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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련을 북한 당국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윤석열 정부와 우파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를 북한 국가와 동일시하면서, 합법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재일동포 단체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뿐이라고 강조한다.

정부는 대한민국 국적(한국적)을 얻지 않은 ‘조선적’ 재일동포를 잠재적 북한 간첩쯤으로 취급하며 입국을 흔히 엄격하게 제한해 왔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지 말 것은 조선적의 ‘조선’은 북한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분단 이전의 한반도를 뜻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조선적은 엄밀히 말하면 국적이 아닌 출신 지역을 나타내는 것이다.

1945년 한반도가 일제강점에서 해방된 이후 60만여 명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대부분 귀국 경비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처지 때문이었다. 물론, 북한 귀국 희망자의 경우 북한-일본 사이의 단절 때문에 못 돌아간 경우도 있었다.

이 조선인 60만여 명에게 일본 정부는 ‘조선적’을 부여한 뒤 오랜 세월 제도적으로 또 시스템 상으로 차별했다.

재일동포들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한국적 취득이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조선적을 유지하는 재일동포가 현재도 3만여 명이나 있다. 한국 정부는 이들을 친북 성향으로 싸잡아 간주하고 차별해 왔다.

조선학교 고교무상화 소송을 다룬 다큐멘터리 〈차별〉의 한 장면 ⓒ출처 다큐멘터리 〈차별〉

‘총련 대 민단’으로 대표되는 재일동포 내 친북/친남 갈라치기는 일본 사회에서 차별받고 배제당하며 고통받아 온 재일동포들을 이중 삼중으로 짓눌러 왔다.

총련과 민단의 탄생과 대립은 한반도가 남북으로 쪼개져 냉전적인 대립이 지속된 과정의 일부였다.

해방 이후 일본에 남은 동포들은 당장의 어려운 상황을 서로 협력해 해결하려고 조선인 단체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45년 10월 재일동포들의 전국적 통일단체인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조련이 곧 일본공산당 친화적 성향을 띠자(이후 총련으로 발전), 이를 반대한 우파 민족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계가 1946년 10월, 반공을 기치로 민단을 결성했다.

민단은 이승만 독재 시기에 이승만 지지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분열했다. 그러다 1961년 박정희 정권 등장을 기점으로 좌파(이후 한통련으로 발전)가 떨어져 나가면서 더한층 우익적인 남한 정부 친화적 조직이 됐다. 민단에 다소 무관심했던 이승만과 달리, 박정희는 전폭적으로 재정을 지원하며 민단을 끌어들이고 이용했다.

박정희는 민단을 비판하며 이탈하거나, 민주화 운동을 지지한 재일동포 유학생들을 손쉬운 간첩 조작의 먹잇감으로 삼았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총련을 통해 북한 지령을 받았다는 식이었다.

한편, 1955년 발족한 총련은 초기부터 북한 정권과 긴밀한 관련을 맺었다.

총련은 북한 정부가 지원해 준 돈으로 재일동포 학교(조선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했다. 북한 정권은 한국전쟁 이후 단절된 남한·일본 정부와의 대화 통로를 여는 데에서 재일동포 내 입지를 활용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럼에도 북한 관료들과 총련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북한 관료들은 북한 사회의 지배계급인 반면, 총련은 일본 내에서 차별받는 소수 인종의 조직이다.

일본 공안기관은 총련을 상시적으로 감시하고 탄압한다. 때때로 그 칼날이 조선학교를 향하기도 한다. 일본의 우익들도 총련과 조선학교를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이처럼, 재일동포들은 일본 지배자들과 우익의 차별과 억압에 고통받으며, 일본·남한과 북한 국가 사이의 적대 때문에 계속해서 정치적 희생물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