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

전체 기사
노동자연대 단체
노동자연대TV
IST
윤석열 퇴진 운동 2023~24년 팔레스타인 투쟁과 중동 트럼프 2기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한·일 갈등의 기본 성격과 세계적 맥락

이것은 본질적으로 제국주의 문제다

일본 아베 정부가 반도체 소재 등에 관한 대(對)한국 수출 규제 조처를 단행한 지 한 달 남짓 지났다. 아베 정부는 한국의 대표적 수출 품목들을 겨냥해 처음부터 수출 규제 조처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했다.

이 일은 어느 날 느닷없이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최근 한·일 관계에서는 갈등이 계속 불거져 나왔다.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일본 과거사 문제가 계속 불거져 왔다. 올해 1월에는 일본 초계기가 한국 군함을 위협하는 일도 일어났다.

게다가 8월 2일 일본은 대한국 수출 규제를 확대하는 조처를 내놨다. 아베 정부는 한국의 국무회의에 해당하는 각의를 열어,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백색국가)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화이트 리스트는 전략 물자 수출 때, 관련 절차를 간소화해 주는 국가의 목록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대량살상무기 확대를 막겠다며 대량살상무기 제조에 이용될 만한 물품(이른바 ‘이중 용도 물품’)의 거래를 규제하는 국제 제재 체제를 구축해 왔다. 바세나르 협정이 대표적이다. 화이트 리스트에 포함되면 그런 규제 절차를 면제받을 수 있다.

이제 한국이 일본의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되면 한국 기업들은 첨단소재, 전자, 통신, 센서, 항법 장치 등 군사 전용 가능성이 있는 최대 1100여 개 품목에 대해 일본 당국의 개별 수출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일본은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해, 통관 절차 통제로 한국을 압박하려고 한다. 화이트 리스트 제외에는 또한, 한국이 전략 물자를 공유할 만한 동맹국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대내외에 보내어 한국에 대한 정치적 압박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목표도 있다.

일본 아베 정부가 수출 규제 조처를 내리며 한국을 압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안부’ 문제든 강제징용 문제든 일본 과거사 문제가 일본 제국주의의 재도약 문제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아베는 평화헌법 개정을 꾸준히 시도하며 “전쟁할 수 있는 나라 일본”을 만들려 애써 왔다. 그런데 “전쟁할 수 있는 나라” 일본이 과거에 끔찍한 전범국이었음을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본 지배자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위신을 걱정한다. 즉, 일본 과거사 문제는 오늘날의 제국주의 문제의 일부인 것이다.

특히, 강제징용 피해 배상 문제는 미국·일본이 구축한 동아시아 제국주의 질서를 뒷받침하는 외교 합의들을 건드린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과 함께 맺어진 한일청구권협정 때문에 강제징용 피해자를 비롯한 과거 일제 침략 피해자들이 여태 피해를 인정받지도, 배상받지도 못했다. 이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일본과 한국은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고 합의했다. 이를 근거로 일본 정부는 피해자들의 개인 배상 요구를 무시했다. 한국 역대 정부들도 사실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아 왔다. 그런데 2012년에 이어 2018년 한국 대법원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 문제가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라고 판시한 것이다. 한일청구권협정, 한일기본조약 등의 1965년 한일협정은 지금까지 한·일 관계를 규정하고 한·미·일 삼각동맹의 구축을 뒷받침해 온 외교 합의의 하나였다.

1960년대 초 당시 미국은 일본이 동북아에서 미국의 역할을 나눠 맡기를 원했다. 그리고 서독이 서유럽을 맡는 이른바 “삼면체제”의 한 축이었던 것이다. 미국은 대소련 동북아 전초기지인 한국을 일본이 경제적으로 원조하기를 원했다. 그래야 한국을 반소를 위한 “제3세계 쇼윈도”로 활용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서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 차관과 기술을 공여하기를 원했다.

일본은 미국의 요구에 화답했다. 1960년 미·일 안보조약을 개정해 미일 간 공동작전과 일본의 군비증강을 의무로 규정하는 내용을 새로 넣었다. 그리고 한국과의 관계 정상화라는 미국의 요구에도 응했다. 물론 일본으로선 한국을 일본 경제의 영향권에 둠으로써 얻는 혜택이 만만치 않았다.

