 일부도 똑같은 일을 시도했지만 무참히 분쇄당했다. 1810년대와 1820년대에는 스페인어를 쓰는 중간계급들이 미국과 프랑스 선례를 따라해 성공을 거뒀다. 바로 멕시코·칠레·아르헨티나·베네수엘라·콜럼비아·볼리비아·페루였다. 1840년대 말에는 독일·헝가리·이탈리아에서 통일과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들이 벌어져 유럽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중 독일과 헝가리는 1870년에 자신들의 민족 수립 염원을 달성했다. 이는 다시 숱하게 많은 운동을 고무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체코인과 남(南)슬라브인, 튀르키예의 지배를 받던 불가리아인과 루마니아인,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우크라이나인과 핀란드인이 그런 경우였다.

일부 중간계급이 시작한 이런 민족 운동은 거의 모든 경우 한 가지 중대한 효과를 낳았는데, 바로 전제정을 약화시켰고 그 덕분에 다른 사람들도 전제정에 맞서 싸우는 것이 더 수월해졌다는 것이었다. 이는 지배계급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에게도 해당됐다. 예컨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밀라노와 베니스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같은 제국의 지배를 받던] 빈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반란을 일으켰고,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바르샤바에서 일어난 반란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차르 타도를 꾀하는 이들을 돕는 구실을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처럼 모든 형태의 억압과 착취에 반대하는 이들은 헝가리·폴란드·이탈리아·아일랜드에서의 민족 반란을 환영했고 그런 항쟁이 사회주의를 위한 노동계급의 투쟁에 이로운 것이라고 여겼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잉글랜드 노동계급이 잉글랜드의 그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결정적 구실을 할 수 있으려면 먼저 아일랜드 문제에서 지배계급의 정책과 가장 단호하게 단절해야 한다. 아일랜드인들과 공통의 대의를 추구할 뿐 아니라 1801년에 결성된 연합 왕국을 주도적으로 해체하고 이를 자유로운 연방 관계로 대체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아일랜드를 불쌍히 여겨서가 아니라 잉글랜드 프롤레타리아의 이해관계라는 관점에서 요구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잉글랜드인들은 대(對)아일랜드 전선에서 지배계급의 편에 설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지배계급에 속박된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1]

다른 곳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타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은 해방될 수 없다.”

식민 지배에 대한 이런 적개심은 마르크스 사후에도 이어졌는데, 그의 딸 엘리너 마르크스, 잉글랜드 혁명가 윌리엄 모리스, 폴란드계 독일인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도 그런 경우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조류도 생겨났다. 바로 기존 국가를 이용해서 사회를 변화시키고 개혁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조류였다. 이런 관점을 따라 영국의 페이비언주의자들이나 독일의 개혁주의적 사회[민주]주의자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자국이 다른 곳을 식민 지배하는 것이 진보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07년 국제 사회주의 대회에서 소수의 대표단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식민 점령을 지지했다.

이들은 식민 점령 군대들이 인도·이집트 등지에서 새로운 저항 운동들을 분쇄하고 있던 바로 그때에 식민 점령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들에게 민족 해방은 유럽에만 해당되고 그 밖의 세계는 논외였던 것이다.

