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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와 일부 급진 페미니즘

반대 때문에 트랜스 여성 A씨가 여대 입학을 포기하면서,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를 둘러싼 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A씨의 여대 입학에 대해 6개 여대의 21개 급진 페미니즘 동아리가 ‘여성의 권리를 위협하는 성별 변경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냈다. 이에 동조하며 부산여성단체연합 대표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여성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것이 여성해방의 운동의 전략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이런 태도는 편협하기 짝이 없고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 과정에서 A씨를 포함해 많은 트랜스젠더와 그 가족들이 크게 상처받았을 것임은 불보듯 뻔하다.

그러나 이렇게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일부 급진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일반은 말할 것도 없고, 페미니스트 전체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다.

A씨의 입학을 환영하는 페미니스트들도 많았다. 여성단체연합을 비롯해 여러 주류 여성단체들, 학자, 활동가 등이 A씨의 여대 입학을 지지했다.

본지가 반복해서 지적했듯이, 성별 정체성은 흔히 오해하듯이 단지 ‘느낌’이나 ‘기분’이 아니다. 성별 정체성은 자신의 생물학적 성에 대한 내면적 인식과 사회의 성별 규범이 상호작용하면서 생겨나는 실재적인 것이다. 성별 정체성은 개인의 핵심 자아 중 하나로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서구에서도 트랜스젠더 차별 문제를 놓고 페미니즘은 상당히 첨예하게 분열해 있다. 한편에서는 트랜스젠더를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목소리를 높이지만 트랜스젠더를 옹호하는 페미니스트들도 꽤 있다.

예컨대, 글로리아 스타이넘(1960~1970년대 미국 여성 운동의 지도적 페미니스트)은 애초 트랜스젠더에 비판적이던 자신의 견해를 바꾸어, “트랜스젠더가 실재하는 진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포르노 반대 운동을 주도해 급진 페미니즘의 아이콘처럼 여겨지던 캐서린 매키넌도 트랜스젠더를 방어한다.

트랜스 여성의 입학을 반대한 일부 여대 학생들을 모두 혐오주의자로 치부할 수는 없다. 주도적 일부는 정말 트랜스젠더를 혐오해 그의 입학에 반대했겠지만, 주도자들에 동조한 학생들이 모두 같은 수준으로 트랜스젠더에 반대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성별 고정관념이 깊이 뿌리 내린 사회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이 트랜스젠더에 편견을 갖기는 매우 쉽다.

2018년 1월 뉴욕에서 열린 여성들의 반트럼프 집회 ⓒ출처 Alec Perkins(플리커)

근거 없는 편견

그러나 트랜스 여성이 위험하다는 주장은 근거없는 편견일 뿐이다. 트랜스젠더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불법촬영 등 트랜스젠더와 상관없는 범죄로 두려움을 부추기는 것은 심각한 곡해다. 구조적 여성 차별 때문에 벌어지는 일을 트랜스젠더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한편, 트랜스 여성이 위험하다는 생각에는 급진 페미니즘이 남성 일반을 잠재적·현재적 위협으로 간주해 온 관념도 얼마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여성운동에서 남 대 여 이분법적인 급진 페미니즘이 득세하면서 남성 일반을 여성 안전의 위협으로 여기는 정서가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강해졌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과 남성을 여성 차별의 원인으로 보는 정서가 결합되면, 트랜스여성의 여대 입학에 막연한 두려움이나 거부감이 커질 수 있다.

물론 이런 생각이 고정불변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트랜스젠더에 편견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모두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개신교 근본주의자들과 동급에 놓는 것은 올바른 태도는 아닐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여자대학에 대한 논란도 벌어지고 있다. 트랜스젠더 비판적 페미니스트들은 A씨 입학을 반대하며 여대가 “여성들만의 안전한 공간”이자, “남성중심 사회에서 차별받고 기회를 박탈당하는 여성들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여대에 대한 허황한 이상화일 뿐이다. 여대 안에는 이미 남성 교수, 남성 노동자 등이 공존하고 있다. 여자 대학생들을 위한 안전은 대부분 남성인 경비 노동자의 노고로 유지되고 있다. 여대는 결코 사회에서 분리된 요새가 아니다.

또, 여자들만의 대학이 특별히 진보성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대학 진학률이 높고, 여성들은 여대보다 남녀공학에 더 많이 다니고 있다.

게다가 이미 미국과 일본의 일부 여자대학교에서는 트랜스 여성 입학이 허용되고 있다(그중 일부는 성전환 수술을 받지 않은 트랜스 여성의 입학도 허용한다).

급진 페미니즘과 정체성 정치

앞서 지적했듯이, 급진 페미니스트들 중에서도 트랜스젠더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1960~70년대 미국 여성운동에서 부상해 오늘날 한국에서 득세하고 있는 종류의 급진 페미니즘의 사회관은 생물학적 결정론에 기초해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을 부추기거나 이에 동조하기 쉽게 한다.