결과적으로 1965년 한일협정은 한·일 관계를 다져서 동북아에서 미국 제국주의의 동맹 구조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한·미·일 경제의 분업 구조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한국 지배자들은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하에서, 또 미국의 촉구 속에 자본축적(경제성장)을 위한 외자 획득을 위해 기꺼이 일본 제국주의와 화해했다. 그러면서 일본과 경제·안보 면에서 깊이 유착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화해는 일제 강점 경험이 생생한 한국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그 후에도 일본 과거사 문제는 현대 일본 제국주의의 재부상에 대한 우려와 중첩돼, 대중적 반발을 부를 잠재적 폭탄으로 남아 있었다.

일본 과거사 문제는 21세기 한·일 관계에서도 계속 쟁점이 돼 왔다. 특히, 미국은 중국을 효과적으로 봉쇄하려고 최근에 한국을 일본에 묶는 한·일 동맹을 강화하고 싶어 한다. 이것은 일본 지배자들도 원하는 것이다. 아베 정부는 중국 견제의 선봉장 구실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미·일 동맹을 갱신하며 일본의 군사적 구실을 확대·강화해 왔다.

이 맥락 속에서 한국과의 군사 협력 강화도 원했다. 미국과 일본의 구상대로 되려면, 한국과 일본의 군사 협력 관계 발전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일본 과거사 문제가 걸림돌이 됐다. 2012년 당시 이명박 정부가 몰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한일 지소미아)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키려 했다가 비난 여론에 밀려 취소한 일도 이런 맥락 속에서 벌어진 일이다.

당연히 미국은 이런 상황을 못마땅해 했다. 2015년 2월 힐러리 클린턴의 외교 책사이자 당시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 웬디 셔먼은 한 연설에서 한국 지도자들이 과거사와 영토 문제 등에서 “과거의 적을 악당으로 만듦으로써 값싼 박수”를 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2015년 박근혜 정부 하에서 한·일 양국이 맺은 ‘위안부’ 합의는 미국의 개입이 낳은 결과였다. 뒤이어 2016년 마침내 한국과 일본은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을 체결했다.

그러나 당연히 한·일 위안부 합의는 수많은 한국인들의 공분을 샀고, 박근혜 정부는 엄청난 원성을 샀다. 한·일 위안부 합의는 박근혜 퇴진 촛불 운동이 청산 대상으로 지목한 적폐의 하나였다.

문재인 정부는 이런 여론을 의식해야 했다. 그래서 한·일 위안부 합의로 만들어진 화해·치유 재단을 마침내 해산했다. 아베 정부는 한·일 상호군수지원협정 체결을 문재인 정부에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한국 내 “반일 감정” 때문에 문재인 정부는 이에 소극적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이번 수출 규제 조처는 자국의 대외 정책이 어그러진 데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성격이 강하다. 더구나 일본 지배자들은 중국의 부상에 따른 위기감이 상당하다. 그리고 제국주의 체제 내에서 자국의 위상을 어떻게 지킬지를 놓고 부심하고 있다. 이 점이 한국에 대해 지금처럼 강경한 반응을 보이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2010년 일본은 경제 규모에서 중국에 뒤처지기 시작했다. 같은 해에 댜오위다오(센카쿠) 영토 분쟁 때문에 중국이 일본에 희토류 수출 금지 조처를 내리자 일본은 중국의 압력에 밀려 한발 물러서야 했다. 그래서 청일전쟁 이래 처음으로 중국에 밀렸다는 불안감이 일본 지배자들 사이에서 커졌다.

중국의 추월은 일본 경제의 상대적 비중 하락이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동아시아 전체에서 일본 국내총생산(GDP)이 차지하는 비중은 1987년 74.1퍼센트였는데, 2015년에는 21.2퍼센트로 떨어졌다.(반면 중국은 8.3퍼센트에서 56.5퍼센트로 급증했다.)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력 비중 변화는 국가 간 권력 관계의 변화를 수반했다. 오랫동안 일본 경제의 앞마당처럼 여겨지던 동남아시아에서 이제 중국의 존재가 더 부각됐다. 동아시아 지역의 제국주의 질서 속에서 일본의 상대적 위상이 예전과는 달라진 것이다.