1914년에 대제국들이 서로 전면전[제1차세계대전]을 벌였다. 영국·프랑스·벨기에·러시아 제국들이 한편에 섰고 독일·오스트리아·오스만-투르크 제국들이 다른 편에 섰다. 그 전쟁의 부산물 하나는 각 제국의 지배자들이 보여 준 엄청난 위선이었는데, 비슷한 위선을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보고 있다. 각 제국은 유럽의 억압받는 민중을 위한다며 자유가 억압받는 현실을 장황하게 비난했다. 물론 적성국이 자행하는 억압만 비난했다. 예컨대 독일은 아일랜드와 폴란드가 겪는 억압을 비난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트리아가 남슬라브를, 튀르키예가 아랍인들을 억압한다고 비난했다. 이런 위선의 정점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전쟁 막바지에 ‘모든 곳에서 민족 자결권’이 보장돼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물론 미국이 장악한 필리핀과 푸에르토리코는 예외였고, 이후 미군이 아이티·쿠바·니카라과에 상륙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전쟁을 계기로 모든 제국주의에 맞서는 진정한 해방 운동들이 힘을 받기도 했다. 1916년에는 영국의 가장 오래된 식민지 아일랜드에서 봉기가 분출했고 1919~1921년에 게릴라 전쟁이 벌어졌다. 인도와 이집트에서는 준(準)혁명적 운동들이 거대하게 벌어졌다. 동인도 제도에서는 네덜란드의 지배에 반대하는 시위가 크게 일었다. 중국에서의 학생 시위는 이후 10년 동안 조차지 폐쇄와 중국 통일을 위해 투쟁하게 되는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전쟁과 그 여파로 개혁주의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기성 정부에 참여할 기회를 처음으로 얻게 됐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그랬고 이후 독일에서는 전쟁의 마지막 몇 주 동안 그랬다. 이전까지 그들은 식민 점령이 ‘문명화[시킨다는] 사명’에 대해 말로만 떠드는 것이 전부였다면, 이제는 물리력을 동원해 민족 해방 운동들을 억압하고 나섰다. 영국 노동당의 지도자 아서 헨더슨은, 더블린 봉기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아일랜드 사회주의자 제임스 코널리를 처형한 전시 내각의 성원이었다.

제1차세계대전은 사회주의 운동의 또 다른 조류, 즉 혁명적 조류가 민족 해방 운동에 대한 입장을 가장 명료하게 가다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일련의 글과 연설을 통해, 억압받는 사람들의 민족 해방 운동과 억압하는 나라의 노동자 운동이 동맹을 맺을 수 있다고 상세하게 설명했다. [레닌은 이렇게 설명했다.] 비록 민족 해방 운동을 이끄는 이들이 중간계급이고 그들의 목적은 신흥 자본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지만, 그들의 행동은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강대국들을 약화시키고 그 국가들이 자국의 노동자들을 억누르기 어렵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또, 민족 해방 운동은 수백만 빈농과 노동자들을 정치 활동으로 끌어들이고 그들은 이후 정부를 교체하는 것 이상을 요구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서방의 노동자 운동은 전력을 다해 식민지에서의 해방 운동을 지지해야 한다.

즉, 피억압 민중의 자결권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고, 만약 그들의 바람이 독립이라면 그것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그런 입장이 노동자 운동을 서로 적대하는 민족들로 파편화시키는 효과를 낼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레닌은 그런 주장을 단호하게 반박했다. 피억압 민족의 민중이 그들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방어하고 나설 때에만 억압 민족의 민중은 하나의 운동에 함께한다는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레닌은 지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민족 해방 운동을 이끄는 중간계급 지도자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거나, 레닌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에게 빨간 칠” 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 지도자들은 새로운 자본주의 민족 국가 수립에 성공할 경우 이내 그 국가를 이용해 노동자 운동을 적대시할 사람들이다. 또한 그 지도자들은 건국을 완수하기 전에도 제국주의에 맞선 너무 강력한 선동은 단속할 공산이 크다. 노동자·빈농이 외국인 자본가·지주만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대신하고자 하는 토착 자본가들까지 적대할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문제에 관해서는 레온 트로츠키가 1920년대 중국에서 벌어진 일을 관찰하며 상세하게 쓴 바 있다. 1920년대 초에 일부 중국 자본가들은 반(反)외세 선동에 적극적이었고, 심지어 국민당은 홍콩의 영국 회사들에 맞선 장기 파업에 자금을 대기까지 했다. 그러나 민족 해방 운동이 성장하면서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행동에 나서게 되자 사람들은 더 이상 외세의 착취와 억압만 반대하지 않았다. 노동자와 빈농은 중국인 자본가·지주들에게도 맞서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국인 자본가들과 국민당은 태도를 180도 바꿔서 서방 식민주의자들과 손잡고 상하이와 광둥에서 노동자들을 학살했다. 자신들의 계급 지위가 위협받을 바에는 차라리 민족 해방 목표를 내던진 것이다.

트로츠키가 이끌어 낸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민족 해방 운동이 사보타주당하는 것을 막으려면 처음 그 운동을 이끌었던 중간계급 지도자들에게서 독립적인 노동계급 행동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는 이런 과정을 ‘연속혁명’이라고 불렀다.

