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왜 화석연료에 중독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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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사무총장 안토니오 구테흐스는 기후 위기의 원인으로 “인류의 화석연료 중독”을 지목했다. 정말이지 어쩌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이토록 화석연료에 의존하게 됐을까?
스웨덴의 마르크스주의 생태학자 안드레아스 말름은 산업혁명 시기 영국의 에너지 전환 과정을 살펴보며 그 과정을 파헤쳤다.
석탄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증기기관이 발명된 이후다.
제임스 와트 등이 발명한 초기 증기기관은 인기를 얻지 못했다. 당시 영국의 공장은 대부분 수력을 이용해 방직기 등을 가동했는데, 증기기관은 물레방아보다 작고 효율도 나빴으며, 추가 비용이 들었다.
상황이 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일부 자본가들이 증기기관으로 노동자들을 좀더 효율적으로 착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였다.
수력을 이용한 공장은 유량이 풍부한 강가에 지어야 했고, 따라서 도시와는 떨어진 경우가 많았다. 공장주들은 노동자들을 붙잡아 두려면 공장 주변에 정착촌을 지어야 했다. 그러나 증기기관을 사용하면 이미 노동자들이 모여 있는 도시 안에 공장을 지을 수 있었다.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공장법 제정도 영향을 끼쳤다. 왜 이런 법이 필요했을까?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죽을만큼 부려먹는 것이 지속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았지만, 노동자들을 경쟁자들보다 더 많이 쉬게 하면 경쟁에서 불리하다는 것도 잘 알았다.
따라서 경쟁 자본 간에 경쟁의 규칙을 정할 필요가 있었다. 노동자들의 집단적 저항은 결정적 압력이었다. 영국 의회는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률 하에서 수력을 이용한 공장은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전에는 자본가들이 강우량이 풍부한 시기에 공장을 최대한 가동해 가뭄 때 입은 손실을 만회할 수 있었지만, 그럴 수 없게 됐다. 반면, 증기기관을 이용하면 매일 똑같은 시간 동안 최대한 공장을 가동할 수 있었다.
말름은 화석연료 도입이 더 효율적인 에너지원을 찾으려는 인류 공동의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라 이처럼 더 효과적인 착취를 위한 자본가들의 전략적 선택이었다고 지적한다.
제1, 2차세계대전은 화석연료 이용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도록 한 일등 공신이었다. 화석연료는 기동성이 필요한 군대에 안성맞춤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은 전시에 발전시킨 화석연료 설비들을 민간 자본에게 불하했고, 미국과 유럽 등 서방세계에서 석유가 핵심 에너지원이 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중동에 대한 제국주의적 개입도 이와 연관돼 있다.
개별 기업들의 이윤 축적 경쟁은 화석연료 기반 산업이 불과 수십 년 만에 전 세계에 뿌리를 내리도록 했다.
더 빨리 더 많은 이윤을 얻으려면 가장 투자가 많이 이뤄지고, 그래서 효율이 가장 높은 에너지 기술을 이용해야 한다. 오늘날 모든 산업국에서 핵심 에너지 기술들은 화석연료 맞춤형이다. 송유관부터 발전 터빈, 내연기관, 도로, 난방장치 등등.
지난 수십년 동안 이어진 과학자들의 경고에도 화석연료 중독을 끝내지 못한 이유는 기업주들이 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화석연료에 중독된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자들이고, 그들이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경쟁 논리 때문이다.
이 경쟁은 단지 지배자들의 의식이나 욕심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거대한 화석연료 기업들부터 자그마한 구멍가게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업은 이 가차없는 경쟁 논리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지 않으면 도태되고 망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 생태학자인 이언 앵거스는 화석연료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벗겨낼 수 있는 껍질 같은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화석연료 사용을 중단하려면 그것이 뿌리내리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완전히 다른 사회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국유화? 민주적 통제?
일각에서는 에너지 산업의 국유화를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이들은 ‘고삐 풀린 자본주의’, 즉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지난 50년 동안 오로지 이윤만을 위해 환경 파괴를 저지른 일부 자본가들이 기후 위기의 주범이라고 본다.
물론 세계적 수준에서 규제를 완화하고 경쟁을 격화시킨 신자유주의 정책들이 환경 파괴를 가속한 것은 사실이다. 민영화는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심화시킬 뿐이다.
그러나 오늘날 주요 에너지기업과 화석연료 기업들은 대부분 국영기업들이다. 한국만 해도 엄청나게 많은 온실가스를 내뿜는 화력발전소들은 대부분 국가 소유이고 그 통제 아래 있다.
따라서 소유주를 민간 자본에서 국가로 바꾸는 것으로는 기후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 자본주의 국가 자신이 기업 이윤과 경쟁력을 신성불가침의 우선순위로 여기기 때문이다.
‘민주적 통제’라는 단서를 달아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한 기업에 대한 통제를 시도하더라도 세계적 차원의 맹목적 경쟁 시스템을 조금치도 벗어나거나 제어할 순 없다. 자본주의 시스템하에서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할지에 관한 결정권은 한줌의 경영진·자본가·관료들에게 있고, 의회는 부차적 구실을 할 뿐이다.
이로부터 두 가지 결론을 내려야 한다. 하나는 기후 위기를 멈추려면 자본주의의 이러저러한 측면들뿐 아니라 체제 그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려면 체제 자체에 도전할 힘을 동원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은 오로지 노동자계급에게만 있다.
다른 하나의 결론은 지배자들의 책임을 평범한 사람들에게 떠넘기는 것에 일관되게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조만간 전기·가스 요금 등 공공요금을 인상할 예정이다. 물가 폭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허덕이는데 말이다. 소비가 기후 위기의 원인이라고 보면 이런 문제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편에 설 수 없을 것이다.
노동자들의 삶과 이익을 지키는 것이 기후 위기 해결과 결합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좌파적 대안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