아베 정부는 바로 이런 위기감 속에서 출범한 정부다. 아베 정부가 헌법에 대한 해석을 바꾸어(이른바 ‘해석 개헌’) 집단적 자위권을 도입하고, 이제 실제로 개헌까지 하려고 나서는 까닭이다. 아베 정부는 군비를 GDP 대비 2퍼센트까지 늘리려고 하는데, 이것은 물론 미국 트럼프 정부가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일본은 한반도를 제국주의적 안보의 최전선으로 인식하고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유지에 주의를 기울여 왔다. 그런 점에서 일본은 최근의 세력관계 변화로 인해 한국을 우려의 눈으로 바라본다.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가 긴밀해진 한국이 혹시 훗날 중국과 제휴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한·미·일 동맹 강화 흐름 속에 일본이 ‘과거를 잊고 안보 협력을 강화하자’고 지속적으로 한국에 주문하는 이유의 하나다.

이제 일본은 자국의 제국주의적 위상을 지키고자, 트럼프가 했던 것처럼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라는 보호무역 조처까지 꺼내 들었다. 한·일 갈등은 일본이 제국주의 체제 속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지키려는 데서 비롯했다. 즉, 이 문제는 제국주의 문제다.

다른 한 짝인 미국 제국주의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는 것은 미국 제국주의에 반대해야 함을 의미한다. 미국과 일본은 오랫동안 유착해 왔기 때문이다. 지금 일본의 행보도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의 효과로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즉, 미국·일본이 함께 추진하는 대외정책과 이에 협력하는 한국 정부의 친제국주의적 행보에 반대하는 게 중요하다.

미국은 일본 과거 침략사 청산 문제에서 이미 원죄가 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직후 미국은 자국의 패권 유지를 위해 천황제를 비롯한 일본의 구질서를 존속시켰다. 그리고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식민 지배와 전쟁 범죄 문제에서 일본에 면죄부를 줬다.

그래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한국과 일본이 맺은 주요 외교 합의들은 모두 미국·일본 제국주의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것들이었다.

지금도 이 상황은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앞에서 강조했듯이, 미국은 대중국 견제에서 일본을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인식한다. 미국 국방부가 올해 발표한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에서 “미일동맹은 인도-태평양에서 평화와 번영의 주춧돌이다” 하고 강조한 까닭이다.

미국은 한·미·일 동맹 강화와 이에 필요한 제반 조처에 관심이 크지, 일제 침략 과거사 문제 해결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7월 22~23일 일본과 한국을 방문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존 볼턴이 진정으로 관심을 보인 사안은 한·일 갈등이 아니라, 일본과 한국의 호르무즈해협 파병 문제였다. 이것은 미국이 중립적 외관과 달리 사실상 일본 편을 들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임과 함께, 미국 제국주의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 주는 일이다.

그리고 8월 6일 존 볼턴은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과 일본 같은 동맹국 방어를 위해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의 코앞인 한국에 중국을 타격할 미사일을 배치하겠다는 얘기다. 중국은 한국에 중거리 미사일이 배치되면, 한국이 “미국의 총알받이”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직면한 진정한 문제가 제국주의 문제임을 명백히 보여 준다(관련 성명).

문재인 정부는 미국의 중재를 원한다. 그러나 미국의 ‘중재’는 더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미국이 나선다면 한국에 양보 압력을 가할 공산이 크고, ‘2015년 위안부 합의’ 같은 반동적 결과를 낳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5월 28일 일본 항모를 찾은 트럼프와 아베.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미국 제국주의에도 맞서야 함을 의미한다 ⓒ출처 백악관

경제 민족주의 문제는 어떤가?