1920년대에 서방 지도자들은 대부분의 식민지 해방 운동을 물리치는 데에 성공했다.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 4분의 3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일랜드에서도 민족 해방 운동의 중간계급 지도자들은 아일랜드의 가장 부유한 지역, 즉 북동부의 여섯 개 주(州)에서 영국이 통제권을 유지하는 데에 합의해 줬다. 프랑스와 영국은 이전까지 독일과 튀르키예가 지배하던 땅을 차지하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더 많은 점령지를 갖게 됐다.

그러나 민족 해방 요구를 언제까지나 억압할 수는 없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 민족 해방 운동은 인도와 이집트, 동인도 제도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시리아, 이라크, 베트남, 서인도 제도에서도 벌어졌다. 런던과 파리에 있는 아프리카인들도 모국의 해방을 꿈꾸기 시작하며 범(凡)아프리카 운동 속에서 카리브해 출신 활동가들과 연계를 맺었다.

유럽 제국들을 운영하던 자들은 통제권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1942년 인도에서 당시까지로서는 가장 큰 반란이 일어나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왕 폐하의 제1총리가 된 것은 영국 제국을 청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1946년 2월 인도 해군이 반란을 일으키자 처칠의 후계자인 클레멘트 애틀리는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만약 그가 인도 독립을 평화적으로 양보하지 않으면 힘에 떠밀려 그래야 할 상황이었다. 1947년 영국은 190년 만에 인도 아대륙에서 철수했다. 2년 후에는 이전까지 일개 게릴라 부대였던 중국해방군이 베이징으로 진군했고 서방의 중국 분할이 막을 내렸다.

인도에서의 철수는 훗날 영국 제국이 막을 내리는 과정의 시작이었지만 영국은 그 막을 내릴 의사가 없었다. 영국은 케냐, 말레이시아, 키프러스, 광물 자원이 풍부한 아프리카 중부 지역을 손아귀에서 놓치지 않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 폭격하고,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해치는 짓을 수십 년 동안 더 이어갔다.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전면전을 9년 동안 치렀고, 그 뒤에는 알제리를 상대로 또 다른 전면전을 7년 동안 치렀다. 포르투갈은 1974년 초까지도 아프리카 식민지(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에서 독립 운동을 분쇄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1960년대 초가 되면 유럽 열강은 직접 통치를 유지할 비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을 시인해야 했다. 적대적인 식민지 중간계급이 인구 다수를 반란에 성공적으로 동원했기 때문이었다. 현지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세력 또는 현지 자본주의 발전을 열망하는 중간계급 정치인들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것이 훨씬 수월한 선택이었다. 그 후 서방은 대기업들의 막강한 경제력을 동원해 이 신흥 자본가들(또는 국가자본가들)이 서방에 득이 되는 거래에 응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40년이 지나자 종전 방식의 식민지들은 거의 모두 자취를 감췄다. 백인 식민 지배자들이 아프리카 남부에 세웠던 짐바브웨, 나미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마침내 흑인에 의한 다수결 통치가 관철됐다. 홍콩은 중국에 반환됐다. 영국 정부는 식민 지배가 야기한 대혼란을 수습하려 사력을 다하며 심지어 아일랜드에서도 아일랜드공화국군(IRA)과 협상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족 해방 문제는 분명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첫째, 중동 내 작지만 아주 중요한 지역에 여전히 그 문제가 남아 있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그 지역 대부분을 장악한 영국 정부는 석유 생산지를 보호하고 인도로 가는 길목을 지키기 위해 유럽 출신 유대인 식민 점령자들에게 그들만의 ‘고향’을 건설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땅에는 팔레스타인계 아랍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말이다. 1948년에 영국 제국이 이 지역을 포기하자, 그 식민 점령자들은 미국과 소련의 군사 지원을 바탕으로 팔레스타인 땅의 78퍼센트를 차지했다. 이후 1967년 전쟁을 통해서 남은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차지하고 정착자들을 더 들이기 위해 또다시 팔레스타인인들을 살던 곳에서 몰아냈다.

미국은 이런 상황에 만족하고 있다. 미국에게 이스라엘은 듬직한 경비견, 즉 세계 최대 석유 매장지인 중동에서 미국의 지배력에 반기를 드는 일체의 국가나 운동을 억누를 태세인 경비견이기 때문이다.

