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로 세상 보기:
국가를 보는 세 가지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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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마녀사냥 속에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헌법 밖 진보는 안 된다’, ‘검찰의 수사에 협조해야 한다’ 등 잘못된 태도를 보였다. 이런 혼란과 문제점의 배경에는 국가를 보는 잘못된 관점과 태도가 깔려있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중앙위원장이자 세계적으로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국가를 바라보는 진보진영 내 여러 관점을 살펴보며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이루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주장한다.
국가를 잠재적 우군으로 보는 개혁주의
첫째는 체제를 좀더 인간적으로 만드는 데 함께할 수 있는 잠재적 우군으로 국가를 보는 관점이다.
이런 관점을 공유하는 개혁주의 진영은 중남미 좌파 정부들(특히 브라질의 룰라 정부)의 집권을 역사적 전환점으로 여겼다.
남반구초점의 월든 벨로는 비록 글로 쓸 때는 좀더 신중했지만, 2002년 11월 한 토론회에서 IMF가 브라질 정부에 강요한 정책, 즉 [지출을 줄여] 재정 흑자를 끌어올리라고 요구한 경제 정책을 룰라가 수용한 것에 조건부 지지를 표했다.
룰라는 자신의 정부가 “이행기적” 정부라는 말로 이런 행보를 정당화했다. 즉, 자신은 신자유주의를 탈피하길 원하지만 집권 초기에는 타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타협은 룰라 정부를 신자유주의적 감옥에 갇히게 했다.
이 현상의 배후에는 세계 자본주의의 경제 권력이 있다. 룰라는 국제 자본시장에서 브라질 헤알화 가치가 계속 떨어지는 것에 압력받아 양보를 거듭했다.
1960~70년대 영국의 윌슨 정부나 프랑스의 미테랑 정부 같은 과거의 사회민주주의 정부들은 자본 도피와 외환 위기의 충격에 무릎을 꿇었다.
오늘날에는 단지 그런 공격을 하겠다는 공포심만으로도 중도좌파가 집권조차 하기 전에 ‘워싱턴 컨센서스’에 투항하도록 만들기 충분한 듯하다.
흔치 않은 경우지만, 설령 어떤 개혁주의 정부가 그런 공격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버틴다 해도 자본가들이 쓸 수 있는 무기는 더 있다. 우고 차베스 정부에 맞서 베네수엘라 부자들이 조직한 반란은 좌파 정부가 실로 어떤 저항에 부딪힐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줬다.
또한, 1973년 칠레 쿠데타는 좌파 정부인 살바도르 아옌데의 국민연합 정부가 군화발에 짓밟힌 사례다.
이렇듯 역사를 보면, 오래 전에 마르크스와 레닌이 내린 결론, 즉 국가를 사회 변혁의 도구로 삼을 수 없다는 결론에 새삼 고개가 끄덕여진다. 국가는 자본주의 체제의 일부분이지, 그 체제를 바꿀 수 있는 수단이 아니다. 세계 자본주의가 가하는 경제적 압력은 국가를 자본 축적이라는 지상 명령에 충실히 따르도록 떠민다.
더욱이 국가의 핵심부에는 군대, 경찰, 첩보 기관 등 강압 수단을 독점하는 상시적 관료 기구가 자리 잡고 있으며, 이들이 궁극적으로 충성하는 대상은 선출된 정부가 아니라 선출되지 않은 지배계급이다.
그렇다 해서 민중 운동이 어떤 정부가 집권하든 상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룰라 정부는 브라질 노동당의 대중적 기반을 이루는 사회 운동 세력들, 특히 조직 노동자들과 무토지 농민들의 압력과 세계 자본주의의 압력 사이에서 빚어진 불편한 타협의 산물이다. 대중 운동은 자신이 집권을 도운 정부에 대해서는 특히 더 압력을 가하고 요구를 해야 하며, 그러면서도 그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태도를 지켜야 한다.