일본이 한국에 수출 규제 조처를 단행하자 한국 내에서는 민족주의적 공분이 일었다. 진보·좌파의 대부분은 이 문제를 한국에 대한 일본의 “경제 침략” 문제로 인식한다. 이런 좌파 민족주의적 상황 인식은 일본의 경제 “침략”에 맞서 “우리” 경제를 보호하고 그것을 위해 계급을 가로질러 단결해야 한다는 주장에 직면해 취약성을 드러낸다. 이런 인식은 진보·좌파 다수가 일본산 불매운동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한국의 경제적·지정학적 위상은 일제 강점기는 물론 1960~70년대와 판이하게 다르다. 오늘날 한국은 일본에 의해 억압당하는 나라가 아니다. 한국의 지배계급은 일본의 지배계급과 함께 자본축적과 안보를 이뤄 왔다. 즉, 오늘날 한·일 갈등은 ‘민족 문제’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국제주의자로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금의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지지할 수 없다.

우선 자본의 국제적 통합과 제국주의를 구분해야 한다. 일부 좌파적 민족주의자들은 자본의 통합을 제국주의와 동일시한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경제와 단절한 민족적(일국적) 대안을 지지한다.

그러나 나라 간 생산과 시장의 통합을 촉진하는 경제적 과정인 자본의 국제적 통합은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서로 경쟁하는 체제인 제국주의 자체와는 구분된다.

불매운동이 언론의 인기를 끄는 와중에, 지금이 일본한테서 기술 “독립”을 할 적기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를 위해 국산화를 지원하고 “우리” 경제를 보호하자는 것이다. 이처럼 불매운동의 저변에는 보호무역주의 논리가 깔려 있다. 그러나 보호무역주의는 자유무역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의 대안이 될 수 없다. 보호무역이든 자유무역이든, 자본주의 국가는 항상 자국 자본의 이해관계를 보호하고, 자본들이 노동자들을 ‘자유’롭게 착취하는 체제의 유지에 힘쓴다.

일본산 상품을 거부하는 게 노동계급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는가? 일본에서 물건을 수입하는 기업에서 일하는 한국 노동자들에게 불매운동은 득이 될 수 있을까?

이처럼 불매운동의 저변에 깔린 논리는 여러 문제를 가져다줄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 노동자들을 민족주의적 방향으로 이끌어 한국 자본가 계급과 유대감을 느끼게 만든다. 다른 한편, 한국 노동계급을 일본 노동계급과 정서적으로 단절케 만든다.

실제로 적잖은 진보파들은 한·일 갈등과 관련해 문재인 정부를 폭로하지도 차이점을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노동계급 의식을 노동계급 국제주의가 아니라 민족주의로 이끌고 있다. 그러나 과연 문재인 정부는 노동계급이 적어도 제국주의 문제에서는 협력할 만한 대상인가?

게다가 오늘날 한국 경제가 일본 경제와 단절하고 이른바 ‘자립 경제’로 나아가는 것은 공상일 뿐이다. 한국은 1960년대 이래 세계경제를 지향하는 수출 경제로 성장해 왔다. 그리고 한국 경제는 일본 경제에 일방으로 이용(또는 침략)당하는 존재가 아니다. 한국의 대기업들은 일본 기업들과 긴밀히 유착하면서 경쟁과 함께 이해관계도 공유하는 관계를 반세기 넘게 발전시켜 왔다. 그래서 한국 기업들은 일본으로부터 자본재·중간재를 수입해 중국과 미국 등지에 중간재나 완성품을 수출하는 구조가 안착해 있다.

이처럼, 한국 지배계급은 정당을 막론하고 세계 자본주의·제국주의 체제 속에서 일본을 포함한 서방 국가와 여러 면에서 얽히고설켜 있다. 그래서 제국주의 문제에서도 계급에 따라 이해관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문재인 정부를 비롯한 한국 지배계급은 일본 제국주의에 일관되게 맞설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 많은 진보파들이 나경원과 황교안 같은 지배계급의 우파만을 “토착 왜구”라고 간주하지만, 실상 역사와 이해관계를 모두 고려한다면 한국 지배계급 전체가 토착 왜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일본의 경제 보복 조처에 반발하며 일관되게 저항할 듯한 모양새를 보여 왔다. 문재인 스스로 “일본에 두 번 지지 않겠다”고 했다. 정부·여당은 명량해전 12척, 항일 의병 같은 자본주의 이전 시대 역사 얘기까지 꺼내며 일본의 경제 압박에 단호히 저항할 듯한 모양새를 취한다.

