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정조사를 돌아보면:
주류 정당 간 고성·정쟁으로 얼룩질 뿐, 대중의 진정한 관심사는 저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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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1일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특별위원들과 유가족들의 간담회가 열렸다. 그런데 국민의힘 국조특위 위원들이 간담회를 사실상 보이콧해 반쪽짜리에 그쳤다.
참사로 희생된 고 이지한 씨의 아버지 이종철 씨는 “이게 상식이냐. 이게 우리에게는 패륜”이라며 절규했다.
과거 많은 국정조사가 그랬듯이,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도 성과 없이 끝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예고하는 장면이었다.
게다가 민주당이 국정조사 시작을 예산안 처리와 연동시키는 합의를 하는 바람에, 국정조사는 여태 첫발도 못 떼고 있다. 그렇게 김을 빼는 사이 윤석열 정부는 꼬리 자르기식 수사를 하며, 윤석열 퇴진 촛불과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던 화물연대 파업에 초강경 대응을 했다.
역대 국정조사를 살펴보면 이는 반복되는 패턴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국정조사 제도는 1980년 제5공화국 헌법에 처음 포함됐다. 그러나 구체적 절차를 규정한 법률이 제정돼 처음 실시된 것은 1988년이었다.
1987년 6월 항쟁과 뒤이은 노동자 대투쟁의 여파로, 이듬해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노태우의 민정당이 참패했다. 그러자 노태우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협조를 구했고, 3김이 이에 ‘5공 비리’ 등에 대한 청문회를 요구했다.
첫 국정조사는 국민적 관심을 끌었으나 용두사미로 끝났다. 예컨대 5.18 광주항쟁 진상조사에선 학살자들을 청문회 자리에 세운 것은 전진이었지만, 그 뿐이었다. 나중에 ‘유행어’가 될 만큼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대답이 남발됐다. 엉뚱하게 전두환이 아니라 최규하가 불출석과 국회 모욕죄로 고발됐지만 그나마 무혐의 처분됐다.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와 직접적으로 비견될 수 있는 것은 세월호 참사 국정조사일 것이다.
세월호 참사 국정조사는 유가족들이 국회에서 농성을 벌인 끝에 당시 집권당인 새누리당의 양보를 받아 내 시작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야가 증인 채택에 합의하지 못하는 등 공전을 거듭하다 단 한 차례의 청문회도 열지 못한 채 끝났다.
이에 유가족들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을 벌였다. 당시 유경근 세월호 참사 가족대책위 대변인은 국정조사가 단식 농성을 하게 된 계기라며 이렇게 말했다.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자세로 기관 보고에 임하는 정부 부처나 기관들에 대해서 국회의원들이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뭘 강제할 수 있는 방법도, 더 깊은 수사를 하거나 조사를 할 수 있는 방법도 없고 그냥 호통치다 끝나요. 그걸 보면서 특별법이 이렇게 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호통치다 끝나요”
2013년 진주의료원 폐업을 계기로 한 ‘공공의료 정상화’ 국정조사도 돌아볼 만하다.
당시 경남도지사 홍준표가 진주의료원 폐업을 선언하자 진주의료원 노동자들이 병원 점거 농성에 돌입했다. 전국에서 수십 대의 ‘생명버스’가 달려와 집회를 여는 등 노동자들의 투쟁은 큰 지지를 받았다.
그러자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국정조사를 통해 진주의료원 사태의 진상을 밝히겠다’며 시간을 끌고 김을 빼려고 했다. 새삼스레 밝힐 것도 없이, 홍준표가 평범한 사람들의 건강과 생명을 위해서 쓰는 돈이 아까워 공공병원을 닫으려 했다는 것이 명백했는데도 말이다.
운동의 압력 때문에 국정조사 결과 보고서는 “1개월 이내 진주의료원[의] 조속한 재개원 방안을 마련”하라고 결론 냈다. 그러나 ‘불건강한 적자’가 있음을 공식화하는 독소 조항들도 포함됐고, 보건복지부는 이를 이용해 공공의료를 후퇴시키고 지방의료원을 고사시키는 방향의 대책을 내놨다. 홍준표는 국정조사 결과를 무시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국정조사보다는 당시 진주의료원 노동자들의 투쟁이 미래를 위한 씨앗을 뿌렸다.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고, 이는 2013년 12월 철도노조의 민영화 반대 파업으로 이어졌다. 이런 투쟁들이 쌓여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로 나아갈 수 있었다.
박근혜 퇴진 촛불 와중에도 국정조사 카드는 거리 투쟁의 힘을 헌정 질서 안으로 제한하기 위해 등장했다. 2016년 11월 12일 처음으로 100만 명이 모여 ‘박근혜 즉각 퇴진’을 요구한 직후 추진된 국정농단 국정조사는 즉각 퇴진 요구와 상충하는 것이었다.
그 청문회에서 최순실, 김기춘, 우병우 등은 모두 아무것도 모른다고 잡아뗐다.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밝혀낸 것이 맹탕으로 끝난 청문회의 몇 안 되는 ‘성과’였다.
그나마도 거대한 촛불 덕분이었다. 국정조사 기간이었던 12월 3일 촛불 집회에 무려 232만 명이 참가해 정점을 이뤘고, 그 직후인 12월 9일 국회에서 박근혜 탄핵안이 가결됐다.
요컨대 국정조사는 말다툼으로 끝나기 일쑤다. 미약한 성과라도 낸 경우는 거대한 대중 운동이 있고 국회가 아니라 대중 투쟁에 주도력이 있을 때였다.
윤석열을 퇴진시키기 위해서는 국회와 국정조사보다 거리 운동에 분명한 강조점을 둬야 한다.