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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본주의는 건강·생명을 망가뜨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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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료원 폐업 시도를 계기로 의료불평등이 부각되고 있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민간병원보다 저렴한 공공병원에서 진료받는다. 또, 소득이 높을수록 의료이용률이 더 높고, 질병에 걸릴 확률은 낮고, 기대여명은 길다.
즉,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는 의료 이용은 물론 건강 상태 등에서도 큰 차이가 난다.
19세기 중후반까지만 해도 이처럼 병의 원인을 환경과 사회관계의 결과로 보는 시각이 중시됐다.
엥겔스는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에서 장티푸스, 결핵, 구루병의 병리와 역학을 상세하게 분석하면서, 의학적 개입만으로는 이런 질병들이 해결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근대 병리학의 창시자인 독일의 비르효(R. Virchow)는 실레지아 지방에서 발생한 발진티푸스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서, 토지 개혁과 소득재분배, 주거 개선, 그리고 다른 사회적 프로그램을 요구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의료가 ‘개인의 질병 치료’로 협소화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의료를 사회구조와 연결시키면 결국 지배계급에 대한 공격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질병의 원인을 세균이나 개인의 특성으로 돌리고 싶어 했다.
둘째는 의료를 더 쉽게 상품화하려는 시도 때문이었다. 질병의 원인이 개별 세균이나 개인의 생물학적 상태라면, 그 치료 방법도 상품으로 판매되기 적합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의료서비스가 분화되고 각각에 가격이 쉽게 매겨졌다.
그러나 이런 개별 의료기술의 발전보다는 자본주의 생산 발달과 대중투쟁이 건강에 미친 영향이 훨씬 크다. 수명 증가와 영아사망율 감소는 사실 영양상태, 공중위생, 식품위생이 향상된 덕분이었다.
또, 제2차세계대전 시기의 영국, 혁명 이후의 쿠바 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문제 해결을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묻는 분위기가 고조될 때 건강지표들도 향상된 바 있다. 그리고 서구의 ‘무상의료’ 제도, 한국의 전 국민 건강보험 역시 대중투쟁의 산물이었다.
물론 의료기술의 발전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있다. 그러나 그런 영향마저도 자본주의에서는 심지어 왜곡을 겪는다. 대표적인 것인 정신질환들이다.
우울증이나 자살 등은 사실 사회적으로 영향을 받음에도, 자본주의 의료에서는 개인 책임으로 환원된다. 의학기술의 발전은 수많은 뇌신경전달물질을 약물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고, 결국 정신질환의 치료로 약물이 많이 사용되게 됐다.
다국적 제약회사들은 이러한 과정을 각종 연구 등을 통해 확산하고, 당장의 효과를 기반으로 하나의 의학적 정설을 만들었다.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이란 개념은 미국에서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을 치료하면서 만들어졌고,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는 교육 통제에 어긋나는 아이들을 질병군으로 묶으면서 만들어졌다.
협소화와 왜곡
즉 질병을 철저하게 개인 책임으로 돌리는 과정과 의학기술의 발전이 결합해, 새로운 질병과 약품시장을 창조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외, 환경오염, 잘못된 작업환경 등이 새로운 질환을 만들어 낼 때도 그 해결책은 약물치료, 개인요양 등에 국한됐다.
현재의 의학적 치료는 결코 질병의 원인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노동자들도 질병의 원인이 체제 자체이고 소외된 노동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이것을 바꿀 집단적 힘을 깨닫지 못하면 좌절을 느끼게 된다. 즉 분노가 이윤 체제로 향하기보다는 의학기술, 약물, 치료 등등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의료는 이윤 체제와 환경이 만들어 내는 문제점을 숨기는 기능과 함께, 하나의 새로운 상품시장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이 때문에 미디어를 통한 수많은 건강 강좌나 명의 칼럼이 실제로 대중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이런 과정을 극복하는 길은 사회적 차원의 해결책을 강조하는 데 있다.
우선, 자본주의하에서도 의료의 시장화·상품화를 저지하거나 또한 필수의료를 무상으로 하려는 사회적 노력은 여전히 중요하다.
근본에서는 돈이나 신분에 따라서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더 나은 치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소외, 경쟁, 잘못된 작업환경이 사라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