그러나 사실 김대중·노무현의 민주당 정부도 이전의 우파 정부들처럼 일본 과거사 문제에서 일관되게 일본 제국주의에 항의하지 않고 결국 배신적 타협을 모색했다. 예컨대 2004년 노무현도 당시 일본 총리 고이즈미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내 임기 동안에는 정부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를] 공식적인 의제나 쟁점으로 제안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나 이듬해 일본이 독도 문제로 도발해 오자 노무현은 태도를 바꿔 일본에 단호히 대응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일회담 당시의 비공개 외교 문서 일부를 공개했다.

그러나 2005년 8월, 당시 국무총리 이해찬(현 민주당 대표), 당시 민정수석 문재인이 포함된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민관공동위)는 공동 발표문에서 “청구권협정을 통하여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3억 불은 …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임”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민관공동위는 이전 정부와 다르게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을 부인하지 않았다. 실제로 민관공동위 백서에는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 청구권이 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동시에 민관공동위는 백서에 “우리 정부가 일본에 다시 법적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신의칙상 곤란”하다고도 해 놓았다. 즉,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개인 청구권은 있지만 이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 정부가 나서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실천인데, 노무현 정부는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의 배상을 위해 애쓰기는커녕 자신들이 청구 대상이라고 말해 놓은 위안부 피해자, 사할린 동포, 원폭 피해자 문제 해결에서도 임기가 끝날 때까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도 역대 정부처럼 한국 자본주의가 일본과 맺고 있는 관계를 의식한다. 지금도 문재인 정부는 일본의 수출 규제가 낳을 경제적 손실에 주된 관심이 있고, 여기에 대응하고 항의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가장 핵심적 문제인 제국주의에 저항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핵심 문제인 한·미·일 군사 동맹 유지에 문재인 정부는 헌신하고 있다. 문재인은 이미 2017년 트럼프와의 첫 정상회담에서 “한·미·일 3국 협력을 증진시켜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후로도 과거사 문제로 “한·일 간 미래지향적 관계”를 훼손하지 않겠다고 강조해 왔다.

그 결과 문재인 정부는 과거사 문제에서 일관성이 없었다. 화해·치유 재단은 해산했지만,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재협상은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강제징용 문제에서도 문재인 정부는 6월, 한·일 기업들의 자발적 출연금으로 기금을 만들어 피해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는 타협안(‘1+1’안)을 일본에 제안했었다. 물론 일본 정부는 이 타협안도 거부했다.

최근 문재인 정부는 일본이 협상에 응한다면 전에 제시한 ‘1+1’안에서 더 후퇴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7월 15일 문재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제시한 방안[‘1+1’안]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한 바 없으며 양국 국민들과 피해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합리적인 방안을 함께 논의해 보자는 것이었다.”

현재 정의당, 민중당을 비롯한 한국의 진보파들은 모두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을 폐기해야 한다고 옳게 주장한다. 문재인 정부와 여당 인사들 중에도 지소미아 폐기 가능성을 시사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소미아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미국의 관심과 중재를 이끌어 내겠다는 정부·여당의 책략 차원에서 제기될 뿐이다. 미국은 한국이 지소미아를 폐기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다. 한·미·일 동맹을 지지하기로 한 이상, 문재인 정부가 한일 지소미아를 스스로 폐기할 가능성은 매우 작다.

한편, 문재인 정부는 “자주국방”을 강조하며 군비 증강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면서 F-35 같은 미국산 첨단 무기를 수입하는 데 열을 올린다. 한국이 구입한 F-35의 수리는 미국이 지정한 지역정비창에서 해야 한다. 그런데 미쓰비시중공업(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받은 그 기업!)의 정비라인이 그 지역정비창으로 지정돼 있다. 이것만 봐도, 문재인 정부의 항일 제스처가 갖는 한계와 위선이 드러난다.

아쉽게도 진보계 다수파는 지소미아 문제에서 문재인 정부를 폭로하거나 차이점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진보계 다수가 주축이 돼 구성한 연합체 ‘아베규탄 시민행동’은 지금 지소미아 폐기를 위한 청와대 국민 청원을 강조하고 있다. 즉, “대통령님한테 [지소미아를 폐기할] 힘이 없다면 국민들이 그 힘을 주자”는 것이다.