그런 급진 페미니즘은 여성 차별의 원인을 남성의 생물학적 본성으로 환원하고, 사회를 남 대 여 프레임에 끼워맞춰 설명한다. 생물학을 근거로 남성 일반을 ‘권력자’로 규정하며 남성 일반이 여성 차별을 유지하는 데서 한통속이라고 본다. ‘남성은 잠재적 성폭력범’이라는 주장은 그런 급진 페미니즘의 유명한 명제다. 그래서 트랜스젠더 비판적 페미니즘은 급진 페미니즘에서 일탈한 게 아니라 그 생물학적 결정론과 성별 이분법이 일관되게 적용된 것이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트랜스 여성은 그저 남자일 뿐이고 그래서 여성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일관된 급진 페미니스트들이 남성 일반을 모두 여성 차별(혹은 성범죄)의 잠재적 가해자로 묘사하는 것은 현실과 맞지 않을뿐더러, 여성에 대한 범죄를 과장하고 공포를 부추기는 효과를 낸다(앞서 지적했듯이, 이번 트랜스 여성에 대한 공포 부추기기도 이와 관련 있다).

하지만 여성 차별의 원인은 생물학으로 환원될 수 없다. 여성 차별은 역사적·사회적 산물이다. 인류 역사의 97퍼센트가 넘는 기간 동안 여성 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인류학적 증거가 매우 많다. 여성 차별은 계급 사회와 함께 등장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자본가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유지되고 있다. 가족제도를 유지하고, 노동계급을 이간시켜 각개격파하려는 전략이 그것이다.

여성 차별의 원인을 생물학으로 환원하면 또한 여성 차별 극복은 불가능한 일이 된다. 그렇게 여기면, 차별을 낳는 사회구조 전반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동계급과 차별받는 사람들이 광범하게 단결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체제가 허용하는 몇몇 제한적 양보 조처를 지키는 것이 거의 전부처럼 여겨지며, 차별받는 다른 집단의 존재를 무시하는 배타성이 생기게 된다.

한편, 대부분의 급진 페미니즘이 수용해 온 정체성 정치도 천대받는 대중의 분열을 낳는다. 정체성 정치는 특정 차별을 겪는 사람만이 그 차별을 이해하고 그에 맞설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여성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자본주의 체제와 계급투쟁이라는 맥락과 분리시키면, 누가 ‘진짜 여성’인지를 가려내는 게 중요해진다.

이런 정체성 정치는 차별에 맞선 운동에 참가할 ‘자격’을 따지면서 운동을 오히려 협소화시킨다. 성별 정체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정체성 정치를 지지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개인의 정체성과 상관없이 차별을 낳는 물질적 기반에 주목하고 가능한 광범하게 단결해 저항해야 한다.

여성 차별과 트랜스젠더 차별은 계급 사회라는 차별의 원천을 공유하고 있다. 트랜스젠더 활동가이자 레즈비언이자 마르크스주의자 레슬리 페인버그는 계급사회가 등장해 남성 우위의 배타적인 가족제도가 발전하면서 더 엄격한 성 역할과 성별 범주의 협소화가 강화됐고 트랜스젠더에 대한 비난도 시작됐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여성의 해방과 트랜스젠더의 권리는 상호배타적인 게 아니다. 한 쪽의 조건이 침해받으면 다른 쪽의 조건도 결국 침해받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 차별과 트랜스젠더 차별은 서로 연결돼 있다.

비난의 화살

가족제도는 자본주의 하에서도 여전히 지배계급에 중요하다. 가족은 노동력 재생산에 핵심적 구실을 한다. 가정 내 여성의 육아와 가사라는 무보수 노동은 지배계급에 막대한 비용을 아껴 준다. 이를 위해 지배계급은 고정된 성 역할이 마치 남성과 여성의 본성인 것처럼 설파한다. 사람들은 이분법적 성별 규범이라는 틀에 욱여넣어지고, 여기서 고통받는 것은 트랜스젠더뿐 아니라 대다수 평범한 대중이다.

보수적 성규범으로 평범한 대중을 억압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와 그 수혜자들인 지배자들이다. 따라서 비난의 화살은 체제와 지배계급에 돌려야지, 트랜스젠더들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여성 차별을 받던 여학생들이 트랜스젠더 문제에는 기득권자가 됐다는 주장도 있다. 트랜스젠더 비판적 페미니스트들이 트랜스 여성이 ‘남성 특권’을 가지고 있다며 비판하면 그런 비판이 ‘시스젠더 특권’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특권 이론으로는 서로에 대한 비난 쳇바퀴를 벗어날 수 없다. 특정 차별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특권을 누리고 그 차별을 유지하는 게 득이 되는 것은 아니다. 특권 이론은 차별에 맞서 광범한 운동을 건설하기보다 운동을 파편화시킨다. 계급을 무시하기에 지배계급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운동 내에서 서로의 ‘권력’ 차이에 주목하게 해 분열을 촉진하기 쉽다.

트랜스젠더 비판적 페미니스트들은 트랜스젠더 차별의 원인이 아니다. 이들의 어떤 주장은 정말 듣기 괴롭지만, 이들과 막대한 권력을 가진 지배자들을 동급에 놓을 수는 없다. 대기업 소유자들과 그 정치인들은 트랜스젠더 수만 명의 삶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지배자다.

여성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성별 고정관념에 반대하며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무조건 옹호해야 한다. 그리고 모두가 자유로운 성별 표현과 섹슈얼리티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여성해방은 트랜스젠더 해방과 결코 분리할 수 없다.

필자 양효영은 여자대학을 졸업한 성소수자 활동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