둘째, 지난 두 세기 동안 생겨난 민족 국가 중에는 그 안에서 소수 민족이 억압당하고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심지어 스페인처럼 오래된 국가에서도 그런데, 많은 카탈루냐인들과 바스크인들은 카스티야의 지배하에 있는 것에 불만을 갖고 있고, 자신들만의 민족 국가를 세워서는 안 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부분의 지역에서 제2차세계대전 이후 독립을 이룬 민족 국가들은 과거 서방 국가들이 자기들끼리 세력권을 나눌 때 임의로 그었던 국경선을 그대로 유지했다. 많은 경우, 새로운 독립 민족 국가에서 권력을 잡은 중간계급이나 자본가 집단은 자신이 속한 특정 부족의 언어, 때로는 종교까지 다른 종족들에게 강요하려 들었다. 그러면서 수단, 이라크, 튀르키예, 인도, 파키스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에서 소수 부족들이 새로운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키며 국가의 지배적 민족주의에 반기를 들었다.

이런 사정은 최후의 거대 다민족 제국이던 소련이 붕괴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1920년대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각 민족이 연방 안에서 대등한 관계를 누리고 원할 경우 소련을 벗어날 수 있다는 혁명적 이상을 파묻었다. 그 대신 소련 정부가 지배하는 중앙집중적 통제를 강요했다. 그럼으로써 스탈린은 사실상 러시아 제국을 부활시켰다. 차르의 정복 군대에게 가장 크게 고통받았던 체첸인 등은 이제 고향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강제 이주당하며 더 지독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소련이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거듭 위기를 겪을 때, 민족주의 운동들이 발트해 인근 지역에서부터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거쳐 중앙아시아까지 거대한 호(弧)를 이룬 지역에서 등장했다. 이들은 억압 종식을 요구했다. 이들은 더 큰 탄압에 시달렸지만 1991년 소련이 붕괴했을 때 마침내 독립을 이뤘다.(종종 옛 소련 정치국에 속했던 현지인들이 이를 이끌었다!) 그러나 이들 국가들에는 다시 그 안에서 억압받는 소수 집단이 있었다. 한편, 체첸인들은 러시아 공화국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한편,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민족자결권의 언어를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법을 크게 발전시켰다. 영국은 민족자결권을 내세워 1920년대 아일랜드 북동부 지역을 계속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이 지역은 개신교도가 다수이므로 [나머지 아일랜드와 구별되는] 별도의 자치국을 필요로 하는 별개의 민족(‘얼스터 브리티시’)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 자치국에서는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가톨릭교도가 차별받는다.

영국은 1930년대 말~1940년대 초에 인도 아대륙에서 아주 비슷한 방식을 썼다. 그 지역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슬람을 믿는 다양한 집단들이 별개의 ‘민족’을 이루며, 인도가 통일된 국가로 독립하면 그들이 힌두교도와 시크교도에 의해 억압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조장한 것이다. 이들은 [오늘날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를 인도에서 떼어내며] 제국을 보호하기 위한 분열 지배 전략을 민족자결의 언어로 정당화했다.

똑같은 수법이 1948년 이스라엘 정착자들이 팔레스타인 땅의 78퍼센트를 강탈할 때도 동원됐다.

마거릿 대처가 이끌던 영국 정부는 포클랜드/말비나스 섬을 놓고 아르헨티나와 전쟁을 벌였는데, 인구가 2000명인 이 섬의 ‘자결권’ 지지를 명분으로 내세웠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대처는 인도양의 [영국령] 디에고가르시아 섬에 미국 공군기지를 짓기 위해 주민 2000명을 퇴거시키는 것에 동의했다.

유고슬라비아 국가가 위기에 빠져 있던 1990년대 초, 당시 세력권 확대를 노리던 오스트리아는 접경한 슬로베니아에게 민족 독립의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뒤이어 독일이 나섰는데, 독일은 크로아티아 독립에 큰 이해관계가 있었다. 이후 미국이 보스니아인들 중 무슬림은 억압받는 소수라고 선언하며 개입했다.

이라크 국가가 서방의 동맹이었던 1980년대에는 쿠르드인들의 고통은 외면받았다.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쿠르드인들에게 독가스를 썼는데도 그랬다. 그러나 서방과 사담 후세인이 갈라서자 미국 CIA는 갑자기 쿠르드인들의 요구를 지지하며 그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한편, 같은 쿠르드인들 중 국경 너머 튀르키예에 있는 이들이 꾸린 주요 정당 쿠르드노동자당(PKK)은 미국의 ‘테러리스트 조직’ 명단에 올라가 있다.