진보파 일각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추진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일본 아베 정부가 반발해 지금의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한·미·일 동맹을 유지하는 한, 한국 정부의 운신의 폭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문재인 정부는 미국의 대북 정책에 보조를 맞추며 북한에 접근해 왔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대북 제재에 대해 단 한 순간도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다. 이 점에서, 아베의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해서라도 남북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좌파적 민족주의자들의 주장도 비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로 심각하게 갈등을 빚는다고 보는 것은 지금의 한반도 주변 정세를 잘못 보는 것일 뿐 아니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굳건히 추진할 수 있도록 문재인 정부를 도와야 한다는 민중주의적(좌파적 포퓰리즘) 함의가 있다.

반면 지금 문재인 정부와 대기업들은 일본산 불매운동(과 국산품 애용 정서)에 편승해, 평소 자신들이 하고자 한 일을 추진하고 있다. 부품·소재 산업 국산화를 촉진하겠다며, [화학물질] 규제 완화를 추진한다고 했다. 이 틈에 환경·노동 등의 규제를 풀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열린 민관정 협의회에서 주로 논의한 게 이런 신자유주의적 의제들이었다. 거기에 정의당 박원석 정책위의장이 참석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삼성은 반도체 부문에서 주52시간제를 완화해 달라고 정부에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문재인의 복심인 양정철은 수출 대기업은 국가대표 기업이요, 삼성은 슈퍼 애국자라고 치켜세웠다.

좌파적 민족주의는 이런 부르주아적(자본주의적) 민족주의에 저항할 일관된 대안을 결코 제시하지 못한다. 외국의 경제전쟁에 맞서 보호무역을 강화하자는 입장이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부강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고, ‘좌파적’ 원칙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통합돼 있는 세계 자본주의 경제 안에서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일 갈등 국면에서 문재인과 여권을 포함해 계급을 초월한 범국민적 단결을 주장하는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공세에 대한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 특히, 노동계급 투쟁이 주된 양상인 이 시국에서 문재인 정부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정세 역행 방침이거니와, 진정한 반제국주의 운동 건설에도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진보파는 문재인 정부와는 독립적으로 반제국주의 운동을 건설해 가야 한다.

맺음말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불매운동 같은 민족주의적·민중주의적 대안이 아니라 계급투쟁적 반제국주의 운동을 건설하려 애써야 한다.

일본 아베 정부의 개헌 시도와 무장 강화 시도에 반대하고, 미국이 계획하고 일본이 앞장서며 한국이 협력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제국주의적 패권 정책에 반대해야 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호르무즈해협 파병 반대 같은 운동의 의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지금 미국은 호르무즈해협에서 이란을 견제할 다국적 함대 구성을 위해 애쓰고 있다. 이 바다를 통과하는 석유에 한·중·일 등이 상당히 의존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인근의 페르시아만 연안국들이 세계적 금융 중심지로 성장했다는 점에서도 이것은 단지 먼 나라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외관상 동아시아와 밀접한 관계가 없어 보이는 그런 곳에서 성조기 밑에 태극기와 욱일기를 단 군함들을 모으려 한다.

한·일 갈등 와중에 문재인 정부는 이 요청에 적극 화답하려 한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호르무즈해협에 파병하지 않더라도, 호르무즈 해협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함선과 초계기를 파견하거나 연합사령부가 설치되면 인력을 파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런 일에 항의하는 게 진정한 반제국주의 운동 건설의 출발이 될 수 있다. 비록 그 호응이 크지 않고 소수에서 출발하는 운동일지라도, 그런 방향을 향해 인내심 있게 나아가는 좌파가 지금 있느냐 없느냐는 훗날 미래의 결과를 바꾸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 지금 혁명적 좌파는 스스로 그런 잠재적으로 결정적인 변수가 돼야 한다.

이메일 구독, 앱과 알림 설치
‘아침에 읽는 〈노동자 연대〉’
매일 아침 7시 30분에 보내 드립니다.
앱과 알림을 설치하면 기사를
빠짐없이 받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