국가 문제를 회피하는 자율주의
반자본주의 운동 내에서 또 하나 우세한 관점은 어찌 보면 개혁주의의 정반대 편에 서 있는 듯한 관점이다. 이 관점은 기존 국가에 의존하기를 거부할 뿐 아니라, 자본으로부터 권력을 빼앗는다는 목표 자체에 반대한다. 자율주의 진영이 이런 관점을 대표한다.
예컨대 《제국》의 공저자 토니 네그리는 “탈출과 도피” 전략을 제안했다. “권력은 외부로부터 사회에 침투한, 물리쳐야 할 적이지만 이제는 ‘정복’하거나 ‘장악’하기에는 쓸모 없는 대상으로 보인다. 그보다는 그것을 축소시키는 것, 그것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
이 이론을 가장 완성된 형태로 제시한 사람은 자율주의 마르크스주의자 존 홀러웨이다. 그의 주장은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 세상을 바꾸기》라는 그의 책 제목에 잘 요약돼 있다.
홀러웨이의 결론은 무척 혼란스럽다.
한편으로 홀러웨이는 노동이 자본한테서 달아나는 것을 말한다. “도피란 일단 무언가를 부정하는 것이다. 즉, 지배에 대한 거부, 지배의 도구(예컨대 기계)에 맞선 파괴와 사보타주, 지배로부터의 도주, 유목민적 행태, 탈출, 이탈이다.” 이 구절은 자본주의 경제 관계의 틀 속에서 대안적인 형태의 협동적 생산 활동을 벌이자는 네그리의 구호를 상기시킨다.
일례로 어떤 사람들은 아르헨티나에서 기업주들이 폐쇄한 몇몇 공장을 노동자들이 접수해 운영한 사례를 마치 탈자본주의의 맹아라도 되는 것처럼 주장했다.
다른 한편으로 홀러웨이는 그래도 명색이 마르크스주의자인 만큼 이런 전략을 펼치더라도 생산적 자원은 대부분 여전히 자본이 통제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속에서 등장하는 대안적 경제 단위들이 자본금과 시장을 확보하는 방식에도 제약이 가해지기 때문에 이런 전략에 치명적 결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행위의 수단[즉, 생산수단 — 캘리니코스]이 자본의 손 안에 있는 한 행위는 교란되고 그 행위 자체와 대립하게 된다. 결국 몰수하는 자가 몰수당해야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성할지를 논해야 할 대목에서 홀러웨이는 “행위 대상의 사물성을 해체하고 그것을 행위라는 사회적 흐름에 (재)통합시키는 것” 어쩌고 하는 사변적 공상 세계로 숨어든다. 이 같은 형이상학의 안개를 걷어내려면 자본주의 구조들이 비록 인간의 노동에 의존해서 존속되고 재생산되기는 해도 그 구조들이 객관적 현실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이라면 그런 객관적 현실을 분석하고 이해하려 해야 한다.
이는 분석 자체가 목적이어서가 아니다. 자본주의의 객관적 구조에 천착해 분석해야 하는 이유는 체제의 약점을 간파하기 위해서다.
민주주의를 최고조로 발전시키려는 혁명적 관점
개혁주의와 자율주의에 공통된 요소는 바로 체념이다. 둘 다 자본과 국가의 힘이 난공불락이라는 믿음을 공유한다. 그런 탓에 국가를 사회 변혁의 동반자로 바라보려 하거나, 아니면 최대한 회피하고 견제하려는 것이다.
반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자본과 국가의 힘이 절대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것들과 대적할 수 있는 또 다른 힘이 이미 자본주의 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힘이란 곧 평범한 사람들이 지닌 엄청난 민주적 자기 조직화 능력이다.
이런 힘이 있는 가장 중요한 세력은 단연코 노동계급이다. 노동자들은 아주 작은 권익을 지키려 할 때조차 집단으로 조직화해야만 하는 존재다. 노동자들의 자기 조직화는 자본주의적 생산을 마비시킴으로써 체제의 혈류와도 같은 이윤 공급을 끊을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더 중요하다.