제국주의 열강이 민족 해방의 언어를 이처럼 멋대로 가져다 쓰듯이, 다른 나라들의 신생 정권들도 마찬가지다. 현지 자본가 계급들은 다국적 기업 및 서방 열강과 협력하면서도, 파업 노동자나 토지 점거 농민, 권리를 위해 싸우는 피억압 소수자들에게 ‘반(反)민족적’이라는 비난을 퍼붓고 이를 위해 애국주의를 동원한다. 그들은 자국의 노동자·농민이 다른 나라 노동자·농민을 불신하도록 만들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또, 그들은 외교 갈등이 벌어지면 ‘반제국주의’를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접경한 국가의 자본주의 정부에 맞서 이해관계를 지키려고 싸우는 것일 뿐이다. 심지어 그들이 자본주의 열강과 충돌할 때조차 실제로는 그 열강과의 협력 조건을 두고 거친 방식으로 협상하는 것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민족주의적·반제국주의적 언사는 아편과 같은 구실을 하는데, 현지 노동자·농민이 현지 자본가들의 착취를 더 많이 감내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민족 해방’을 말하는 이들을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 차별을 낳는 더 광범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민족 해방’을 명분 삼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진정으로 억압받는 집단의 사람들조차 자신들의 힘이 매우 약하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더 광범한 사람들을 더 심하게 억압하는 기구인 국가에 기대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또한 과거에 억압받은 적이 있는 집단이 해방을 들먹이며 다른 집단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할 수도 있다.

마르크스가 아일랜드 문제에 관해 쓴 핵심 통찰이 여전히 중요하다.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은 결코 해방될 수 없다. 한 나라의 지배자들이 자국의 소수 민족이나 외국의 민중을 분쇄하려고 휘두르는 바로 그 무기는 소수 민족이 아닌 자국 대중의 운동 또한 겨냥할 것이다. 지배계급이 우리에게 저지르는 범죄에 맞서려면 그 지배계급이 다른 이들에게 가하는 범죄에도 맞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억압하는 자들의 민족주의와 억압받는 자들의 민족주의를 명료하게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다른 민족보다 뛰어나다는 거짓된 우월 의식으로 자국민들을 하나로 매어 두려 한다. 후자는 사람들이 억압으로 인해 받는 모욕과 피해를 좌시하지 않고 떨쳐 일어서도록 만든다. 그 억압의 기준이 언어, 종교, 피부색 그 무엇이든 말이다.

레닌의 통찰 역시 중요하다. 오늘날 상대적으로 더 강한 국가의 지배자들이 훨씬 약한 국가의 지배자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그런 행동을 보며, 식민 지배의 기억을 가진 더 광범한 이들이 분노하고 저항에 나설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서방의 반자본주의자들은 ‘모든 지배자들은 똑같이 나쁜 놈’이라면서 팔짱 끼고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기성 제국주의자들의 야심을 꺾는 것에 힘을 집중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트로츠키의 주장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약소국을 지배하는 자들은, 트로츠키가 글을 쓰던 1920년대의 자본가·중간계급들보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훨씬 더 긴밀하게 통합돼 있다. 그들이 때로 거대한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는 제스처를 취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국내에서 인기를 얻기 위함일 것이다. 그때조차 그들은 다국적 기업, IMF, 세계은행 등에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손잡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오늘날 제국주의에 맞서자며 전민족적 투쟁을 운운하는 지배자들은 머지않아 다른 이들을 억압하는 데에 가담할 공산이 크다. 민족 해방뿐 아니라 다른 모든 진정한 해방은 그런 지배자들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사람들이 아래로부터 행동에 나설 때만 이뤄질 수 있다.


[1] 카를 마르크스가 쿠겔만에게 쓴 편지. Karl Marx and Frederick Engles, Selected Correspondence (Progress Publishers, 1975), www.marxist.de/archive/marx/works/1869/letters/69_11_29-abs.htm

출처: ‘National Liberation’ in 《Anti Imperialism -- a guid for the movement》
번역: 김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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