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지정학적 위기로 더욱 우경화하는 일본 지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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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일본 아베 정부는 대대적으로 내각을 개편해 우익 측근들을 요직에 임명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과거사 망언으로 악명이 높은 자들이다.
새 내각 장관 20명 중 아베를 포함한 15명은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에 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회의’는 ‘천황제 중심 사회’로의 복귀를 꿈꾸며 개헌을 목표로 ‘국민 운동’을 벌여 온 매우 우익적인 단체다.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는 ‘일본회의’를 지원하는 국회의원들의 모임이고 아베 자신이 이 단체 고문이다.
일본 지배자들의 우경화는 식민 지배의 역사를 기억하는 한국과 동아시아의 많은 대중에게 큰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일본 지배자들이 갈수록 우경화하는 배경에는 일본 자본주의가 직면한 심각한 위기가 있다. 1990년 이래 일본의 실질 연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평균 1퍼센트를 넘지 못했다. 경제 회생을 위해 아베 정부가 추진한 아베노믹스 정책도 거의 효과가 없었다. ‘잃어버린 10년’은 ‘잃어버린 30년’이 됐다.
일본 지배자들의 위기감을 더욱 심화시킨 것은 중국의 부상이었다. 1968년 일본은 독일을 제치고 서방 세계에서 미국 다음가는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42년 후인 2010년에는 중국에 2위 자리를 내줘야 했다. 일본 지배자들은 이 같은 순위 변동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중국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력도 발전시켰다.
일본은 중국과 경제적 교류를 증대시키면서도 중국의 경제적·군사적 부상을 누구보다 우려한다. 지난 시기에 일본이 동아시아 제국주의 질서에서 누려 온 위상을 중국이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등을 둘러싼 중·일 간 긴장과 갈등도 고조돼 왔다. 일본 지배자들의 위기감은 더 커졌다.
일본은 러시아와도 지정학적 갈등을 벌여 왔다. 쿠릴 열도를 둘러싼 갈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2010년 이래 이 지역을 둘러싼 긴장이 고조돼 왔다. 러시아 정부는 쿠릴 열도에서 군사력을 강화하고 주기적으로 군사훈련을 벌이는가 하면 공세적으로 경제 개발을 추진 중이다. 러시아 해군에게 이 지역은 태평양 진출을 위한 주요 관문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아베의 ‘등판’
2012년 강경 우익 아베가 ‘등판’한 것은 이처럼, 장기화하는 일본 경기 침체와 동아시아의 경제적·지정학적 경쟁 심화가 낳은 효과였다. 아베는 자신이 주변국의 ‘위협’으로부터 일본을 지키고, 장기 경기 침체에서 일본을 구출할 적임자라고 강조했다.
아베는 헌법 해석을 변경해 일본 국가가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게 했고,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안보관련법도 제·개정했다. 그밖에도 교육기본법 개정, 특정비밀보호법 제정, 일본판 국가안전보장회의 설치, 무기 수출 3원칙 폐지 등을 강행하며 ‘전쟁할 수 있는 나라 만들기’를 위한 순서를 밟았다.
미일동맹도 아베 정부 하에서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일본의 군사대국화는 무엇보다 일본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 견제에 더 많이 기여하길 바라 온 미국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졌다. 미국과 일본은 2015년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재개정해 미일동맹의 활동 범위를 확대하고(‘지역 동맹’에서 ‘글로벌 동맹’으로), 집단적 자위권을 명문화했다.
아베는 군사대국화를 추진하는 데 걸림돌이 될 ‘평화헌법’을 개정할 기회도 살피고 있다. “2020년을 새로운 헌법이 시행되는 해로 만들고 싶다”며 강한 개헌 의지를 밝힌 바 있다. 그는 현재 중의원과 참의원 모두에서 개헌에 유리한 위치가 된 상황을 놓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미일동맹 강화와 일본의 군사력 증강은 중국을 더 자극해 동아시아를 더한층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이렇듯 아베노믹스 실패와 동아시아에서 치열해지는 제국주의 경쟁은 일본 지배자들을 더한층 초조하게 하고, 더 우경화한 정치로 이끌리게 만들고 있다. 최근의 한일 갈등은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일본 군국화 야욕과 ‘강한 일본’ 만들기는 일본 노동자·민중의 항의에 직면해 왔다. 지금껏 이 저항은 충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베 정권에 맞서 저항하고 행동하는 일본 노동계급의 잠재력에 주목하고, 무엇보다 그 속에서 효과적인 대안을 내놓을 혁명적 좌파가 일본에서 성장하기를 바라야 한다.
아베노믹스의 실패
아베는 집권 후 중앙은행장을 새로 임명하며 ‘아베노믹스’를 펼쳤다. 막대한 돈을 푸는 것이 그 정책의 골자로, 통화 가치 절하와 수출 증대, 정부 재정 지출을 통해 경기를 부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로 보아 아베노믹스는 실패했다.
지난 6년간 실질 GDP 성장률이 1.2퍼센트에 그쳤다. 1인당 GDP가 소폭 늘긴 했지만, 이조차 고령화로 인구가 준 덕분이었다.
물가상승률을 2퍼센트로 끌어올리는 것도 아베노믹스의 주요 목표 중 하나였지만, 통화량을 늘렸음에도 이를 달성하지 못했다.
물론 대담한 양적완화와 재정 지출은 기업들에게 큰 이득을 안겼다. 도요타 자동차 같은 수출 대기업들은 엔저에 힘입어 실적이 개선됐다. 아베는 40퍼센트에 가까웠던 법인세를 2018년 30퍼센트로까지 낮춰 가며 기업들의 수익을 보장해 줬다.
그러나 디플레가 만성이 된 상황에서 일본의 가계 지출은 하락 추세이고, 노동자들의 실질임금도 아베노믹스 전보다 오히려 하락했다. 올해 초 아베 정부는 통계 조작으로 이런 현실을 가리려다 들통나 거센 비난을 받았다.
기업 퍼 주기의 이면에는 노동자·서민 쥐어짜기가 있었다. 법인세는 감소했지만 소비세는 인상됐다. 노동조건에 대한 공격도 잇따랐다. 아베노믹스의 ‘세 번째 화살’이라고 불린 “구조 개혁”은 “노동유연화”의 다른 이름이었다. 특히, 파견기간 제한을 없애 사용자가 파견노동자를 더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파견법을 개악했다. 지난해에는 ‘고소득 노동자’들에게서 잔업 수당이나 휴일근무 수당을 빼앗는 노동시간 개악도 추진했다.
아베 정부는 실업률이 낮아져 ‘완전 고용’을 이뤘다고 선전했지만, 이는 저임금 일자리나 파트타임 같은 저질 일자리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과 노인들이 이런 일자리에서 일한다.
그러나 아베 정부의 노동자 공격과 기업 퍼 주기 정책도 실물경제를 살리는 효과를 거의 내지 못했다. “일본 기업들은 수익성이 개선됐지만 여전히 상당 수준으로 투자를 늘릴 준비가 돼 있지 않다.”(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 이는 로버츠가 지적하듯이 근본적으로 이윤율이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다른 주요국들의 사정과 마찬가지로, 막대한 정부 지출은 일본의 정부 부채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 일본의 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은 2012년 229퍼센트에서 2019년 238퍼센트로 늘었다.
참고자료
- 길윤형, 《아베는 누구인가》, 돌베개
- Michael Roberts Blog, ‘Abenomics: an upd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