물론 자기 조직화 능력이 노동자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예컨대 중남미의 소농과 무토지 농민 운동도, 아르헨티나의 피케테로스 운동도 마찬가지로 자기 조직화 능력이 있다.
하지만 이 운동들 중 어떤 것도 노동자들의 경제적 힘(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의 노동 덕분에 돌아간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발휘할 수 있는 힘)을 갖지는 못한다.
과거에 투쟁이 절정에 도달했던 시기마다 노동자들은 기성 노동조합의 한계를 뛰어넘어 행동했다. 경제적 요구뿐 아니라 정치적 요구도 내걸고 대중 파업에 나섰다. 이런 투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고자 노동자들은 지역 수준과 전국 수준에서 노동계급 전체를 결속한 조직 형태, 노동자 대의원들의 평의회를 기초로 한 새로운 조직 형태들을 개발했다.
이 조직 형태들은 1905년과 1917년 러시아 혁명, 1936년 스페인 혁명, 1956년 헝가리 혁명, 1978~79년 이란 혁명, 1980~81년 폴란드 연대노조 운동 등 20세기의 거대한 반란 속에서 거듭거듭 등장했다.
노동자 평의회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허락되는 그 어떤 민주주의보다 더 앞서가는 민주주의를 구현한다. 풀뿌리 대중의 참여, 주거 지역과 일터에서 이뤼지는 탈중앙화된 의사결정, 상급 단위의 대의원들이 자신을 뽑아 준 사람들에 의해 언제든 소환될 수 있는 구조 등이 노동자 평의회의 특징이다. 이는 자본주의를 지탱해 주는 중앙집중적이고 관료적인 권력 형태와는 다른, 대안적인 사회 운영 방식을 보여 준다.
자기 해방
천대받고 착취당하는 다수가 자본주의 국가를 무너뜨리는 데 필요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같은 노동자 민주주의를 통해서다. 사실 노동자 평의회가 만들어지는 계기 가운데 하나는 공공 서비스가 ‘정상 운영’되지 않는 대중 파업의 시기에 노동자들이 지방 정부의 기능을 대신 떠맡아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 평의회가 단지 지방 정부의 기능을 인수하는 데서 멈출 이유가 없다. 이미 전국적으로 확산된 노동자 평의회라면 그 나라 국가를 통째로 대체할 조직적 역량과 경제 권력을 쥐고 있을 테니 말이다.
이 과업의 성패는 신생 노동자 국가가 모든 역량을 집중해서 자본주의 국가 권력 핵심부의 저항을 제압하냐 못하냐에 달려 있다. 이는 근본에서 보면 조직 문제가 아니라 정치 문제다. 다시 말해, 기존의 자본주의 국가가 해체되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 국가가 강압적 힘을 동원해 대중 운동을 파멸시킬 것이라는 주장으로 신생 노동자 권력 기구 내에서 다수를 정치적으로 설득하려는 노력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대중적 혁명 정당의 궁극적 임무다. 스스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신생 노동자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권력의 마지막 보루를 급습해야 한다는 점을 대중에게 납득시키는 것 말이다.
결국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혁명이란 소수의 쿠데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혁명이란 대중 파업 과정에서 탄생하는 노동자 민주주의 기구들을 단순한 투쟁 기구, 혹은 주요 자본주의 기관들에 대항하는 ‘반권력’을 넘어 대중이 스스로 사회를 운영하는 수단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말한다.
혁명은 결국 ‘권력 장악’일 수밖에 없다. 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 자본주의 국가는 서슬 퍼렇게 살아남아 반혁명의 거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존 국가의 전복은 소수의 음모가 아니라 평범한 대중이 스스로 사회를 운영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거대한 자기 해방 과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실현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